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살 배긴 손이 현을 짚는다. 네 개의 음, 그보단 많은 음과 음률. 손가락이 네 개의 현을 하나씩 튕겨가며 소리를 듣는다. 딱히 특별한 점은 없다. 이내 손에 활이 쥐어지고, 송진이 발린 말총이 선율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떨리지 않는다. 감정이 움직이지 않았다. 음악이 죽었다. 생명을 잃은 악기가 영혼 없는 음률만을 내뱉었다. 조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모든 악기는 제 나름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내구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수명이 다하면, 악기는 더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야말로 끝이다. 이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악기를 수없이 봐 왔고, 지금도 그러한 그의 이름은 트러즈 터스크. 적어도 이런 일이 최근까지 들어온 의뢰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한 조율자였다.


“잘 되어가는 겁니까?”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질문이 들려왔다. 트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자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이 도시 최고의 조율자가 악기를 살리지 못할 리는 없다. 그래도 걱정은 걱정이었다. 비싼 악기여서가 아니었다. 한 명의 음악가이기에, 저 바이올린과 함께 한 추억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조율자는 딱히 괘념치 않았다. 현을 순서대로, 아니면 섞어서 튕겨보고 음이 멀쩡하단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자신의 곁에 놓여있던 악보를 들었다. 별로 복잡하진 않은 음표의 나열이 거치대 위에 놓였다. 이내 연주가 시작됐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다. 악기 주인의 마음이 타들어 갔다. 하지만 연주가 임계에 달하자, 재가 되기 직전이던 마음이 떨렸다. 성공했다. 트러즈는 음을 길게 끌어 여운을 주곤, 악기를 내려놓았다.


“성공했습니다, 손님. 의뢰비는 이미 주셨으니,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트러즈 씨. 제가 이 일은 무조건 보상을..”

“아뇨. 괜찮습니다. 트러즈 더스트 사무소의 조율 서비스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네..”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조율자는 방을 떠나서 의뢰인의 집 밖으로 나왔다. 정오쯤의 산뜻한 햇살이 그의 눈을 찔렀다. 트러즈는 소매를 약간 걷어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이른 점심때지만 거리는 활기찼다. 골목 사이를 나다니는 음악 소리, 활기찬 노래. 밝은 표정으로 나다니는 행인들. 그의 거주지이자 예술가들의 도시, 이메르 시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오늘 의뢰는.. 이런, 머리카락이..”


 트러즈는 땀에 처진 머리카락을 약간 정리하곤 숨을 돌렸다. 낮 도시의 맑지만은 않은 공기가 폐에 가득 찼다가 사라졌다. 의뢰서의 마지막 줄을 붉은 표시가 양단하고 있었다. 오늘의 일은 끝. 그는 의뢰들이 적힌 종이를 약간 구겨 품에 넣었다. 사무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뮤-로시카 3번지로 가주십시오.”

“어느 쪽으로 갈까요?”

“최대한 짧은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예예.”


 택시 기사는 열어놨던 창을 닫고 출발했다. 천천히 시작했던 주행이 빠른 질주로 바뀌었다. 삽시간에 바뀌는 주변 풍경을 보며, 트러즈는 권태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곳, 이메르 시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서 나고 자라진 않았다. 오히려 기차를 타도 하루 이상 걸릴 정도로 먼 곳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보다 이 예술가들의 둥지에서 더 오래 살았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기엔 그랬다. 이미 그에게 이메르는 고향이었다. 정겨운 면 하나 없지만, 고양이 아니라기엔 너무 오래 살아온, 정들지 않은 고향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금액은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네네. 저희 오엘린 사의 서비스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술가의 연이 함께하길.”

“감사합니다. 예술가의 연이 함께하길.”


 트러즈는 의례적인 인사만 남기고 택시에서 내렸다. 뮤-로시카 3번지의 작은 건물. 예술가답게 흩날리는 필체로, 트러즈 더스트란 이름이 휘갈겨져 있었다. 그가 전부터 쓰던 사무실이었다. 이곳에 온 이래로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예전엔 다른 곳으로 이전할 돈이 없어서, 지금은 저곳이 편해서였다. 인적 없는 골목의 건물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시끄러웠다. 평소 그 말곤 드나드는 사람이 없던 사무실의 문 앞에서, 한 남자가 씩씩댔다. 그 남자는 덥수룩한 갈색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트러즈는, 눈앞의 광경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의 사무실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잠시 후 그가 자신이 십 년 넘게 전화로만 의뢰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신을 차릴 때, 그 남자는 트러즈를 발견하곤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당신이 트러즈 터스크 맞지?”

“예? 예.. 제가 트러즈 터스크입니다. 혹시 의뢰라도 있으십니까?”

“거 참, 성씨는 터스크인데 왜 가게 이름은 더스트인지를 모르겠네.”

“가게가 아니라 사무실입니다. 그리고 저게 더스트인 이유는-”

“맞아. 터스크 씨. 의뢰가 있어. 근데 일단 사무실 좀 열어줘.”

“..하아. 일단 들어오십시오. 얘기는 그 후에 들어봅시다.”


 정신을 놓다 못해 우주 너머로 날려 버린 듯한 대화. 트러즈는 직감했다.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자신도 비슷하게 되리라. 정작 그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게 웃었다. 사무실 안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그런지, 먼지 냄새와 먼지 모두 자욱했다. 사내는 말을 꺼냈다.


