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반도 다르다넬스 해협'


 손톱만한 좁은 모래톱, 그 앞쪽으론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그 뒤쪽으론 시꺼먼 증기를 내뿜는 철갑선들이 수평선을 검게 물들이며 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과는 다르게 자비롭게 숨을 거둬들이지 않고 이 추악한 땅은 흐르는 피만을 햝으며 간신히 숨만을 붙여놓는다.

"아...!!아아!! 거긴 됐다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지금 안 묶어두면 나중에 간이 화장실에서 다리 쩍벌린채로 다음사람한테 발견될걸?"

300mm가 넘는 함포, 전 세계의 거의 절반이 우리 편…. 상대는 러시아한테도 패배했던 노쇠해가는 제국... 도저히 질 수가 없는 전쟁이다.

하지만...뭔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상륙정은 그저 통통배, 함포사격은 애저녁에 끝나고 상륙할 곳은 손톱만한 해협, 그 뒤로는 깎은듯한 수직 절벽, 대포를 메고 간신히 올라가면 기관총이 우리 정수리를 겨누고
애석하게도 이 흙산에서 숨을 곳이란 없다.

해변 병영에서 자국 연방의 위대함에 대해 의심을 품던 얀붕이는 이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다시
론 파인 쪽으로 이동해 총을 고쳐잡기 시작했다.

"서유럽 간 굴착 중대 새끼들중 아는 놈이 편지를 보냈던데, 메소폴로니카 거기 완전 개꿀빠는데 아니냐ㅋㅋㅋ? 라는구만

 웃기지도 않는 키위 새끼들, 적어도 거긴 비라도 오지"


"왜 그래 전쟁영웅이 돼서 집에 돌아갈 거라매"

"저걸 한번 보라고"

툴툴대던 앤튼이 가르킨 곳에는 모포에 쌓여진 시체가 있었다. 쇄골이 드러나 있었고 다리는 햄버거패티같이 뭉개져있었다.

얼마 전에 포탄으로 인해 죽었던 우리 상병님이다.

"어제 저 시체 속에서 고양이만한 쥐새끼가 하반신을 파먹으며 나오던걸 봤어! 그건 그냥 개죽음이라고!!

서로 죽이는 싸움판에 영웅은 무슨!!"

"진정해, 넌 좀 쉴 필요가 있는 거 같다"

이놈은 그냥 동료가 죽어서 흥분한 것뿐이다.
벨 에포크로 해이해진 정신이 드러난 것뿐이다.
이렇게 되뇌이며 총구 끝에 집중했다.

'적어도 우리가 군인인 이상 시체랑 거기서 나오는 쥐를 보는 데는 익숙해 져야 될 거야'


"Affix!!!!! Bayonet!!!!!!"

고함소리와 함께 우린 착검했다. 저쪽에 탄약이 떨어진 것은 분명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리고 이내 우린 모두 "개새끼들!!"이라고 외치며 적진으로 돌진했다.

 내 앞엔 두 명씩 나란히 총검 끝에 모포 모서리를 꿴 후 돌진했고 뒤따라서 우리가 뛰었다.

철조망 위에 덮고 밟고 지나가려는 것이렸다.


"Haydi gidelim!!!"
적진에서는 지엽적으로 소총의 총성이 몇 번 들리더니 "알라!!"뭐시기 거리며 햇빛가리개만을 걸친 마흐메트 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내 우리는 서로 뒤엉켜서 총검, 돌, 대검 등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금속이 살이 찢는 소리가 울렸다.

이내 우리는 우리가 분명 참호와 수평으로 이동했음이 틀림 없단 걸 깨달았다. 적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갈색의 멋없는 후줄근한 옷을 걸치고 야만적으로 뒹굴며 싸우기 시작했다.

착검했지만 차라리... 돌로 머리를 후려치는 것이 더 나았다. 우리는 모래바닥 위에서 뒤엉켜 어느 쪽이 후퇴하거나 죽을 때까지 싸우기로 작정했다.

 날이 살을 찢는 소리, 비명소리, 둔탁한 머리가 깨지는 소리 속에서 매우 흥분하기 시작해 정신을 놓고 이성이 붕괴될 것 같았다.
 전쟁영웅보다는 괴물이나 학살자가 되길 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 놈 즈음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눈먼 총알이 내 옆구리를 꿰뚫은 것이다. 
 누런 군복이 붉게 물들어가며 마치 군홧발에 강하게 걷어차인 느낌이 들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런 ㅆ..."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 입에도 힘이 풀려 도중에 멈췄다. 오직 억눌린 신음소리만이 나오고 그렇게 내 몸은 옆에 있던 포탄 구멍의 구렁텅이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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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분이 지났을까 이내 싸우는 소리가 멈추고 발소리만이 울렸다. 이 구덩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방향인 것 같다.

