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꽝-
“형 왔었어? 인사를 하지.”
“니들은 형 온지도 모르고 게임하고 있었냐?”정침(안채)의 할아버지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촌동생과 육촌동생들이 자기들끼리 이불이란 이불은 다 꺼내서 바닥에 깔아놓고 게임을 하며 놀고 있다.
“자, 기상! 기상!”
나는 일부러 이불을 들푸적거리며 아이들의 게임을 방해했다.
“아, 뭔데~”
“자~ 지금부터 너희들도 별당 청소 작전에 동원되었다. 이따가 우리는 별당에 건너가서 자야 하니까, 다들 자기가 잘 자리는 자기가 청소하도록!”
“아아아아아~”
“다들 수고하네~ 과일 먹자~”
할머니가 배를 썰어 가져오셨다. 배를 아주 크게 크게 썰어놓으셨다. 배는 크게 썰어 입에 한가득 넣고 깨물 듯 오물거리는 게 제일 맛있다. 달달한 과즙이 입 안에서 물밀 듯 퍼질 때 가장 행복해질 수 있다. 청소하던 아이들도 대청으로 달려 나와 조그마한 입에 배를 욱여넣고 입이 터질 듯 오물거리고 있다. 아이들은 먹을 걸 주면 다들 정말 잘 먹는다. 정말 저 조그마한 몸뚱이에 어떻게 저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나도 저 나이 때 어떻게 그렇게 많이 먹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지금은 밥 한 공기도 겨우 먹는데.
연익당과 한락헌 사이에 심은 벚나무 잎이 바람에 날려 지고 있다. 바람이 한 번 불면 온 자연이 기지개를 켜듯 부산스럽게 깨어난다. 봄은 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어떠한 음악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하면서도 꽉 찬 느낌. 모든 것이 멈추었던 겨울이 끝나고 비로소 모든 것이 가장 먼저 깨어나 터뜨리는 숨이 하늘을 가득 메운다. 얼음장 아래 갇혀있던 물이 다시 흐르며 내는 소리, 새가 우는 소리, 그 중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가장 듣기 좋다. 바람에 벚꽃이 흩날리고 있고, 아이들은 서로 웃으며 이 멋진 집에서 뛰놀며, 나는 마루에서 그걸 보면서 약과와 녹차를 마시고 있다. 상상만 해도 정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풍경이다. 이럴 때면 정말 욕심이 없어진다. 인생이 딱 이만큼만 된다면 정말 행복한 게 아닌가. 그 많은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그 사이에 있는 풍경들을 놓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들을 놓치고 얻은 성공이 과연 놓친 것들에 비해서 값지다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서울에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복잡한 도시 안에서 살려고 발버둥을 친다.
8시가 되니 식구들이 속속 모여든다. 정말 이름도 다 외우기 어려운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서 밥을 먹다니, 무슨 폭력조직 단합회 내지는 학생식당 같다. 그 넓은 대청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건 역시 결혼식이나 장례식이다. 제사 지내는 날에 딸들은 오지 않고, 다른 자손들도 대부분 잘 참석하지 않아서 보통은 20명 정도가 모이는데, 결혼식은 일단 아는 식구들은 다 모이다 보니, 63명 식구가 거의 다 모이게 된다.
우리가 있는 이 지붕 아래의 큰 대청 건물은 오로지 식구들이 모이는 대청의 역할을 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대화당(大和堂). 크게 화목한 집이라는 뜻이다. 이곳도 감양헌 못지않게 풍광이 좋은 곳이다. 탁 트여 넓은 대청으로 쏟아지는 푸른 하늘이 찻잔에 비치는 공간.
“우리 호석이가 이번에 한 건 했다며? 축하한다.”
“그래서 내가 그때 막 달려가서 붙잡았더니...”
“형 그때 기억나? 스물일곱 때였나, 내가 그때 형 자취방에 들어갔더니 웬 여자랑~”
“어우~ 웬일이야!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냐?”
