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없어졌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지만, 변하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던 아늑하고 소중한 원룸 빌라는 어디로가고 TS그룹이라 적혀져있는 황금색 글씨가 박혀있는 거대한 빌딩이 세워져 있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볼을 꼬집어 보았다. 살짝 얼얼해진 볼, 꿈이 아니다.


.... 내가 잘 못 본건가?


급전이 필요해서 어제 저녁 급하게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고된 노동을 했다.

알바 천국의 아르바이트 후기에 적혀 있었던것 만큼 상하차는 현세에 강림한 지옥 속 속에서 쏟아지는 택배를 진짜 이 악물고 버텼다.

어떻게든 일을 하지 않으면 바로 써야할 생활비도 없었기 때문에 꾸역꾸역 억지로 한거지, 보통 같으면 도저히 못하고 밤에 야간 택시를 타고 도망칠 그런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래 나는 야간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뛰고 새벽 첫차를 타고 집에 온 상황이었다.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푹신한 솜 이불 안에 소라게처럼 쏙 들어가서 꿀잠 때릴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는데

진짜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내 눈앞에 찾아왔다.뭐라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그냥 모지리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며 TS그룹의 입구를 바라 보았다.



... 아니면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미쳐 버린건가?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이 나오는 꿈을 꾸는가? 아니, 택배 노동자는 집에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는것일까?


가뜩이나 어제 아침부터 깨어있었던 터라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긴고아에 머리가 조여진 손오공의 고통이 이런 느낌일까? 


고통스럽다, 아픈 머리를 붙잡고 다시 걸음을 돌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갔다.

분명 지하철에서 잘못 내린게 분명했다.


내가 살고 있는 원룸이 있던 곳은 전형적인 배드타운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위치해있는 곳은 마천루가 숲처럼 이루어진 번화가중의 번화가가 아닌가?

나는 이런 도심지에서 살 만큼 그렇게 형편이 좋지 않다.


아..씹... 버스타고 갈까? 지하철 타면 돈 내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지출에 아픈 머리를 붙잡고 지하철 역으로 다시 걸어갔다.


유식역


어?제대로 내렸는데?


일담역 7번 입구.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다.

7번 입구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꺾은 뒤 10여 이상 걸음을 옮기면 분명 내가 살고 있는 원룸단지가 나와야 할 터.

하지만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건 원룸 단지가 아니라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솟은 마천루들 밖에 없었다.


게다가 TS그룹이라는건 듣도 보도 못했는데.


내가 비록 고등학교 졸업밖에 안했지만 한국에 대기업이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삼성,LG,한화, 뭐 두산에 대우,SK같은 그런 대기업들...


서울에 이렇게 높은 빌딩이 세워져 있다는건 알게 모르게 뉴스에도 많이 나오고 야구팀도 만들고 또 사람들의 입방아에 한번쯤은 오르락내리락 할만한 그런 기업이어야 할텐데

... 잠시 눈 앞의 빌딩을 바라보다. 문득 빌딩의 맨 윗층에 설치되어있는 디스플레이에서 나오는 광고가 내 눈에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을 간직하라. -은하 11

은하 11? 갤럭시 11이 아니고?


디스플레이에서 나오는 은하 11은 택배 모집 장소로 가는 동안 지하철 역사 광고에 나온 갤럭시 11의 디자인과 똑같이 생겼다.

심지어 홍보 캐치프레이즈마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상황.


삼성 법무팀이 알면 입에 거품을 물고 고소장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광고였다. 

한가지 다른게 있다면, 삼성의 광고 모델은 무슨 핀란드 출신의 슈-로 시작하는 금발 벽안의 여성이었지만, 디스플레이속의 광고 모델은 남자였다.

아니, 뭐 그건 일단 중요하지 않고. 일단 집을 찾아야 하는데.


휴대폰은 또 이게 뭔데?


휴대 전화의 맨 윗부분에 은빛으로 D.J라고 박혀있는 회사 로고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분명 LG에서 만든 V7을 가지고 있었다.


DJ라니... 내가 알고 있는 DJ는 클럽에서 디제잉을 하는 그 DJ밖에 없었다.


골 때리네.


분명 어제부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몸에서 한계가 온게 분명했다. 

어제 아침부터 일어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야밤에는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된 노동을 했으니까, 그래 지금 몸에 무리가 와서 헛것이 보이는게 분명했다.


일단 쉬자.


오늘 일을 마치고 나서 일당으로 번 11만원. 월세를 내는데 보태야 하지만, 일단 건강이 최우선이다.


