1편

2편

3-1편

3-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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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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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7-1편





1.

그녀에게 이번 주는 유난히 길었다.

하루. 이틀.

끔찍한 정적의 아침부터, 이유없이 잠을 설치게 되는 긴 새벽까지.

그 피 말리는 하루를 겨우 넘길 때마다, 희수는 안에서부터 엉망이 되가는 자신을 느꼈다.

일은 당연히 나가지 못했다.

이런 몰골로 그 역겨운 가면들 앞에 서는 것은 제 스스로 약점을 내주는 꼴이니까.

그녀가 갑자기 이리 된 이유는 오롯이 하나였다.


보고 싶어.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점차 잊혀질 것이라는 어줍잖은 위안을 깨부수듯, 그의 얼굴은 점차 또렷해지기만 하였다.

정우의 모습. 정우의 얼굴.

그저 그 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했는데, 정작 그의 얼굴을 보고나니 가슴 속의 답답함은 되려 커져버리고 말았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이상하게 화가 난다.

어째서, 이제서야, 그 얼굴을 보여주는 거야.

어째서, 떠난 거야.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거야.

어째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 거야.


떠올릴 때마다 이상하게 보고 싶다.

날 봐줘.

날 안아줘.

날 사랑해줘.

언제나 그 눈으로, 그 얼굴로, 날 보았으면 좋겠어.


"허억, 허억..."


언제나 보아왔던 그 단조로운 회색의 공간을 마주하는 것이,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지경으로 힘들었다.

어쩐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의식적으로 들이 내쉴때면, 언제나 그 공기는 끈적이고 무겁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억지로 버티다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희수는 늘 그 공간에서 도망치듯 정우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아...


그가 있던 방은, 같은 회색의 질감일지라도 어째서인지 편안했다.

희미하지만 남아있는, 그의 잔향. 온기. 체취.

그것이 엄한 바람에 쓸려나가는 것이 싫어, 환기조차 하지 않은 그 방구석 침대에 틀어박혀, 희수는 이제 습관처럼 정우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흐읏...흐우..."


희수는 이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역겨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행위를 멈추지는 않았다.

어느새 강렬한 충동에 몸을 맡긴채,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정우...정우...씨..."


끔찍한 자기모멸과, 강렬한 격앙에 휩싸인 채,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를 상상하며, 망상에 빠진채 자신을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정우의 환상에 몸을 맡기며 희열에 젖었다.


보고 싶어.

갖고 싶어.

다시 내 옆에 있어줘.


그러나, 점차 커져만가는 욕심을 달래기에는 그 한계가 있었다.

사라진다.

향이. 체취가. 온기가.

들어갈때마다, 들이내쉴 때마다, 빨아들일 때마다.

그녀가 그를 갈구하면 갈구할수록 당연하게도, 집에서 정우의 자취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더욱 원하는데, 더욱 더...더욱 더, 원하는데...

그 사라져가는 것이 싫어서, 작은 하나조차 놓치기 싫어서, 두 손에 그러쥐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싫어..."


그가 가장 깊게 남아있던 정우의 베개에는 어느새 희수의 체취만이 가득했다.

아무리 들이내쉬어도, 그 안에 자리잡은 마지막 하나의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얼굴을 파묻어도, 이미 그는 사라졌다.

그녀는 점차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더이상 정우를 느낄만한 것이 모조리 없어지자, 그녀는 이제 온 집을 뒤져 그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없어...없어...없어..."


하지만, 그 오 년의 생활, 그 오 년동안 동거 해왔음에도. 회색의 집 그 어디에서도 정우의 흔적은 없었다.

미련한 년. 당연하잖아.

엉망이 되어버린 집 거실에 주저앉아있던 희수가 자조하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 시간 동안, 무의미해진 그에게 벽을 친 후, 어느 것 하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 집'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에게 집이라고는 오직 그 작은 방이 전부였으니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어느것을 두드리는 검지는 이미 빨갛다 못해, 심하게 부어있었다.