6.25 전쟁 때 이야기부터, 친척의 인생 강연, 회사 상사 뒷담화까지. 주제도 가지각색이다. 60명이 각자 다 한 마디씩 한다고 해보자. 이 집 지붕의 기와가 몇 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이미 몇 개 떨어졌을 것 같은데.
“증조할머니, 시끄럽고 정신없죠?”
나는 시끄러운 대청을 가로질러 증조할머니 옆에 붙었다. 다들 같은 항렬의 형제들끼리 이야기하느라 바빠서 정작 집안의 가장 웃어른인 증조할머니는 같이 말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시끄럽고 왁자지껄할 때면 그 속에서도 말도 못 붙이고 그냥 식탁에 앉아계신 증조할머니가 자꾸만 눈에 밟혀 이렇게 증조할머니 옆으로 와 찰싹 붙는 것이다.
“뭐라고?”
“증조할머니, 지금 시끄러워서 정신없죠?”
“몰라~ 하도 정신이 없어서 나 지금 멍 때리고 있어.”
“방에 가요. 가서 할머니 좋아하는 화투 쳐요.”
“잠깐만, 나 피 3점에 너는 피박...”
“그리고 할머니 흔드셨잖아요.”
“그랬지. 그러면 12점 아이가?”
“그렇죠.”
“그래. 돈 줘라.”
“할머니는 나이를 그렇게 잡수시고도 화투는 틀림이 없네요.”
“고럼. 내는 이제 머리는 잊어도 몸이 기억하는 수준이라 그래 쉽게 안 져~ 내가 화투를 쳐도 팔십 년을 쳤는데 고거 그래 쉽게 잊겠나. 몸이 기억을 하지. 아이고~ 우야꼬~ 내가 증손자 용돈을 줘야 되는 판인데, 되레 계속 따고 있네~ 아이, 고마하면 마이 땄다. 더 하다간 너 알거지 되게 생겼다. 크크크크큭.”
“내일 또 쳐요.”
“니 내한테 돈 다 잃고 무슨 돈으로 칠라카노? 크크크큭. 누구한테 돈 빌리라꼬 그러나?”
“내일은 맞고 말고 누나 껴서 해요. 오늘은 누나가 예원이 누나랑 노느라 바쁘네.”
고스톱에서 탈탈 털렸다. 승부의 세계란 냉정한 것. 증손자라고 봐주는 것도 없고, 증조할머니라고 봐주는 것도 없다. 그저 나이를 초월한 두 사람의 선수가 있을 뿐. 분명 증조할머니의 도발은 내일 또 하자는 표현인 것이다.
“아야야, 승원아.”
“네? 왜요?”
“이거 돈 줄 테니까 까까 사무라.”
“아이, 이거 할머니가 딴 돈이잖아요. 그리고 저는 이제 과자 잘 안 먹는데.”
“그라모 니 할배 방에 들어가 있는 머심아들 데꼬 나가서 과자라도 사주그래이. 알았제?”
“참 나...”
“아고고, 할망구는 오늘 돈도 많이 벌었겠다, 잠이 솔솔 온다~”
그러고 보니, 대청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어느 정도 멎었다. 대청으로 나가보니 몇몇 어른들을 제외하고는 자리에 뻗었거나 방에 들어간 것 같다. 물론 식탁은 치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야, 승원아. 그쪽 식탁 좀 들어라.”
어질러진 대청 풍경을 보고 넋을 잃은 나를 깨우는 엄마의 호출.
“누나는?”
“너희 당고모랑 예원이랑 일곱이서 시내 나갔어. 내일은 결혼식 전날이라 정신없을 테니까 오늘 마지막이다 하고 논대.”
“내일도 어차피 놀 텐데 뭘.”
종가에 밤이 내렸다. 아이들은 마피아 게임을 하고, 어른들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이 넓은 집의 모든 방에 불이 켜지는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참 씁쓸한 일이다. 이렇게 거대한 집을 짓고도 모두 도시로 떠나버려 남는 방만 한가득. 어쩌면 이런 것 따위는 아무리 지키고자 애를 써도 어차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