 눈을 뜨고 구덩이를 살핀다. 300mm 함포에 파인 지옥문 같은 구덩이다.
게걸스럽게 이 땅에 흐른 모든 피를 마시려는 듯
쩍하니 열린 그 구멍은 괴물의 아가리 같았다.

 슬라우치햇을 고쳐 쓰고 눈을 크게 떠 구덩이 내부를 살핀다. 해가 저물고 있었기에 자세히는 볼 수 없었다만 구덩이는 나선계단 정도의 지름으로 파여 있었고 깊이는 내 키보다도 깊었다. 사방에선
시체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했다.

 전부 가버린 건가 하고 주위를 살폈다.
밖은 어두웠고 땅은 검었지만 내 바로 옆 손바닥에
감자 케이크 같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시체 속에 팔이 들어간 것인가 하고 손을 뺐으나
딱히 젖어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 순간 아군 본진 쪽에서 하늘로 해가 떠오른 것 같은 광채가 떠오르며 만 줄기 하광이 내려왔다.

그 순간 내 팔이 짚었던 곳을 보니 뒤가 좀 찢긴 케피야를 둘러쓴 여자아이가 나를 놀라움과 원망이 가득 찬 듯이 붉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한동안 하늘은 초록빛으로 가득 메워지고 이 심연에도 빛이 내려왔다. 그 여자를 자세히 보니 다리에 피에 젖은 헝겊이 감겨 있었다.
처음에는 실컷 두들겨 패고 칼로 찔러 죽일 심산이었지만 막상 죽이고 싶어 하던 적을 나 혼자 가까이에서 보다 보니 그럴 용기도, 결단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그 번쩍 뜬 눈을 지켜보니 머리털이 쭈뼛 서고 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옆구리에서 생명이 고장 난 듯이 흘러내려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손을 들어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녀는 흥분된 숨을 내쉬더니 이내 내 손을 쳐다보다 내 옆구리로 시선을 옮겼다.

"살ㄹ...에ㅊ..라듬...너...배...아파?"
힘들게 입을 열던 그녀는 알 수 없는 말로 말을 걸더니 미숙한 영어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어떻게 저을까 고민하다 이내 포기했다.

 이곳은 무인지대, 고개를 드는 순간 머리통이 날아가고 나가는 순간 기관총에 벌집이 된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 아프다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그저 사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만히 누워있자 그녀는 이내 무릎을 딛고 케피야를 벗어서 끝을 가늘게 찢었다. 흰색 머리가 누란 옷에 대비 됐다. 그러고 내 상의를 벗기려 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치뜨며 노려보았다. 조금 전의 이 자가 나를 보던 시선으로 노려보았는데 삶과 죽음에 대한 주도권이 뒤바뀐 기분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간결하고 힘있게 말했다.
"사나 야ㄷ... 도와주려고 너"
그러고 내 이마에 손을 올려놓자 이상하게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이내 그녀는 내 옆구리에 천을 감고 그 위에 모자였던 헝겊을 감아쥐었다.

"근데 왜 나를 돕는 거야?"

"죽은 몸, 냄새나니까"

실실 웃으며 한 말에 나도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우리 둘 다 죽어"

"죽어? 우리 전부? 그래도 나, 상관없다. 나라를 지키려고, 이곳에서 죽으러 왔다."

당당하게 어색한 영어로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꽤 귀엽지만 동시에 뭔가 가여웠다.




 한동안 구덩이 아래에서 여러 얘기를 계속해갔다.
빛이 있을 때, 없을 때 서로 얘기하며 지속적으로 서로 정신을 차렸다.


"우리, 공격해, 알라알라알라 구령에"

"응"

"너네, 공격한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너희 신?"

"...응"


"죽일려고 했다. 너 처음에 봤을 땐…. 우리는 적이다…. 적.. 그래도 막상 너가 죽어가는 걸 봤을 때, 이상했다. 내 기분이…. 도와주고 싶었어…. 바로 전에도 누굴 죽였는데도..."

"..."


.
.
.
.
"니 이름, 얀붕이라 하는구나? 난 안순…. 저 근처 차나칼레에서 왔어, 이상하지? 서로 모르는데도 죽이려 든다."

