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얀순이는 얀붕이한테 사랑에 빠졌어


두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서로 만나고 좋아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얀순이가 비틀린 사고관의 소유자였다는 거지


그런 사고관을 뒷받침할 힘도 있는


그래서 얀순이는 얀붕이한테 저주를 걸었어


왜냐면 얀순이가 아는 사랑의 방식이란 으레 그랬거든


엄마가 아빠한테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그랬던 것처럼


언니가 옆집 오빠한테 그랬던 것처럼


얀순이가 아는 사랑이라고는


상대를 파멸시키고 손 안에 넣는 방법밖에 없었어


얀붕이는 평범했지만 쾌활하고 긍정적인 친구였어


성격도 좋고 꿈도 있어서 늘 인기가 많았지


다만 모태신앙 집안이다 보니 연애에 대해서는 다소 엄격했어


얀순이는 그런 얀붕이에게 저주를 걸었어


사랑이 깊어질수록 꽃점을 치기 위해 꽃잎을 뜯어낼수록


얀붕이에게 가해지는 저주는 점점 커졌지


유명한 목사였던 얀붕이의 아버지는 바람을 피웠고


그로 인해 충격받은 얀붕이의 어머니는 자살했으며


친척들이 유산을 두고 다투는 것을 환멸 깊게 바라봤으며


불우한 사고로 다리를 다쳐 꿈인 축구도 할 수 없게 되었지


그 모든 빛나던 시절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어른이 되기도 전에 고아가 된 얀붕이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친척 집에 떠밑겨져


푸대접을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왔어


친척들은 당연히 얀붕이를 찾을 생각도 없었고


미성년자인 얀붕이는 일도 제대로 못하고 길거리를 떠돌았지


그러다가 어느 날 쓰러져 자고 있는 얀붕이에게


너무나 예쁜 소녀가 손을 내밀어준 거야


낯선 사람의 호의를 의심할 법도 하지만


삶의 의욕을 잃은 얀붕이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어


소녀의 보살핌을 찾으며 얀붕이는 조금씩 기력을 되찾아갔지


어느 날 얀붕이는 얀순이한테


잠시 자기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 보고 싶다고 해


그 집에 사는 친척들에게 냉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들어가서 부모님의 유품을 챙겨 나와


늦은 밤, 얀순이는 자고 있었고


얀붕이는 그 옆에서 조용히 아버지의 일기를 읽었어


그리고 본 거야, 마녀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지


21세기에 마녀라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래서 아버지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얀붕이는 그럴 수 없었어


갑작스런 불행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거든


때마침 일기에는 마녀를 구별하는 법도 있었지


성직자의 피를 마녀의 몸 위에 뿌리고 신께 기도드리는 거야


얀붕이는 당장이라도 이걸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얀순이는 피 냄새에 워낙 민감해서 깰까 참았어


다음 날, 다시 일어난 얀순이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으며


이렇게 착한 아이가 마녀일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기의 내용은 까맣게 잊어버렸지


몇 달, 몇 년이 지나고 둘은 성인이 되었어


얀붕이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적당한 일자리도 구했지


그리고 두 사람의 사이도 그만큼 진전되어 둘은 사귀는 건 물론


어느 날 마침내 첫날밤을 맞이하게 돼


얀순이는 처녀였고, 그 고통으로 얀붕이의 등을 긁었어


손톱은 날카로웠고 흐른 피는 얀순이의 손가락에도 묻었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몸을 겹친 채로


얀붕이는 문득, 무의식적으로, 조용히


신께 기도드렸어.


그리고, 모든 걸 알게 되었지


얀붕이의 피가 묻은 얀순이의 손이 희게 불타오르며


얀붕이의 몸에는 수많은 저주의 낙인이 빼곡히 드러났지


평범한 인간이라면 볼 수 없어야 할 저주의 증거가


지금 이 순간 신의 힘을 통해 드러난 거야


그리고 그 저주의 낙인은 얀순이가 자주 끼고 다니던


반지, 목걸이 등 온갖 액세사리와 문양이 일치했어


얀붕이는 깨달은 거야, 마녀는 실존했다고


그리고 그 마녀는 누구보다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었다고


얀붕이는 옷조차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도망쳤고


얀순이는 조용히 얀붕이의 상처난 등을 바라보았지


얀붕이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알았을까?


그 등 위에, 얀순이가 새긴 상처에서 흐른 피로


새로운 낙인이 새겨지고 있다는 걸


몇 년간의 기회를 놓쳐버린 얀순이는 고민했어


어떤 저주를 내려야, 어떤 식으로 내 사랑을 표현해야


네가 돌아와줄까


부모님과 친척들을 광기에 사로잡히게 만든 저주도


꿈을 위한 모든 노력이 좌절되도록 하는 저주도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불신받고 배신당하는 저주도


모두 다 내가 너에게 전하는 연애편지이며 사랑시였는데


자신은 충분했다고 생각했지만 얀붕이는 아니었나 봐


이 정도로 얀붕이에 대한 내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한 사람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어도 부족한가 봐


얀순이는 반성했고, 심사숙고했고, 마침내 마음을 굳혔어.


그리고 얀순이는 마지막 저주를 건 거야


함께 있으면 반드시 불행해질 사람과 평생 함께하게 되는 저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