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경비병을 사랑해버렸다 (5)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아.

 

 

 

 

 

10.

 

“스타벡 왕자가 올 거야.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커피를 맛있게 만들 것 같은 이름이네요.”


“그 말, 그 녀석 앞에서 했다간 목이 잘릴 거야.”


모처럼의 휴일, 아가씨가 앉아서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던 내게 말했다.

 

“이 나라의 5번째 왕자이며 나의 약혼자-”


“약혼자가 있었습니까!?”


“왜, 의외야?”
 
“그야 아가씨는 다른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하잖습니까?”


내 말에 그녀가 ‘뭐, 그렇지.’라고 대답했다.

 

“귀족의 세상은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거든.”


“저는 그런 어려운 거 잘 모릅니다. 근데 이 이야기의 요점이 뭡니까?”

 

“아버님이 그를 환영하기 위한 작은 연회를 열기로 했어.”


“혹시 저도 참가합니까?”


“참가하지. 손님이 아니라 내 호위병 신분으로.”


아깝다……연회라면 고기랑 맛좋은 음식들이 잔뜩 나올 텐데, 나는 못 먹는 건가…….

 

조금 슬퍼졌다.

 

“너는 바보니까 미리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하려고.”


“바보 아닙니다!”
 
“그럼, 오리랑 닭의 차이점이 뭐야?”


“……둘 다 맛있다는 건 압니다.”
 
“바보 맞잖아.”


반박하고 싶지만 증거가 없었다. 내가 바보라는 증거도 없지만…….

 

“첫째, 거기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너보다 신분이 높아. 절대 반말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공손하고 진중한 태도를 유지할 것.”

 

“네!”


“둘째, 특히 스타벡 왕자와 그 일행에겐 더더욱 주의할 것. 아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공기가 됐다고 생각하고 얌전히 있으란 뜻이야.”

 

“네에!”


“셋째, 일하는 도중에 간식은 금지야. 가만히 내 옆에 붙어있어.”


“헉!”


간식은 안 되는 건가! 이럴 수가, 벌써부터 연회가 싫어졌다.

 

연회에 가서 밥도 못 얻어먹고 간식도 못 먹는다니, 그야말로 고문이다.

 

“대답은?”
 
“……네…….”


“간식 못 먹는 게 그렇게 서운해?”


“서운합니다…….”


“잘 해내면 끝나고 고기 남은 거 챙겨줄게.”


“정말입니까!? 만세! 아아, 역시 아가씨뿐입니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충성, 충성!”


경례는 양손으로 하는 게 아니야. 아가씨가 내 왼손을 내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스타벡 왕자라는 분에 대해 알아둬야 할 게 있습니까?”


“좋은 질문이네. 우선, 스타벡은 병신이야.”
 
“……혹시 그거 귀족의 은어 같은 겁니까?”


“아니, 말 그대로 병신 새끼야.”


아가씨의 입에서 저렇게 험한 말이 나오다니……대체 얼마나 병신인 거지?

 

병신 스타벡 왕자. 오, 뭔가 좀 있어 보인다.

 

“운 좋게 왕자로 태어나서 망정이지,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20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을 놈이야. 지 잘난 맛에 살고 죽는 흔해빠진 도련님이지.”

 

“허어.”


“겉보기엔 그럴싸하지만 본성은 쓰레기야. 그러니 네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짓을 하면 아주 잡아먹으려고 하겠지. 조심하는 게 좋아, 왕자가 날뛰기 시작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신분상으론 내가 더 아래니까.”

 

“알겠습니다! 왕자는 병신이다, 외웠습니다!”
 
“……대놓고 앞에서 말하진 말고. 그러다 목 잘려도 난 모른다?”


“그럼 속으로만 욕하겠습니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욕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아가씨가 병신이라고

 

부를 정도면 분명 참된 병신일 것이다. 분명 그럴 터였다.

 

“그 외엔……흠, 어쩌면 라비스 경이 올지도 모르겠네.”


“그건 또 뭐하는 사람입니까?”

 

“나를 제외한 왕국 3검 중 한 명이야. 나와 비슷한 실력자라고 해야 하나.”


아가씨랑 동격이라고? 와, 그럼 어마어마하게 강하겠구나.

 

“그 사람은 괜찮아. 깐깐하고 고지식해도 상식이 안 통하는 바보는 아니거든.”


“아가씨랑 그 라비스 경이랑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경우에 따라서. 아마 백병전에선 라비스 경이 이기겠지만, 내가 거리를

 

벌릴 수 있으면 이길 수 있겠지. 하여튼 그 사람도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 때, 아가씨가 뭘 깜빡 잊었다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네 봉급이야.”


“이게 다 동전입니까? 제가 원래 받던 거에……어……아무튼 엄청 많습니다!”


