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른 아침,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하고 의아해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문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다. 후줄근한 정장차림에 지팡이, 중절모… 콧수염. 이게 누구신가, 찰리 채플린 아닌가! 다만, 그는 나와 같은 한국인이다. 적어도 외모는 그렇다. 그렇다면 그는 왜 어릿광대 흉내를 내면서 나를 찾아왔을까? 그는 중절모를 신사적으로 벗어들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예, 뭐. 안녕하세요. 저기,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저는 방문판매원입니다." 

그는 '무엇을 파는 방문판매원인가?' 하는 물음을 내 얼굴에서 읽었는지, 허리를 굽혀 옷매무새를 다듬는 동안 바닥에 잠시 내려놓았던 그의 검은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는 그 다음 질문, '그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는 질문도 내 얼굴에서 재빨리 읽어냈다. 그는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수다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게 아주 신통방통한 물건입니다. 일단 생김새를 보자면, 네모나고 가벼워 보이고… 어쨌거나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뺏으러 온 것은 아닙니다. 아니고 말고요. 그러니 중요한 것, 바로 이것의 긴요한 용도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요놈의 용도를 하나하나 일일이 다 말해보자면 당신과 저는 아마도 여기 서서 오늘 밤을 새야할 겁니다. "

"하지만..."

"아니,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십쇼. 제가 어디 한번 이 물건의 용도를 몇가지 소개해보겠습니다. 어디 보자… 가장 중요한 용도는 역시 이거죠. 당신은 이것으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만약 잘 사용하신다면 말이죠. 뿐만 아니라 운도 좋아야 하고요."

"그거야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은 이것으로 성을 쌓을 수도 있고, 이것을 자 대신에 쓸 수도 있습니다. 간단한 필기도구만 있다면 메모장으로도 쓸 수 있고, 메모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갈가리 찢어버릴수도 있습니다. 책갈피로도 유용하겠고, 아, 책갈피로 쓴다는 것은 방금 생각해낸 것인데 쓸만하겠군요. 그리고, 어쩌면 이것으로 마술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도 돈을 벌 수 있겠군요, 자신의 운을 시험하는 것 보다야 확실하고 떳떳한 방법이죠. 자, 이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되었겠지요?"

나는 그의 뻔뻔함에 압도되어 잠시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그건 그저 평범한 트럼프 카드가 아닙니까?"

"예, 그건 사실이지요. 그래서 사시겠습니까, 사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의 뻔뻔함이 마음에 들었다. 모름지기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은 뻔뻔해야 사랑받는 법이다. 만약 누군가 이 사람을 장사꾼이 아닌 사기꾼이라 부른다면, 나는 그자가 장사의 장자도 모르는 인간이라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사겠습니다. 얼마입니까?"

터무니 없는 자신감, 뻔뻔함.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인 것이다.

2.

나는 꿈을 꾸었나보다. 그 전날 새벽에 본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퍽 인상깊었기 때문에 그런 괴상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나는 여느때보다 일찍 일어났다. 꿈에서 그랬듯이. 하지만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다. 여느때 그랬듯이. 나는 다시 드러누워 간밤에 꾸었던 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찰리 채플린,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그 뻔뻔함은 우습지 않았다. 어젯밤 꿈에 나타난 찰리 채플린은 광대가 아니라 장사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훌륭한 장사꾼. 좋아, 오늘 나는 찰리 채플린이 되겠다.

나는 욕실에 가서 양치를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뒤에, 거울을 향해 최대한 익살스럽게 웃어보았다. 만족스럽군. 그 다음, 나는 옷장 앞에서 입고 나갈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티셔츠가 눈에 띄었다. 작년, 여자친구가 내게 장난스럽게 선물해주었던 옷이었다. 인기있는 개그맨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옷인데, 그녀도 장난으로 고른 선물이었기에 내게 입기를 강요하진 않았다. 그래, 옷은 이거다. 그렇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옷을 입고 집을 나선 뒤에, 나는 먼저 꽃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이들 몇몇이 내 옷을 보고 낄낄거렸다. 나는 더욱 힘차게 걸었다. 그리고 장미 꽃다발을 샀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녀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분명 좋아할 것이다. 여자는 다들 꽃을 좋아하니까. 뻔뻔한 고정관념,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용기일 뿐이다. 

나는 그녀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틀전, 나와 크게 다툰 뒤로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곰곰이 따져보니 내 잘못이었다. 그러니 찰리 채플린은 그녀에게 사과해야한다. 그리고 사과란 찡그린, 울먹이는 표정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찰리 채플린은 멋쩍게 웃으며 사과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꽃을 내밀며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 아니다, 찰리 채플린은 목소리가 없다. 내가 연출하려고 하는 것은 무성영화다. 그저 익살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익살이란 뻔뻔함의 다른 표현이다.

나는 그녀의 집 문 앞에서 꽃을 들고 한참 서성였다. 아뿔싸, 뻔뻔함이 부족했구나.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녀는 분명 나를 화난 표정으로 째려볼 것이다. 그러면 나의 같잖은 뻔뻔함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면 안되지. 나는 괜히 휘파람을 불었다. 용기가 조금 생기는 것도 같았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 티셔츠를 보더니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왔어?"

대답하는 대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든 두 손을 그녀를 향해 뻗은 채로, 최대한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문 뒤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그녀는 문 너머로 이렇게 말했다.

"꽃은 거기 문앞에 놓고 가..."

요컨대, 사랑에도 장사의 법칙이란 것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용서를 구하려는 자는 뻔뻔해져야한다는 것이다. 뻔뻔한 자가 사랑을 얻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