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초중반에 잔인한 묘사 있음. 비위 약한 사람들은 주의바람.



절망의 시대였다.


악마들의 침공으로 인해 인간들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정복당한 지역의 인간의 절반은 죽고, 절반은 노예화되었다.


정확히는, 남자는 죽고, 여자는 노예화되었다.




노예화된 여자들은, 다른 인간들에게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이게 그 마법각인이다, 이거지?"


궁정 마법사 얀순이는 한 여자의 시체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있었다.


"네, 이 각인이 새겨진 자들은 모두..."


대답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었다.



무사히 돌아왔다고 기뻐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칼을 겨눴다.


주인님을 위해서라며 칼을 내뻗는 아내에게

남편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 했고, 할 생각도 없었지만


다행히도, 주변 사람들에 의해 오히려 시체가 되는 건 아내 쪽이었다.

불행히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내가 죽어가는 것을 남편은 직접 보았다.




"흐음... 이런 각인은 본 적이 없는데..."


심장에서 따온 문양, 그 안에 적힌 악마의 문자, 분홍 빛. 여자의 하복부에 그려진 그 것은, 묘한 색기를 내뿜었다.


"뭐, 연구해보지 뭐."





하나, 악마는 마법의 달인들이었다.

하나, 악마는 수컷들만이 존재한다.

하나, 악마는 인간 암컷을 번식용 모판이자, 병사로 이용했다.

하나, 이 마법 각인이 새겨진 여자들은, 악마의 암컷 노예로 이용당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신체 능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 각인이 새겨진 여자들은 오히려 남자들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났다.




더 많은 표본을 구하기 위해

얀순이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악마들의 마법서와 명령서를 탈취해내었다.

악마들의 노예가 된 여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시체는 해부했다.


수없이 많은 연구 끝에 알아낸 것은

마법각인 중간에 있는 악마의 문자는, 일상적인 단어가 아니라는 것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적의 후방을 기습할까 합니다. 병력을 내어주시옵소서."


얀순이는 왕에게 그리 고했다.


"위험한 일이다. 그대는 뛰어난 인재야. 그대같은 자도 저들의 손 안에 떨어진다면, 우리 왕국에는 미래가 없네. 인간계 전체에도 미래가 없어."


왕은 반대했다.


전날, 왕비가 왕에게 포도주를 건넸다. 독이 담긴.

전전날, 공주가 왕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불렀다. 단도를 들고.


왕자는 어머니가 건넨 독을 마시고 실어증이 걸려 버렸다.

왕자는 여동생이 휘두른 단도에 맞아 근육이 잘려나갔다.


소중한 가족들이 망가진 보고서도 왕은 무너지지 않았다.

자신조차 무너지면, 이 왕국은 끝이니까. 인간 전체가 끝장나 버릴 수 있으니까.


"절 호위하는 자들을 모조리 남자로 해 주시옵소서. 제가 변절할 경우, 제 목을 칠 수 있는 자들로 구성해주시옵소서. 이 일은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일이옵니다."


늙은 왕에게 얀순이는 그리 부탁했다.

고향이 소중했다. 왕은 너그러웠다. 땅은 비옥했고, 국민들은 친절했다.


여기를 악마들에게 내 줄 수는 없었다.





며칠 전 악마들에게 점령당한 한 마을에

인간 몇몇이 침투했다.


궁정마법사 얀순이와

암살자 셋. 남자로만 구성된.


얀순이의 투명화 마법과

암살자들 특유의 기척 숨기기로


네 명은 아무런 문제 없이, 마을에 침투할 수 있었다.




마을 중앙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제단 위에서 묶인 채로 울부짖는 여자와

제단 밑에서 아내를 풀어달라고 애원하는 남자와


제단 밑에서 엄마를 부르짖는 남자아이와

제단 위에서 아들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는 어머니와


지옥이 마을에 강림해 있었다.




손을 부들부들 떠는 얀순이 앞에서

암살자들은 조용히, 얀순이의 몸을 당겼다.

손목을 내리눌렀다.


심호흡 후, 얀순이의 분노가 조금 잦아들자

다시 암살자들은 얀순이를 풀어주었다.




곧, 악마가 하나 나타났다.


소리를 지르고, 인간들을 조용히 시킨 뒤

곧, 여자들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마는 흉측한 남근을 꺼내들고

여자의 등을 칼로 그었다.


남자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자의 등에서 나온 피를

악마는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여자들을 범했다.