필요해.

너무 필요해.

정우가...정우가 너무 필요해.


차라리 몰랐으면 되었을 것을.

차라리, 한 순간의 착각이라 단정짓고 그대로 잊고 지냈으면 될 것을.

그 호기심에, 그 유혹을 못이겨, 정우의 얼굴을 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그 날처럼 되돌아온 그를 두 눈에 새긴 그 순간.

희수는 자신조차 의식하지도 못한채, 오 년 전. 정우를 처음 본 그 날처럼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진이 필요해요. 지금 당장."


저번에 찍었다던 사진이 필요해, 김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보낸 사진에는 비록 작기는 했지만 정우의 모습이 선명히 담겨있는 것이었다.

휴대폰으로 보기에 그 모습이 너무 작아, 사진을 잔뜩 확대해 프린트로 출력했다.

아, 이제 보여.

작게나마 대체제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희수는 곧장 나머지 사진들도 남김없이 출력해 벽에 붙이기 시작했다.


갈증을 달래듯, 모조리 채워넣듯이.

조금이라도 만족하기 위해, 그렇게 수많은 정우의 얼굴들을 정성스레 붙혔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하루를 채 버티지 못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정우는 의미가 없었기에.


나만을 봐줘.

나만을 봐야 돼.

그렇게 생각하며, 희수는 결국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이제는 참기 힘들었다.

그가 떠난지 딱 일주일.

희수는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갈 결심을 내렸다.


"이정우, 찾아주세요. 지금...지금...당장."


[알겠습니다.]


김실장이, 주소를 보내주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이 주변을 맴돌며, 그녀와 오 분도 채 안되는 거리의 어느 카페에 있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몰라.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다시 만나자고 하면, 어쩌면 못 이기는 척 들어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희수가 상기된 얼굴로 차로 달려갔다.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다시 그 눈을 마주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생각이었다.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그만큼 그의 진심을 원하니까.

어른, 노인, 아이 어느 것 하나 다를 것 없이 가면 투성이인 이 끔찍한 세상에서, 오직 그 만이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봐주었으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희수는 그깟 오 년의 시간낭비도, 정우의 배신도 모두 없던 일로 치부 할 수 있었다.


끼이익.


차를 주변에 댄 뒤, 희수가 곧장 카페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우에게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다시 쿵쿵대고 있었고 그 울림은 오히려 전보다 더 심해졌다.

한 걸음씩 가까워져 간다.

드문 드문 빛이 약한 가로등 너머로, 상대적으로 더 빛나는듯한 카페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에 서있는 남자.

카페서 나와, 반대편 거리를 바라보던, 이제 자신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희수는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 년 전의 정우다.

정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쪽으로 다가 오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로, 흥분하는 자신을 애써 진정시키며, 희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우 씨."


그 말을 들은 정우의 발이 멈추었다.

점차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변해가는 얼굴.

그 표정을 보며, 희수는 그저 정우가 살짝 놀라서 그런 것이라고 제멋대로 착각하고 말았다.


"정우 씨."


다시금 그 기분좋은 울림을 느끼며 이름을 불렀다.

보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오롯이 그 눈에 자신이 담겨있다.

거짓을 벗은 정우의 그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희수가 억지로 쓰고있던 가면이 어그러지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이 곧장 몸을 내달리고 있었다.

참자.

꾸욱 참아...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물러났다.

다가가는 만큼, 물러났다.

순간, 희수는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왜?

왜 도망치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졌다간, 곧장 뒤돌아 뛸 기세에, 뻣뻣히 굳어 더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어째서?

왜...?

이해할 수가 없어, 굳어있는 희수의 얼굴에 순간 금이 갔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 했다.


...성급하게 굴지 말자.

희수는 결국 더 다가가는 것을 포기한채, 그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정우 씨, 할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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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나 졸리네.

자고 와서 나머지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