"그래? 국가를 지키고 영웅이 되려는 거 아니었나?"

"영웅?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그냥 지키려고, 우리 집…. 죽어도 개? 죽음은 아니라고 장군이 그랬어"

 그런 소리를 하며 그녀는 수줍게 웃는다.

"나 네가 좋아진 것 같아 얀붕아, 이런 말 솔직하게 말한 적은 없었어, 네가 여기서 태어났었으면 하네"

"그래 나도, 니 덕분에 살아있는 거 같으니까"






 2일 정도가 지났다. 수통에 들어있던 미지근한 물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가장 미칠 것 같았던 것은 주변의 시체 썩는 냄새, 이상할 정도로 더운 날씨에 시체가 빨리 썩어서 냄새가 진동했다.

인간이 죽지는 않고 버티지도 못할 지옥이라면 바로 여기일 것이다.
 내 옆에 있던 이 여자는 힘을 아끼려는 것인지 가만히 누워서 자고 있었다. 흰색 머리에 햇빛이 비친다.

 그동안 미숙하다만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서로 죽이려고 이를 갈던 게 그저껜데 지금은 이런 구덩이에서 같이 자는 신세라니 더군다나 출혈도 그쳐서 붕대도 때낼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머릿속에 기구함이 지나가며 이내 구덩이 밖으로 발소리들이 드리워졌다.
 뛰고 싸우는 소리가 아닌 침착하게 무언가를 찾고 옮기는 소리가 사방에 드리워졌다.
그 소리에 얀순이 잠에서 깨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

"모르겠어…. 공세는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 양쪽에서 우리 군과 오스만군의 그림자가 드리워 햇빛을 막았다. 무슨 이상한 일인가 하며
우리는 멍하니 있었는데 그 순간 위에서 역광을 맞으며 딕슨이 소리쳤다.

"야 얀붕! 살아있었구나!!"

 구덩이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파란 셔츠를 휘날리며 딕슨이 내려온다. 힘이 빠진 나를 부축하며 위쪽으로 보내자 위에서 우리 쪽 사람들이 내 팔을 잡으며 올려준다.

 내 옆에서도 오스만군들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듣는 말로 펄쩍 뛰며 얀순이를 위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우리 중 몇 명이 나에게 달라붙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어보았다.

 사실대로 말했다가 간부 귀에 들어가면 처벌받을 것 같았기에 그냥 2일동안 기절해 있었다 방금 깨어났다고 했다.

 얀순이는 뭐라 말했을까

 얀순이는 나를 돌아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 그 눈 속에는 아쉬움이나 슬픔이 묻어나왔다. 첫 만남 때의 살의로 가득 찼던 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무리에게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시체 치우는 거야"

"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해서 겨우겨우 합의해서 이쪽 지역에서만이라도 2시간 동안 서로 시체를 치우기로 했어, 저기 중대장은 영어를 할 줄 알더군"

"그리고 그중에서 너를 찾은 거고, 운 좋은 새끼"

"우리가 받았던 그 망할 훈련이 뭐였다고 생각한 거야?"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맞다 전장에서 한낱 사람이 기댈 곳은 훈련도 장비도 아니고 그냥 운이다.
누구는 작은 파편 하나만으로 죽고
누구는 탄환에 뚫리고도 계속 살아남는다.
 그냥 운 좋을 행동을 하도록 훈련받을 뿐

 나도 몸을 절며 시체를 옮기려고 들것에 우리군 시체를 올리자 내 앞에 누군가가 섰다.


얀순이였다.

 들것의 앞쪽을 들어주며 얀순이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자? 몇 시간 후엔 우린 다시 적이다."

그 말에 목을 끄덕이는 것으로 간단히 동의하고
우리 쪽 진영으로 가져가 구덩이에 시체를 묻었다.
내 소대원들이 이상야릇하게 혹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얀순이는 등을 돌려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보길 바란다, 절대 죽지 마"
이러고 이상야릇하게 웃으며 저 멀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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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말



"곧 있으면 16년이네, 여기서 2년을 지내게 될 줄이야"

"분명 그땐 더워 죽을 것 같았는데..."

티핀의 코트 위에는 성에 같은 것들이 껴있었다.

 우린 그동안 풋내기에서 나름 숙련병으로 자랐다. 아니…. 생존전문가라 해야 하나?