고통에 눈이 까뒤집힌 여자들과

분노에 몸을 떠는 여자들을 보며



얀순이는 자기도 모르게 마법 지팡이를 움켜쥐었고

암살자들은 신속하게 얀순이에게서 지팡이를 빼았았다.


"얀순님. 의식의 끝을 보셔야 합니다. 직접 보시고, 연구하셔야 합니다."


"지금, 이걸, 참으라고 하는 겁니까? 저들이, 우리 국민들이 뭘 당하는지 보면서요?"


"참으셔야 합니다. 얀순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낱낱이 알아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소리는 낼 수 없었다.


앞으로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도 아직 모른 채

얀순이는 울먹이며 의식을 바라보았다.




충격에 혼절해버린 남자도 있었다.

고통에 혼절해버린 여자도 있었다.


악마는, 여자들에게 싼 정액을

여자들에게서 뽑아낸 피와 섞고

마력을 부었다.


그리고, 그 액체로 여자들의 하복부에 마법각인을 새겼다.




곧, 변화가 일어났다.

여자의 눈이 변했다.


그리고, 남편을 불렀다.


남편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로, 아내를 찾았고

아내는 남편의 배에 칼을 찔러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악마는 다른 여자들을 범하고, 피를 뽑고, 정액을 섞은 뒤 마력을 부어넣고, 각인을 새기고 있었다.


한 아이는 누나에게 목이 쥐어뜯겼다.

한 노인은 딸에게 머리가 반으로 잘렸다.




의식은 충분히 봤다.


얀순이는 그리 생각하며 마법 지팡이를 움켜잡았고

암살자들은 이번엔 얀순이를 말리지 않았다.




암살자 중 하나는 노예가 된 여자들에게 목이 잘렸다.

암살자 중 하나는 악마가 쏘아낸 빛에 배가 뚫렸다.


얀순이는 악마가 내뻗는 칼을 마법으로 막아내었고


암살자 중 한명은 다리가 잘렸다.

악마의 목에 단검을 찔러넣은 채로.




마을 여인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얀순이에게 향했다.

칼을 겨눴다. 돌을 던졌다.


인간은, 악마보다 훨씬 약했다.

그것이 아군이 아니라 적이라고 해도.


악마가 없는 인간 노예는

얀순이 혼자서도 쉽게 이길 수 있었다.




다리를 잃은 암살자를 업고 궁정으로 복귀한 후

얀순이는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암살자에게 보고를 받은 왕도

차마 얀순이를 부르지 못 했다.


천재라는 이름이 있어도, 마법사라는 위상이 있어도

얀순이 역시 여린 여자였기에


끔찍한 지옥을 목격한 얀순이는

그렇게 방 안에 틀어박혔다.




똑똑


문이 두드려지는 소리가 나고

얀순이는 얼굴이 반쪽이 된 채로 문을 열었다.


왕자가 서 있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어버린.

무슨 일이 었었는지 똑똑히 보고받은.

정신까지 거의 잃어버릴 뻔 한.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눈물 젖은 그 편지에는, 고생했으니 푹 쉬라고 적혀 있었다.




얀순이는 다시 왕에게 향했다.


"마법각인을 제 몸에 새길까 합니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그 지옥은 이미 충분히 모두에게 보고되었고

악마를 대처하는 또 다른 방법도 이미 개발되었다.


최전선에는 여자를 남기지 말 것.

오로지 남자만이 전투를 하고, 여자는 후방 지원으로 돌릴 것.

여자만을 남기지 말 것.


하지만, 얀순이에겐 그것조차 부족했다.


이제 악마들의 노예가 늘어나는 속도는 확실히 줄었다.

하지만, 희망조차 없던 전황이 불리해지는 정도로 변화했을 뿐이었다.


얀순이에겐 힘이 필요했다.

마을과, 국민과, 왕가를 지킬 힘이.

저 가증스러운 악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힘이.


그리고, 얀순이는 왕에게 부탁했다.

자기가 얘기하는 남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긴장 되십니까?"


얀순이는 물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해됩니다. 저도 처음이라 긴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입니다."


대답은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왕자님.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행동해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잃은 왕자는

그렇게 쭈뼛쭈뼛 얀순이에게 몸을 맡겼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했다.


성공한다면, 얀순이는 왕자의 노예가 될 것이었다.

왕자는 국가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었다.


성공한다 해도, 얀순이는 자유로울 것이었다.

왕자는 말을 잃었다. 명령을 하지 못했다.


실패한다 해도, 본전이다.

여자와 남자가 하루 몸을 겹친 것 뿐이니까.




