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황교안/일생

최근 수정 시각:

1. 젊은 시절 [편집]

1957년 4월 15일 서울특별시 용산구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황해도 출신 실향민으로, 해주시에 터를 잡고 살다가 1.4 후퇴 때 월남했다고 한다.

경기고등학교 재학 당시 학도호국단 연대장으로 활동했다 경기고는 1976년 2월 종로구 화동[1]에서 에서 강남구 삼성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는데, 당시 이삿짐 행렬 트럭에서 황교안이 교기를 들고 이동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재수까지 해가며 도전했지만 결국 낙방하고, 후기로 성균관대학교 법학과에 77학번으로 입학했다.

담마진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고는 하는데..




2. 관료 활동 [편집]



25살인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13기를 마치고 1983년 청주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임용된다. 이후 서울지검 공안부에 충원되면서 "MR.국가보안법"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여담으로 황교안은 노무현 정권 최고의 미운털이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황교안은 참여정부시절 내내 차장검사만 무려 5년을 하며 눈 앞에서 여러 번 승진을 놓쳤다. 2004년 부산 동부지검 차장검사에서 검사장 승진을 목전에 두고 서울고검 검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새로 임명된 공안통 김경한 법무부장관이 단행한 검찰인사에서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임명되며 검사장 승진 막차를 타게 되었다. 2009년에는 저서 집회·시위법 해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을 출판했으며 창원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전보되었다.

2011년 9월에 연수원 동기인 한상대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에 임명되자 신임총장의 선배/동기는 사직한다는 전통에 따라 검사 생활을 그만두고 법무장관 임명 때까지 법무법인 태평양의 형사부문 고문변호사로 재직했다. 또한 2011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선거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과 CBS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1. 박근혜 정부 [편집]

2013년에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법무부장관 재임 시절에 그는 정점식 사법연수원 기획부장 등, 소위 공안통 검찰 간부들과 함께 2013년 11월 5일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을 직접 청구했다.
"결론적으로, 통합진보당은 대한민국에서 정당으로 활동해서는 안 될 반헌법적인 정당입니다."

2014.11.25.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최후변론 전문에서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통합진보당 해산 지지가 더 높았고, 실제로 해산에 성공시키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보수진영에서 차기 대권주자로 황교안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쨌든 헌재판결과 여론전을 승리로 이끈 실적을 인정받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2015년 6월 18일 임명 동의안이 처리됨으로써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찬성은 156표, 반대는 120표, 무효는 2표였고, 표결에 참여한 새누리당의 의석 수가 156석이므로 사실상 새누리당 전원이 찬성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56.1%라는 낮은 찬성률로 통과되었는데, 이는 총리 인사청문회가 생긴 이래로 3번째로 낮은 찬성률이라 여론 일각에선 앞으로의 국정운영이 쉽지만은 않으리란 전망이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사임 의사를 밝히고 김병준 국민대 교수가 국무총리로 내정되었지만, 야당이 사전 협의가 없었음을 이유로 국회 동의 절차를 거부하여 사실상 유임되었다. 황교안의 책임도 있으므로 황교안도 사퇴하라는 요구가 많았으나,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리고 2016년 12월 9일 박근혜의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제6공화국 성립 이후 고건 前 총리에 이어 2번째로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2.2.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 [편집]

  자세한 내용은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3. 문재인 정부 [편집]

5월 10일 사표를 냈으나 문재앙이 내각 공백을 우려해 보류했다. 박근혜 전 참모관들이랑 내각 국무원들 모두 포함. 그러나 결국 유일호한테 넘기고 하루만에 사퇴했다.

이승만이 사퇴하고 허정이 4개월 조금 넘짓 권한대행으로 있다가 윤보선한테 넘겼는데 얜 5개월이나 앉으면서 허정의 기록을 깨셨다.

