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가 도졌다. 걸작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던 이 둔재의 비참한 결말이다. 


걸작에 관한 나의 열망이 어느 때에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걸작에 관한 나의 노력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안다.


태어났을 때부터 걸작들과 함께 성장해왔다.


오래전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미술 시간, 짝을 지어 얼굴을 그려주는 활동이 있던 날이다.


아무렇게나 짝이 이루어지고 도화지와 연필 한 자루가 주어졌다.


나와 짝이 된 아이와 난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희미한 잡담을 해가면서 서로의 얼굴을 그렸다.


모두가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선생님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 하나하나를 훑어보았다.


몇 아이들의 그림들에는 잘했다는 칭찬을 늘어주셨다.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오자 내 그림을 칭찬해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 들뜬 채로 옆의 아이를 봤다.


아마 그 아이에게 이 기대감을 조금이라도 설명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난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아이가 그린 도화지에는 거울 속에 비쳤던 내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내 도화지에는 그 아이를 형편없이 왜곡한 그림만이 차있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를 가장 칭찬했고 내 그림에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가 다였다.


굳이 회상해보자면, 


이 나이 대에서 그릴만한 그림이 아니다. 성인들 중에도 이렇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어째선지 칭찬을 받으며 환하게 웃는 그 아이가 부러웠다.


그 뒤로 집에서 무언가든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졸라대며 미술 학원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즐거워 다른 일에는 신경도 않고 오로지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갈수록 이상했다.


분명 조금씩 그림 실력은 나아졌다.


나와 같이 학원을 다니던 다른 아이들도 그림 실력이 나아졌다.


그 나아짐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그림을 버렸다.


그림을 버리자니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었다.


전에 미술에 관한 정보를 탐색하던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던 날이었다.


걷다가 책 하나를 발견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이었다.


꽤 두꺼운 분량이라 주저했지만 무언가에 이끌린 듯 읽어내기 시작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하던 여러 단어들과 배경들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지만 어찌됐든 읽어냈다.


글을 모두 읽은 뒤에는 울음이 터졌다.


사라져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무수한 여운에 잠겼다.


그때부터 새로운 꿈이 생겼다.


저런 걸작을 글로서 만들어 내리라고 다짐했다.


글을 그렇게 미친 듯이 써내기 시작했다.


시, 일기, 수필, 소설, 희곡 등 모든 갈래의 글들을 닥치는 대로 써댔다.


어느 새에 일상도 대충대충 넘기며 글을 무수히 써대자 이제는 남들 앞에 글을 보여주어도 괜찮다 느꼈다.


차츰 공모전에 준비하며 친구들 앞에서 그 글들을 조금씩 내보였다.


처음은 비웃음이었고 마지막도 비웃음이었다.


괜한 오기가 생겨 죽도록 글을 써보았지만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난 그저 세계의 엑스트라로 남을 것이고 걸작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받아들였다.


인생이 졸작으로 남으리란 것도 받아들였다.


그래도 남의 걸작만이라도 즐기고 싶어 책을 펼쳐보았다.


언제나 걸작을 보고 나서 찾아온 건 무수한 여운이었고 나는 그 여운에 압도되어 글을 써갔지만 어째선지 그게 더 이상 싫었다. 난 글을 쓰기가 싫어졌다. 이 여운이 재빨리 내 몸에서 나갔으면 했다. 도저히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나라는 멍청이가, 걸작을 써내려고 노력하는 멍청이가, 저런 것을 만들어내 남들에게 이런 여운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확신했다. 나보다도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한낱 보잘 것 없는 폐기물일 뿐이고 걸작을 만들고 싶다 징징대면서 그를 위한 노력 대신 헛된 망상들로 가득 찬 쓰레기이다. 가슴 속 맺힌 원한들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고 강한 열등감을 품게 했다. 내가 나태 때문에 걸작을 못 만드는 것인지 내가 재능 때문에 걸작을 못 만드는 것인지. 누군가는 젊어서 꽃을 피우고 누군가는 늙어서 꽃을 피운다. 아직 나는 모든 삶을 다 살아보지 않았기에 누군가인지조차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걸작을 써내지 못한 채로 발전도 없이 시간이나 하염없이 때워버리기나 하는 하찮은 인간이란 게 너무나 비참하고 슬퍼서 걸작에 관한 잡념에 벗어나, 이 여운에게서도 벗어나, 나만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었다.


도피하고 싶었으나 강한 권태가 나에게 달려들어 나를 제지했다. 


더 이상 살아가기가 싫다.


죽기도 싫다.


난 모든 게 싫다.


침대를 베던 몸을 일으켜본다.


입기 간편한 펑퍼짐한 옷들을 챙겨 입는다.


창으로 밖을 확인해보니 해가 지면서 아름다운 분홍빛 하늘을 만들어냈다.


육안으로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간다.


더 넓은 하늘을 찾아내기 위해 건물들로 빽빽한 이곳을 벗어나려 한다.


계속 뛰며 인근 공원을 향했다. 


저 하늘을 더 오래도록 보고 싶단 마음만이 가득하다.


이번에도 그저 무언가에 이끌렸다.


하늘은 차츰 변해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분홍빛 하늘은 더 진한 분홍빛의 하늘로 변했다.


마침내 공원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웠다.


어두워졌으나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별이 보였다.


도시의 불빛들에 의해 희미하게 빛을 내었던 별 3개가 보였다.


난 차가운 공기를 만끽하며 눈을 감고 팔을 펼쳤다.


그리고 조물주에게 빌었다.


나에게 걸작을 만들 기회를 달라고.


순간 감은 눈에서 눈부심과 열기를 느꼈다.


그 눈부심에 반역하여 조금이나마 눈을 뜨자니 새하얀 빛이 내 몸을 집어삼켜갔다.


제대로 눈을 떴을 때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 서있었다.


온몸을 제대로 겨누기도 힘들어 고꾸라졌다.


주위에는 무너진 건축물들의 잔해들로만 가득했다.


내 손은 매끄럽고 가늘어졌으며 창백했다.


역시나 광기가 도졌다.


죽음을 탐하는 우울한 광기에서 겨우내 벗어났는데.


소설의 장면 묘사처럼 진행되는 광기와 환각이 끊이지 않는 광기가 나를 지배한다. 


수없는 시간을 글을 써내려가며 보냈다. 힘들도 고되더라도 조금씩 늘어가는 스스로의 필력에 자신감이 붙어 하염없이 써댔다. 


그 시간은 극심한 우울과 나태의 사슬에 갇혀버렸고 나를 기어이 미치게 만들었다. 


이제 내 몸은 왜소하고 병약하다. 


이제 나는 미치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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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쓴 글인데 오랜만에 발견해서 올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