새로 보충되는 신병들은 거의 몇 주를 못 버티고 죽어 나갔다.
 그들의 얼빠진 행동으로 소중한 신병을 딱딱하게 굳은 땅을 파서 묻을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미어졌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도 그 사람이 죽고 나서는 얼굴이 기억이 안 난다... 신기하게도...

 죽은 신병들 대부분은 머리통 윗부분 총상이었다. 그래서 얼굴이 기억이 안 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쁜 예외로는 나 같은 고참인 앤튼이 죽었다.
아주 작은 사소한 파편 하나가 머릿속에 파고들어
몇 시간 후 두통을 호소하다 죽었다. 맞다 개죽음이다.


 문득 몇 달 전의 그 터키군이 기억났다.
얀수니 였나?



"야 티핀 저번의 시체 치울 때 내 옆에 있던 터키군
기억나?"

"어 기억하지 빨간 눈의 여자애, 근데 너 그때 계속 기절해 있었단 건 거짓말이지?"

"그렇지, 걔는 지금 어떻게 지내련지"

"죽거나 살거나, 어짜피 적이잖아? 연인으로 만났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만...

경 기병대 새끼들은 실컷 놀리더니 이젠 적하고 사랑이라도 하는 건가?"

 확실히 여기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평생을 끌어쓴 강운이 필요하다. 1초마다 죽을지 살지 결정되니까

 하지만 내…. 아니 우리의 운은 거의 다한 것 같다.
한 곳만 더 물러서면 바다에 빠져 죽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오스만 놈들이 독일에서 "참호분쇄기" 그러니까 무지막지한 중 곡사포를 들여왔고 그게 곧 있으면 이 전선에 도착한단 소리였다.

'적어도 칼에 찔려서 죽는 것보단 포탄에 산화하는 게 더 운이 좋은 거겠지'

 이렇게 되뇌이며 참호 벽 약간 썩고 얼어버린 나무토막 앞에 총을 세워 서며 기다린다.
아마 이번하고 다음 공세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곡사포가 배치되기 시작하면 우린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못할 텐데 그러면 그때 얀순이가 했던 말은 지키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탄약 등을 옆에 두고 신병들과 같이 총을 치켜들고 사다리 아래 섰다.

 소름 끼치는 적막이 흐르고 이내 호각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조명탄이 낮의 빛으로 하늘을 메우고 구멍 하나하나의 어둠을 몰아갔다.
저쪽에선 야포와 기관총으로 맞섰다.
철조망 위에 총검에 끼운 모포를 덮고 뒤뚱거리며 밟고 지나갔다.

 그때 우리가 있던 곳은 론 파인이었던 것 같다.
땅 사이사이마다 협곡이며 숨을 곳도 없이 기관총 앞에 선 것이다.

 교묘하고 정교히 행해지는 사냥에 신병들은 픽픽 쓰러져갔다. 나는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며 노리쇠를 당겼다. 이젠 몸에 익어 동물적으로 나오는 무의미한 몸짓은 지금까지 나를 살렸다.
호각 소리가 한 번 들리면 복잡한 생각은 없어지고

단지 적을 죽이고 저 기관총 안에 든 냉각수를 시원하게 들이키고 싶다는 욕망만이 남는다.





 그러나 기관총과 야포 앞에선 우린 무력했고
이내 오스만군 쪽에서 고함을 지르더니 우리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옆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 폭압에 얻어맞은 몸은 해파리같이 옆으로 고꾸라졌고 정신은 먼 곳으로 날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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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허름한 건물 속, 누군가가 내 앞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몸 이곳저곳에는 드레싱이 감겨있었고 저번에 다쳤던 허리에도 감겨있었다.


기절하기 직전엔 1년 전에 읽었던 나생문이 생각 날듯이 시체가 널려있었는데 여긴 어디일까?

"얀붕아! 살아있었구나!!"

여자 목소리? 낯선 소리에 고개를 드니 얀순이가 유창하진 않아도 전혀 이상하진 않은 영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야…. 얀순?"
"니가 죽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그리고 그녀는 머리를 살짝 흔들며 내 목을 잡고 내 팔에 천 조각을 감았다.
나를 쳐다보던 그 눈은 처음 만났을 때와 약간 다른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동료도, 소대장도 신병들도 다 죽었어...영어를 알려줬던 내 친구도!!....하...하하...이젠 너밖에 안남았어...그래도 너라도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얀붕아...난 여기 죽기 위해 왔지만 내 사람들이 죽는 꼴은 못 보겠어!!!"