“나는 내 사람한테 후하거든. 원래 충성심은 돈으로 사는 거야.”


“저는 안 주셔도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건 네가 이상한 거고.”


나는 동전을 일일이 셌다. 그리고 한 30개쯤 셌을 때,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감사합니다! 이거면 감자밭을 넓힐 수 있을 겁니다!”


“돈이 그렇게 많은데 고작 하는 게 감자밭을 늘리는 거야?”


“아가씨, 잊지 마십시오. 감자는 늘 옳습니다. 감자는 절대 틀리지 않는 법입니다.”
 
“뭐야, 그게.”


아무튼 나는 이 돈을 감자에 투자하기로 했다.

 

내년엔 더 많은 감자를 캘 수 있을 테고, 또 돈을 받으면 더더욱 많은 감자가…….

 

상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감자 부자 만세!


“그리고 오늘 저녁부터 내일까진 쉬어.”
 
“아가씨는 뭘 하실 겁니까?”
 
“연회 준비해야지. 그나저나 드레스 입기 싫은데…….”


“제가 대신 입을까요?”


“제발 그만둬. 보는 사람들 배려도 해야지.”

 

그 뒤, 나는 돈을 챙겨서 본부를 나왔다.


휴일이라. 쉬는 건 오랜만이었다,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아참, 소피아는 요즘 뭐하고 지내려나.”


요 며칠 바빠서 못 만났으니, 한 번 얼굴 좀 보러 갈까?

 

나는 곧장 소피아네 집으로 갔다. 그래봤자 우리 집 바로 옆이지만 말이다.

 

“소피아아아아-! 지금 똥 싸!?”
 
“야! 다짜고짜 남의 집에 와서 똥 싸냐고 묻는 건 어느 나라 예의야!?”


소피아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파파!”


“뭐하느라 며칠이나 집에도 안 들어오셨나? 그 아가씨랑 오붓한 시간이라도 보내셨나?”


“고블린을 잡았어! 나 혼자서 말이야!”


“고작 고블린 하나 잡은 걸로 자랑하는 거야, 지금?”


“……하나라도 잡았잖아!”


“어휴, 이 모자란 놈.”


소피아가 나를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소피아네 집엔 가구나 그런 게 별로 없었는데, 그녀가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있는 거라곤 조그마한 부엌에 나무 탁자, 침대가 전부였다.

 

“다친 곳은 없어?”


“머리카락이 좀 뽑혔어.”
 
“야, 너희 아버지도 탈모였잖아. 머리숱 많은 거 빼면 장점도 없으면서, 하필 머리카락이!”

 

“나도 40살이 되면 대머리가 되는 건가…….”
 
“지금이라도 관리 열심히 해.”

 

아참, 내 머리카락이 문제가 아니라……나는 동전을 꺼내 탁자에 올려두었다.

 

“나 월급 탔어.”


“오- 뭐야!? 동전이 왜 이렇게 많아? 너 이거 다 훔쳤지! 솔직히 말해!”


“경비병이 금고를 털 리가 없잖아! 정당하게 받은 거야.”


“살다 살다 네가 출세하는 꼴도 보네…….”


소피아가 장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이 돈으로 뭐 할 거야?”


“음……감자밭을 넓히고 남은 돈은 너 써.”
 
“됐네요. 이 사람아, 나도 벌어먹고 살 수 있거든?”


“겨우 입에 풀칠만 하잖아.”


내 말에 찔린 듯 소피아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래도 예전보단 훨씬 나아.”


그녀가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엔 소피아와 그녀의 부모님, 그리고 농장이 그려져 있었다.

 

“벌써 8년 정도 됐나?”


“9년이야. 진짜 그 땐 어떻게 살아야하나 막막했는데.”


나는 소피아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돼지들이 사는 울타리에서, 돼지가 먹다 남긴 찌꺼기를 훔쳐 먹고 있었다.

 

진흙과 돼지의 똥이 잔뜩 묻어 지저분한 그 모습은 절대 못 잊는다.

 

“그 날, 나는 부모님이랑 싸우고 집을 나왔어. 그러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가니-”
 
“그만 얘기해도 돼.”


“괜찮아. 집이……목장이 불타고 있었지. 부모님은 거기서 나오지 못하셨어.”


10년 전, 도적들이 날뛰고 흉흉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가씨가 활동을 시작한 뒤론 잠잠해졌지만 그 이전엔 정말……끔찍했다.

 

그 때는 나도 도적들이 잠잠해진 이유를 몰랐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없이 혼자 떠돌아다니다가 몇 번을 죽을 뻔했지. 빵을 훔치다

 

잡혀서 손목이 부러질 때까지 맞고, 고블린한테 끌려갔다가 겨우 탈출하고…….”