대로로 걸어가던 중 나는 맞은편에 위치한 사우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24시 향토 불가마


저것도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에는 분명 GS편의점과 뭐 그 외 다이소, 파리바게트 등이 있어야 할 곳이었지만 일단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남자 한 명이요. 그리고 찜질방도 이용할거에요"


락커룸 열쇠와 핑크빛 찜질복을 챙겨든다.


??핑크빛? 선넘네.


세상에 남자에게 핑크빛이라니, 이 여자 눈이 제대로 달려 있긴 한가?

나는 분명 남자라고 말했는데, 핑크빛 찜질방 옷을 준걸 보면, 이 사장.. 귀도 어떻게 맛이 가버린 것 같다.


"저기요 잘 못 준것 같은데요, 저기 하늘색 줘야 되는거 아니에요?"


"? 남자라고 말씀 안 하셧어요?"


"남자니까 하늘색 줘야죠"


"....????"


내 말이 멍청한 소리라도 되는냥 뚱한 표정으로 카운터 직원이 나를 바라본다.


뭐지 진짜??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애새끼도 아니고 찜질방 옷 색깔 가지고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홈리스 난민이 됬는데 찜질방 옷쯤이야 뭐 대수인가? 

남탕이라고 써진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남탕 안은 조용했다.

사람이라고는 탈의실 평상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영감 몇명만 있고 목욕탕에는 아무도 없었다.

탕 안에 들어가 몸을 찌질 생각 없기 때문에 대충 뜨거운 물로 샤워만 했다. 가뜩이나 쓰지않은 근육을 마구잡이로 쥐어짜낸 탓에 온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상하차 진짜 두번 다시 안 한다.

진짜 죽어도 안해, 목에 칼을 디밀어도 안 할거야.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탕에 들어가 몸을 지지는것도 좋지만, 일단은 대충 씻고 자고 싶다.


샤워 타월 안 챙겼네. 등을 좀 밀어야 하는데.


샤워를 하다 말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입구 바깥 왼쪽에 대충 샤워 타월이 한가득 쌓여 있어야 할 법한 곳에는 정수기가 있었다.

입구가 아니라 출구 쪽에 있는가 싶어,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겨서 샤워 타월이 있는지 확인 해 봤지만, 거기서도 샤워타월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니 일단 샤워 타월은 별로 중요한게 아니였다.


"저기, 아저씨 여기 수건 어딨어요?"


"우리 수건 같은거 따로 더 안 챙겨주는데?"


아니, 목욕탕에 수건이 없는게 말이 되냐?


그때, 문득 내 눈 뒷편에는 카운터뒤에 잔뜩 쌓여져 있는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뒤에 있는건 뭔데요?"


"..뒤에?"


직원은 뒤에 있는 수건탑을 보고 그 다음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올 때 안 챙겨갔어?"


"안 챙겼는데요?"


"아니, 들어왔으면 먼저 수건을 챙겨야지. 얼른 와서 수건 두 장 챙겨가"


들어올때 미리 수건을 받아간다고? 아니 무슨 여탕도 아니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카운터까지 걸어간 뒤, 카운터에서 주는 수건을 받아 챙긴 아름이었다.


아침부터 피곤하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수건이랑 샤워타월이 무제한이 아니라니, 선넘네 원래 목욕탕에 수건같은건 그냥 쓸 수 있지 않나..?

서울 민심 수준 알 만하다.


이제 보니 로션도 스킨도, 그리고 헤어드라이어도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불경기라서 남탕도 여탕처럼 운영하는건가? 


샤워 타월도 없고 로션도 없고 스킨도 없도 그냥 다 없어도 사용한 수건을 담아놓는 통은 있었다.

그리고 찜질복으로 갈아 입은 후 위로 올라갔다.


역시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찜질방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뭐 한가지 눈에 걸리는 점은 여자는 없고 늙은 남자 몇명이서 도란도란 모여서 계란과 식혜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다는 점?


그것 외에는 별로 특이한 점이 없었다.


조그마한 목침 하나를 챙긴 뒤, 남성 전용 수면실로 들어갔다. 컴컴한 방에 들어가니 물에 젖은것처럼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눕자마자 바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도 모르게 꽤나 깊은 잠을 잔것 같다. 입가에 흐르는 침을 대충 손등으로 닦은 후에 같이 챙겨온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4시.


아까 마지막으로 자기전에 시간을 확인했을때가 아침 8시였으니까, 8시간 동안 계속 잠을 잤단 소리가 된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머리가 멍하다. 몸을 반쯤 한참동안 그렇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배꼽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기왕 이렇게 된거 여기서 밥도 먹고 가야지.