얀순이의 하복부에는, 심장 문양이 분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기엔 인간의 언어로, 얀붕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왕자의 이름이.




얀순이는 검을 휘둘렀다.


악마의 머리가 베어져 나갔다.


얀순이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악마의 몸통이 하늘 높이 날았다.



한 손에는 지팡이,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얀순이는 전장을 누볐다.



몸이 가벼웠다. 갑주는 깃털같았고, 다리는 춤을 추는 듯 했으며, 손은 재빨리 움직였다.




첫 대규모 승전보에, 왕은 파티를 열었다.


전쟁 영웅 얀순이는 기쁜 마음으로 파티에 참석했고

왕은 얀순이에게 보석 목걸이를 하사했다.


곧이어 왕은 얀붕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너 또한 고생했다고 격려했다.


그 순간, 어둠이 얀순이 마음을 덮쳤다.


왕자의 어깨에 손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그것이 왕이라도, 자기 주인님에게 손을 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얀순이는 고개를 흔들며, 어두운 생각을 털어냈다.




그날 밤

얀붕이의 침실에 얀순이가 침입해왔다.


아무런 명령도 할 수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얀붕이는

얀순이를 통제하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왕자는 얀순이를 피했다.

얀순이는 그래도 왕자를 찾아 매일같이 궁정으로 드나들었고


왕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얀순이를 최전방으로 급파했다.




도시가 여럿 수복되었다.

강은 악마들의 피로 넘쳤다.


얀순이는 서서히,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 영웅이라 불렸다.




며칠 뒤, 얀순이는 왕의 침실로 침투했다.


인기척에 깨어난 왕의 목에 단도를 겨누고, 얀순이는 속삭였다.


"나를 전쟁터로 보낸 사이에, 내 주인님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낱낱이 보고 해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나를 일부러 주인님에게서 떨어트려 놓은 것 아닙니까? 이 개자식아. 똑똑히 말해. 내 주인님은 어디 간 거야?"


"... 왕자는 쉬고 있네. 최근 며칠동안 기운이 없었어. 이 전쟁만 끝나면, 둘이 붙어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그 전까지만이라도, 왕자에게 휴식 시간을 줄 수 있겠나?"


"개수작 부리지 마. 주인님은 날 아껴주시는 분이야. 우린 사랑하는 사이라고! 감히, 네 놈이 주인님에게서 날 떨어트려 놓으려 해?"


"..."




침실에서의 소란에 경비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얀순이는 왕의 배를 살짝 긋고, 다시 위협했다.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오면, 다음엔 더 깊숙히 그어주지."



경비병들이 왕의 침실로 진입해 왔을 때에는

피를 흘리는 채로 벌벌 떠는 왕 혼자 남아 있었다.





다음날부터

왕자는 최전방으로 급파되었다.


'사기 진작을 위해, 왕자가 직접 전방으로 나서라' 라는 명목으로.


그리고, 사기 진작은 커녕, 왕자는 막사 바깥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다.


왕자의 막사는 얀순이를 제외한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고

얀순이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얀순이는 전쟁의 여신이었다.


검 한 번에 악마 머리 여럿이 날아갔다.

주문 한 번에 악마의 병기들이 망가져갔다.


모든 병사들은 얀순이를 우러러보았다.



얀순이는 단 한 명만을 우러러보았다.


자신이 우러러보는 그 사람도 역시 자신만을 바라보아야 하기에

얀순이는 왕자와 다른 사람들의 접촉을 막아버렸다.





문득

전신거울을 보면


하복부에 그렸던 마법각인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얀순이는 씨익 웃었다.


망가진 인형처럼 흔들거리는 왕자를 옆에 눕혀둔 채로.





악마들의 영구 추방으로 전쟁이 끝난 후

얀순이와 왕자는 궁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밤중에, 얀순이는 왕자와 함께 왕의 침실을 방문했다.


그리고

왕자와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자신이 왕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얀순이는 왕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왕은 그렇게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저주하였다.






늙은 왕은 대신들에게 선포했다.

자신은 물러나겠다고.



다음 날, 왕은 목을 맨 체로 발견되었다.

편지에는, 아내와, 딸과,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적어둔 채로.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 아내와 딸을 잃었고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어 아들조차 망가졌다고.




얀순이와 왕자는 그 뒤로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국민들은 전쟁의 여신이 자신의 일이 끝난 후 하늘로 돌아갔다고 믿었으며

진실을 아는 자들은 조용히 일을 묻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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