 

“…….”


“네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난 진작 죽었을 거야.”


나는 소피아를 보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말없이 소피아를 씻겨주고 밥을 챙겨주셨다. 그건 아직도 기억났다.

 

“이 집도, 지금 하는 일도, 전부 네 덕분이야. 네가 날 구해준 거야.”

 

“그 정돈 아니야.”
 
“그 정도 맞아. 너한테는 죽어서도 갚지 못할 빚을 졌어. 늘 감사하고 있어.”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살다보면 행복해지는 날도 오는 거야. 앞으론 더 좋아질 거야, 약속할게!”


“그 돈, 감자밭에 쓰지 말고 일단 모아두는 게 어때?”

 

소피아가 동전을 돌려주며 말했다.

 

“어……왜?”


“나중에 써야 할지도 모르잖아. 예를 들면……결혼 같은 거?”

 

“나는 결혼할 생각 없는데!”


“……진짜로?”


“마누라가 생기면 죽어서도 고통 받는다고 요반 대장님이 맨날 말했어.”

 

그녀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리고 내 이마를 딱 때렸다.

 

“아파!”


“바보. 바보 병신 머저리, 이제 가! 동전 챙겨서 나가!”
 
“아니, 왜 화내는 거야……히잉…….”


요놈의 계집애는 왜 이리 성질이 나쁜 거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고맙다고 말하자마자 버럭 화를 내다니. 분명 돼지 밥을 잘못 먹은 게 분명하다.

 

나는 동전을 챙겨서 소피아의 집에서 나왔다.

 

“으흠, 흐으음……큰돈은 처음 생긴 거라 어찌 써야할지 모르겠네.”


뭐, 일단 시장에 가면 뭐든 생각나지 않을까?

 

나는 동전을 챙겨서 시장으로 향했다…….

 


 

 

 

 

11.

 

“……그래서.”
 
다음날, 나는 아가씨한테 내가 산 물건들을 자랑하러 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가씨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내가 준 귀한 돈으로 이런 쓰레기들을 사오셨다?”

 

“쓰레기 아닙니다! 이 항아리는 가진 사람한테 행운을 불러온다고 했습니다!”


나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좋다고 하는 물건을 다 사봤다.

 

그러느라 동전을 다 써버렸지만,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이건 또 뭐야? 생선뼈 목걸이?”


“그 목걸이를 차면 정력이라는 게 좋아진답니다! 근데 정력이 뭡니까?”


“적어도 너한텐 쓸모없는 거야.”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아가씨가 내가 산 물건을 발로 차며 말했다.

 

“음, 이건 반지인가? 너 반지 같은 걸 쓰던가?”
 
“아, 그건 아가씨 드리려고 산 선물입니다!”

 

알아봐주는구나! 나는 아가씨가 들고 있던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런 싸구려를 쓸 거라고 생각했어?”

 

“엑, 그거 비싸게 주고 샀습니다! 동전을 어……그게……한 50개는 줬습니다!”


“지금 내가 찬 귀걸이, 네 표현을 빌리자면 살 때 동전 3천개는 줬을 거야.”


“으헉……동전 3천개면 이 동네를 감자밭으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가씨가 반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피식 웃었다.

 

“뭐……부하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쓰진 않겠지만 말이야.”


“아참, 남은 동전은 거지들한테 전부 주고 왔습니다!”


“아니, 왜?”


“엥? 그야, 그 사람들은 저보다 더 돈이 필요하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가씨의 얼굴이 재미있는 모양으로 변했다.

 

꼭 노파가 앞이 안 보여서 눈살을 찌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앞으로 돈을 쓸 땐 내 허락을 받고 써.”


“어째서입니까! 횡포입니다, 아가씬 악덕 사장입니다! 너무합니다!”


“입 다물어.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니까.”


“으흑흑……여자가 돈 관리를 하면 인생이 끝난 거라고 요반 대장님이 말씀하셨는데…….”
 
“굶어죽기 싫으면 내 말대로 해. 이 바보야.”


“바보 아닙니다!”
 
“바보 맞아. 이 바보 천치야.”


나는 바보가 아니다.

 

다만 증거가 없어서 증명하지 못할 뿐이었다.

 

 

 

 

 

 




이번 편은 특별한 거 없는 일상편임. 

원래 이틀 간격으로 쓰는데 내일은 모델링 할 거라서 미리 썼다.

추가로 사소한 설정 이야기를 하자면 얀붕이의 모티브는 커다란 개임.

충성심 있고 친밀력 MAX지만 머리가 나쁘고 지 꼴리는 대로 행동해서…….

그래도 사람 목숨 걸린 일처럼 중요할 땐 누구보다도 진지해지는 성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