끼니는 제때 챙겨 먹어야 한다. 뭐 그 굳끼제먹이라는 사자성어도 있지 않은가?

뜻이 굳 끼니는 제때 챙겨 먹어야지 였나? 사자 성어가 아닌가? 이거는?


휴대폰과 지갑을 챙기고 비틀비틀 일어나서 다시 숙면실을 기어가듯이 빠져나갔다. 

고된 노동으로 인해서 몸에 잔뜩 알이 배긴 상황. 몸이 너무 아파왔다.

찜질방의 TV 앞에는 아까 아침에 봤던 늙은 남자 몇명이서 여전히 계란과 식혜를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저씨들 말 많네.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보네.

그 뭐 중년기때 부터 남성은 에스트로겐이 많아진다고 했나? 뭐 그런 말도 있으니까.

아조씨들 파마도 했네


그것도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 나이 먹은 중년 아저씨들이 파마를 한 모습을 보니까 북한의 김정일이 생각난다.

아니 뭐 그렇다고. 그건 그렇고 평일 대낮부터 찜질방 안에 죽치고 앉아있는것 치고는 아저씨들 표정이 너무 해맑아 보인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배가 고파졌다. 당연한 소리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근처 매점에서 컵라면하고 삶은 달걀을 3개 사고 컵라면에 물을 받아 놓은 뒤, 삶은 계란을 챙기고 TV 앞에 앉았다.


TV에는 아까 거리에서 본 TS그룹, DJ전자처럼 듣도보도 못한 방송사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

방송사도 MCB 아름이가 전혀 모르는 방송사였다. MBC도 아니고 MCB다. 

뭐 집도 없이지고 삼성도 없어진 상황인데 방송사 이름이 바뀐 정도는.. 그냥 뭐.. 대충 넘어가자. 피곤하다.


TV에는 여자 연예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와... 좀 하드한데? 저런게 방송에 나온다고??


아니 뭐 방송을 보니까 대충 농촌 특집으로 막걸리랑 두부, 김치를 올린 쟁반을 머리로 짊어진 체 시간 안에 목적지 안에 도착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여자 연예인들이 나오는데 보기보다 재밌었다.

멍청하게 논두렁에 발을 잘못 디뎌 머리가 논밭에 처박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으니까. 아니 뭐 웃긴데 뭐? 웃어야지. 원래 웃음은 참으면 병나는 법이다. 웃을 수 있을때 웃어야지.


-삑


아 뭐야 한참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선넘네.


"상진아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아 몰랑! 내 마음대로 할거야"


-찰싹!


오우, 좀 하드한데.


갑자기 체널을 바꿨다는것에 짜증이 난 것도 잠시, 바뀐 체널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뺨을 때리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예상 외의 하드한 연출에 나도 모르게 헉-하고 한숨을 내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남자가 여자 뺨을 때리다니. 방통위에서 징계를 먹어도 할 말 없는 그런 장면이었다.

그 이후로도 방통위에서 징계를 받아도 할말 없는 그런 장면들이 계속해서 보여지고 있었다.


뺨을 때린 걸로 모자라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잔에 담긴 물을 여자에게 쏟아버리는 장면.

그리고 우리 헤어져!라고 남자가 빽하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탄이 쏟아질 수 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보기 힘든 그런 개 막장 드라마였다.

이건 뭐 시청자 게시판에 난리가 나도 한참 날 것 같은 그런 개막장 드라마였다. 진짜 순도 100%의 개막장 드라마.

오늘 인터넷 좀 터져나가겠는데? 계속해서 시청자 게시판을 보면 난리칠만한 장면들이 TV에서 연신 나오고 있었다.


남자 배우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 무릎을 꿇는 여자 등등...


다른 의미로 순도 100% 상남자 드라마네. 뭐 이런게 다 있냐. 뭐 재미는 있다만.. 

무엇을 상상하든 내 상상을 500% 뛰어 넘는 색다른 방송에 넋을 잃고 빠져들듯 TV에 나오는 드라마를 바라봤다.

잠시 후 드라마가 끝나고 다음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이 나오는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으니까. 


내 아들 금태양? 나중에 토렌트로 몰아봐야겠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대충 5시가 다 되가고 있었다.


...슬슬 나가볼까?


주섬주섬 먹은 컵라면 용기와 껍질을 들어서 쓰레기통에 가져다버린다.

그리고 남탕으로 다시 올라가 옷을 갈아입으려다... 걸음을 멈췄다.


근데, 나가도 할 거 없잖아.

여기서 나가면 뭐 할건데? ... 일단은 좀 더 쉬다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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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be contiued


뇌절에 막장이라고 해서 다시 한번 리메이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