“보기엔 결벽증 같던데, 사무실은 더럽네?”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되어 있- 그건 건들지 마십시오!”

“오, 이건 악보인가? 그 트러즈 터스크가 작곡까지 하는 줄은 몰랐는데.”

“제 악보가 아닙니다. 내려놓으십시오. 대급에 추가할 겁니다.”

“뭐, 그렇다면야.”


 사내가 한창 훑어보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종이의 탑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여파에 나머지도 무너졌다. 트러즈의 한숨이 사내의 귀를 찔렀다. 굉장히 짜증이 난 눈치였다. 물론 사내도 잘 알았다. 하지만 남자는 겸연쩍게 종이를 옆으로 치워 버리고, 그나마 공간이 있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소파의 직물에서 먼지가 털렸다. 그리고 다른 공간은 없었다. 대부분 악보나 악보집, 악기가 공간을 차지했다. 식사할 수 있는 공간과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빼면, 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듯했다. 그러니까 트러즈가 앉을 공간은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반대편 의자 위의 물건들을 흩은 후 앉았다.


“그래서 뭐 마실 거는 없어? 차라거나 그런 거.”

“여긴 없습니다. 사유재산 침해로 당신을 내쫓기 전에 되도록 빨리 의뢰를 말해 주십시오.”

“알겠어. 알겠다고. 그 전에 내 소개부터 해도 될까?”

“길지 않게 하십시오. 무조건.”

“좋아. 난 로인,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난 당신을 오늘 처음 봤습니다.”

“나 몰라? 전설의 작곡가이자 음악의 선구자, 가장 아름다운 선율의 조율자인, 이 나를?”


 그 순간 트러즈의 입에서 조소 겸 실소가 튀어나왔다.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런 미사여구는 전부 넘기고, 빨리 설명이나 하십시오.”

“하아.. 그래. 난 크리스 케도울루 로인, 싱어송라이터야. 의뢰할 게 있는데..”

“그래서 그 의뢰가 뭡니까?”

“그게.. 사실 작곡가로서 부끄럽긴 하지만, 내 말은..”

“말 끌지 마십시오.”

“알겠어. 내 의뢰는 이거야, 터스크 씨. 당신이 작곡을 도와줬으면 해.”

“작곡 외주 의뢰입니까? 맞다면 여기 명부에 기입을..”

“아니, 그게 아니라.”


 작곡 외주라는 말에 크리스는 실소 섞인 한숨을 흘렸다. 주저와 열정이 섞인 시선이 트러즈를 향했다. 그는 또다시 직감했다. 절대 쉬운 의뢰는 아닐 것이다. 이에 그가 먼저 일어나려 했을 때, 크리스의 말이 그의 기상을 가로막았다.


“부탁할게. 이 의뢰를 받아들여 줘. 자세한 건 그때 말할게. 보수는 섭섭하지 않을 거야.”


 자세한 건 비밀로 넘기고, 의뢰를 받아들인 후에야 말해 주겠다니. 트러즈는 일단 의심을 느꼈다. 하지만 크리스의 눈길은 진지했다. 절대 음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조차 들었다. 예전의 그와 같았다. 열정 하나만으로 악기를 다뤘다. 조율자가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모든 것에 권태를 느꼈다. 이 사내는 아니었다. 청년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크리스는, 오히려 어린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끌어들이는 열정이 느껴졌다. 이에 트러즈도 어느 정도는 경도된 듯했다.


“다시 물을게, 받을 거야?”

“그 전에 당신, 작곡가라고 했습니까?”

“응? 그렇지. 그건 왜?”

“그럼 이쪽에서 조건을 하나 추가하도록 하죠.”


 트러즈의 말에 사내는 거의 울상을 지었다. 어느새 책상에 놓인 계약서 위를 펜이 훑고 지나갔다. 트러즈는 조금 웃고 있었다. 마치 계획이 성공했다는 듯했다. 그는 크리스에게 완전히 건조된 계약서와 펜을 건넸다. 그때까지만 해도 크리스의 표정은 불안에 절어 있었다. 하지만 계약서를 읽었을 때, 그의 표정은 한순간에 밝아졌다.


“완성된 곡을 들려주면 대금을 조금 깎아주겠다고?”

“예. 작곡가 조합에서 제공하는 무상 할인 혜택도 확인하십시오.”

“그러니까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이런 조건으로?”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아니. 당신 엄청 꽉 막힌 사람이잖아.”

“..그 소문은 수정할 필요가 있겠군요. 어쨌든 사인하십시오.”

“풋. 그 소문 내가 수정해 볼게. 고마워. 트러즈 씨.”


 계약서에 크리스가 사인하자, 트러즈는 이에 도장을 찍곤 말했다.


“크리스 케돌로우 로인. 자칭 전설의 작곡가, 가장 아름다운..”

“그만해. 직접 들으니까 말도 안 되게 부끄럽네.”

“계속하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선율의 조율자. 계약 완료되었습니다. 그럼 안내하십시오.”

“좋아. 끝내주는 곡을 들려주지. 기대해.”

“기대하겠습니다.”


 오랜만의 재밌는 의뢰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트러즈는 자신의 작업실로 향하는 크리스를 따랐다. 자칭 전설의 작곡가의 입가엔 끝내주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