"얀순아 진정해...우린 엄연히 적이고 전쟁은..."

"그래, 전쟁에선 결국 다 죽지, 죽을 때까지 투입되니까!! 후....그래도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야 얀붕아…. 니가 살아남은 내 유일한 친구야…. 부디 넌 종전까지 살아있어야 돼..."


"...우리 진영은 어디야..?"
"얀붕아"
"난 돌아가야겠어"
"곡사포가 너희 진영을 부숴놓을 거야, 거기 가면 너까지도.."

"그래도 난 가야돼, 난 연방을 위해 싸우려고 여기 온 거야"

묵묵히 듣던 얀순이는 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진영으로 돌아갔을 때, 니 생각을 많이 했어..
전쟁터에서 나라를 지키려고...죽고 죽이는 것만 생각했는데, 구멍속에서 널 만났었지?

뭔가 살리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내 최후의 인간성일지는 몰라도...니가 날 비인간성으로부터 구해줬어"

"아니...아니야..널 구한 건 너야, 그리고 우린 아직 적이잖아

날 2번씩이나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얀순아"


얀순이는 묵묵히 땅을 바라보며 적막을 지키다 내 팔목을 거칠게 잡았다.

"너희 군은 이미 20만이 넘게 죽어 버렸어!! 어!!? 그런데도 퇴각을 안 하는 건 너네 지휘관 짐을 들어줄 병사만 남을 때까지 계속 너희를 멍청하게 소모하려는 거라고!!!!
너까지 죽으려는거야?!!! 그럴 필요는 없잖아?!!

 너까지 죽어버리면 나는...나는... 국가는 지켜도 전쟁으로부터 사람은 아무도...못지킨 거란말야..."

얀순이가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 손목을 잡은 채로

"..."

 "미안 얀붕아…. 사실 말은 못 했지만 너를 좋아했어…. 삭막하고 피만 묻어있던 괴물 같은 내 영혼을 바꿔줘서 고마웠어..."


 "겔리볼루 근처에 아는 곳이 있어, 곧 전쟁이 끝나면 어디든 안전한 곳에서 살자, 응?"

애원하듯이 말하는 얀순이의 눈은 눈물로 인해 한껏 굴절되어 있었다.

  "이기적인 소리지만 미안해...이제 니가 없어지면 내 삶이 부정다하는 느낌이야..! 친구들은 다 죽었어, 제발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이라도 지키게 해줘...응?...제발 좀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가란 말이야!!!"



 우리는 전쟁터에 가는 군인을 위해 애도하지 않는다. 다만 함성과 함께 환호한다. 설령 이런 지옥에 간다고 해도... 잘 싸우고 돌아와라,

"부정당하는 게 아니야 얀순아, 너희 동료들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거지, 니가 끝까지 남아서 너희 국가를 지켜내길 원할 거야…. 침략자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서도..."

 생각나는대로 말했다. 전쟁 막바지에...몇 주만 지나면 철수할 수 밖에 없다.
곡사포 앞에서 우린 무력하니까






"미안, 난 이제 집도 조국도 희망도 젊음도 믿지 않아, 조국 때문에 죽기 위해 왔지만 결국 죽어버린 건 내 마음과 정신뿐이네 헤..헤..."

 실성한 듯 그 작은 입에선 되지 못한 웃음소리만이 흘렀다. 

"이제 너까지 나를 져버리는 거구나? 난 이제 그저 쓸모없는 괴물이 된 거잖아? 전쟁이 끝나면? 그 후엔?

 나 같은 상이군인은 결국 비참한 폐인이 되겠지!!
내 모든 삶이 결국은 그냥 전쟁이었을 뿐이니까!!!
내 삶도 사랑도 미래도 다 죽어 문드러졌으니까!


...미안 얀붕아...그때 이후로 쭉 널 사랑해왔어

잘 있어 얀붕아"





 순간 얀순이는 내 가슴에 묻혀 입술을 맞췄다.



그러곤 소총의 총검 러그에서 총검을 빼더니 자신의 왼 가슴에 박아넣었다. 말릴 새도 없는 일순간이었다.

"..!...!;;;왜 이제 와서...! 왜 이 마지막에..!!"

 입에서 꿀렁거리며 진한 무언가를 내뱉던 얀순이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이 땅이 최후의 생명을 빨아낸 것 같았다.





 멍하니 시체 옆에 꿇어 앉아있던 얀붕이는 이내 소총을 들고 작게 웃음을 흘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쓰고보니까 얀이 너무 야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