근데 전임 대통령의 각종 자료들을 죄다 처분하고 봉인해버리는 바람에 후임 대통령에게 인수인계할 자료가 얼마 없단다. 무슨 학교 과제도 아니고 10페이지가 뭐냐 10페이지가

정확히는 기밀문서가 그 지랄 났지, 각 부서별 일반 문서는 그대로 있다. 하지만 국가 기밀, 중요 자료 등을 파기, 봉인 시킨 건 쉴드 못 받는 일인건 당연하다. 까놓고 말하면 기밀문서도 아니다. 대충 분석으로는 순실이랑 짝짝꿍한거랑 세월호 7시간 기타 ㄹ혜가 청와대에서 밥 쳐먹고 하는거 봉인시킨 거지.

다만 황교안이 권한대행 하기 전에 진짜 중요 문서는 그전에 처분됐을 확률이 매우 높다. 사태가 터진 날[2]까지 기간으로 봤을 땐 이미 자료를 처리한 뒤, 별 쓰잘데기 없는 걸 황교안에게 넘겼고 그걸 봉인시켰을 거다.

실제로 총리 탄핵은 민주당 의석수로 충분히 가능한데 민심이 터진 11월 달에 분위기로는 총리였던 황교안도 탄핵 대상이었기에 ㄹ혜가 그 자료를 언제 모가지 날라갈지 모르는 황교안에게 넘겨줬을 일은 없다.

문재앙이 대통령되고 황교안이랑 5월 10일 오후에 오찬을 가졌고 아마 거기서 문재앙에게 다 실토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3. 정계 입문과 자유한국당 대표 [편집]

그렇게 정계에서 물러나기라도 하는가 했더니... 결국 자유한국당에 영입됐다. 결국 다음 대선과 총선에 나오려고 하나 보다. 당연히 민주당에선 국정농단을 언급하면서 난리 났고, 기독교 보수 단체에서 밀어주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4. 21대 총선 [편집]





21대 총선에서 기여코 180석을 민ㅈ당에 넘겨주며 일을 터트렸다.

지는 지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지만, 전광판 같은 놈하고 손 잡고 차명진 쉴드치면서 대놓는 건 대안이 아니라 무지성 민주당 때리기 뿐이니까 당연히 진 거다.

거기다가 지 경쟁 상대들 견제하겠다고 권성동, 김태호, 윤상현, 홍준표 쳐내고 김형오하고 쌍으로 뻘짓이나 하다가 막판에 지는 거 직감하고 김종인 불러왔는데 결과는 역시나 참패.

??? : 「─────어이, 황교안!」















「이상을 안고 익사해라... 삼류」

그러나 다시 문재앙 정부의 레임덕이 가속화되며, 이를 막기 위해 한 몸 불사르겠다며 국민의힘 제2차 전당대회에 출마를 선언했다.

5. 20대 대선 [편집]



이 문서는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한 고장난 시계에 대해 다룹니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습니다.
??? : 일본이 백 년의 적이면, 중국은 천 년의 적이다.
[ 펼치기 · 접기 ]
주요 경선 후보
 [ 제1차 경선 ] 
탈락
사퇴
2차 경선 진출
2차 경선 진출
2차 경선 진출
2차 경선 진출
탈락
탈락
2차 경선 진출
2차 경선 진출
2차 경선 진출
2차 경선 진출
1 · 2 · 3
"초일류 정상국가"

황교안,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민의힘 경선 슬로건
의외로 생각보다 정상이다. 그 놈의 부정선거 드립만 빼면.

특히나 토론 능력이 상당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부정선거 떡밥이 나오는 순간 병신이 되어 버린다.

2차 컷오프 탈락 후 역시나 부정경선을 주장 중이다.

6.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 [편집]


예상대로 출마 선언을 했다.

그러나 부즈엉~선거만을 외치던 지난 전당대회보다는 발전해 나름 토론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윤심 덕에 인지도 제로란 약점을 뛰어넘고 선두를 달리던 김기현의 울산 땅 의혹을 다시 공론화시켜 '울산 이재명' 드립을 탄생시킨 건 덤.

한순간에 언어장애가 되어버린 '안초딩' 철수퍼거에게 신영복 논란을 들이밀며 압박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다만 천아용인 후보에게 '민주당 프락치' '성상납' 프레임을 씌우려는 건 여전하긴 하다.
[1] 현재의 서울특별시교육청정독도서관[2] 16년도 10월 25일부터 ~ 탄핵일 1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