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눈보라가 불고 집 안에 모닥불을 태우고 모든 사람들이 잠들던 밤. 마을 한가운데에 화려한 장식이 달린 나무재질의 신전의 지하 서재에는 머리가 거의 벗겨진 한 중년 사제만이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 사제 '에릭 오드본슨'은 오른쪽 검지 손가락에 룬 문자가 새겨진 반지를 낀 채 지금껏 자신이 30년동안 사제로 지내면서 신들을 섬기고 시인들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세상의 이야기들을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해왔었다. 그런 그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오른손에 여러 개의 칼자국이 나있는데도 필사적으로 목판을 들고 칼로 무언가를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 동료들과 대제사장 몰래 만들어준 비밀 바닥 아래를 흘깃 보다가 뒤를 종종 돌아보았다.


대체 무엇이 그가 동료들한테 숨길 정도로 비밀 바닥을 만들고 집념을 태우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에릭은 온 힘을 다하면서 목판을 기록하다가 촛불이 다 꺼지자 주변이 어두워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목판의 내용을 마저쓰기 위해 남아있던 양초를 쓰려고했지만 이내 양초가 다 떨어진 걸 알았다. 결국 그는 양초를 다시 구하러가기 위해 촛대를 들고 비밀 바닥에 목판들을 집어넣고 타일을 덥고는 지하 서재의 문을 열고 벗어났다.


오랜 시간 끝에 어둠 속을 헤매던 그는 오른속에 촛대를 들면서 책상 옆에 섰다. 그리고는 바닥을 천천히 발로 두들기다가 텅빈 소리가 나자 곧 비밀 바닥의 타일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바닥에 숨겨진 목판들을 차례대로 꺼내기위해 촛대를 옆에 두고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오른손의 약지의 반지가 촛불에 반짝거리면서 조그마하게 비추었다.


- 끼이이잉 -


- 덜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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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에릭 오드본슨. 나는 저명한 사제 집안의 장자로서 철들자마자 바로 사제 수업을 받고 신들을 섬겨온 사제다.


만약 당신이 이 목판의 내용을 보게 된다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죽더라도 어차피 아스가르드하고 발할라, 헬헤임 세 곳중 한 세계에 떨어져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텐데 왜 염세를 드러내는 것이냐하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스가르드와 발할라는 물론 여왕 헬이 다스리는 헬헤임조차도 가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난 이 세계의 알지 말아야할 것을 알고 말았기 때문이다.


30년동안 에시르 신들을 섬기면서 이 세상이 창조된 경위와 여러가지 사건들이 담긴 목판이 썩기 전에 옮겨적는 일을 해왔었다. 난 특별히 룬 문자를 배울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날 때마다 목판 안에 새겨진 내용들을 읽곤 했다. 오딘과 그의 형제가 이미르의 시신으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사건에서부터 대멸망 라그나로크의 원흉으로 지목받은 로키의 세 자식, 그리고 발드르의 죽음까지도. 그 밖에도 여러 영웅들의 이야기와 토르의 일화외에도 다른 이야기를 읽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 목판에다 내용을 옮겨 적던 중에 모순을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그 부분을 대수롭지않게 무시했었다. 어차피 선대 사제들이 목판에 옮겨 적던 과정에서 오타를 내거나 시인들의 말이 엉키는 바람에 난 거라고. 하지만 그 목판들을 옮겨 새기던 과정에 더 많은 모순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말이 맞지 않거나 혹은 있을 수 없는 일, 심지어 아예 적혀지지 않은 일들이 일곱 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난 이 모순들을 적기 시작했다.


- 덜그럭 -


첫 번째는 바니르 신족의 일원이자 황금의 여신인 굴베이그에 관한 것이다.


오딘과 그 두 형제가 이미르의 시체로부터 만든 세계는 처음부터 순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뒤이어 만들어진 인간들도 욕심은 커녕 순수한 존재였었다고 한다. 그런 세상과 인간들한테 굴베이그는 황금을 퍼트려서 그들을 욕심에 빠트리게 만들고 서로를 죽이게금 만들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에시르 신족의 황금까지 노리자 이에 신들의 분노를 사고 세번이나 죽임을 당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번이나 부활하고 그들을 조롱한 것도 모자라 바니르 신족과 에시르 신족의 전쟁을 일어나게 만들었다.


냉정하게 분석을 하면 굴베이그는 이 세상을 오염시키게 만든 원흉이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는 능력은 오딘한테 위협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능력으로 니플헤임에서 수많은 룬 마법을 배워두거나 쌓아진 지식들을 흡수한다면 로키의 세 자식 이상으로 오딘한테 더 큰 위협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굴베이그를 죽이거나 혹은 봉인하거나 해야했다. 그런데 어째서 오딘은 왜 그녀를 내버려둔 것일까. 그녀와 무슨 거래를 했었던 것일까.


그리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덜그럭 -


두번째는 모든 세상을 파괴하려는 불의 거인 수르트에 관한 것이다.


그 누구도 수르트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모르고 있다. 심지어 모든 지식을 배우고 습득한 오딘조차도 그 기원을 모르고 있다. 수르트는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존재를 해왔다는 것만 빼면 누구도 알수 없었다. 그 거인은 라그나로크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어떻게 세상이 태어난다는 것을 인지하고 파괴하려고 하는 것일까. 따지고보면 니플헤임도 하나의 세계인데 어째서 그때부터 파괴하려 들지 않았던 것인가. 그리고 오딘을 비롯한 모든 신들도 무스펠헤임의 영역에는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로 매우 뜨거운 곳이다. 그렇다는 건 오딘도 그들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죽일 수 없기에 피해를 주지도 원한을 품을 이유도 없을텐데 왜 세상을 파괴하려는걸까. 단지 세상이 시끄러워져서 그런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운명때문이었던 것인가.


- 덜컥 -


세번째는 암소 아우둠라에 관한 것이다.


아우둠라는 이미르에 이어서 무스펠하임의 열기와 니플헤임의 냉기에 합쳐져 태어난 거대한 암소다. 그 암소는 이미르한테 젖을 줄 정도로 강대한 생명력이 담긴 젖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소금기가 든 얼음을 햝아먹다가 그곳에서 최초의 신 부리가 태어났다. 부리는 보르를 낳고 보르는 오딘을 낳아 신족을 탄생시켰다. 사실은 부리가 소금기가 든 얼음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아우둠라로 인해 얼음과 결합해서 태어난 것이라고 본다. 그 증거로서 잠만 자고 있었던 이미르는 아우둠라의 젖을 먹자마자 곧 자신의 땀으로 거인들을 무의식적으로 창조하였다고 한다.


단순한 추측이었지만 잘 생각하자면 이미르가 잠에 취하다가 거인들을 창조한 것도 어떻게 보면 아우둠라의 생명력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미르가 살해당한 이후의 아우둠라는 니플헤임에 떠돌아다니고 있는지 그 이후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장난삼아 모든 것을 보았다는 무당을 만나서 아우둠라는 어디에 있냐고 물어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대답은 뜻밖에도 아우둠라는 없었다고 한다. 이미르처럼 덩치가 큰 그 암소라면 니플헤임에서도 음영이나마 환히 보일텐데.


그럼 아우둠라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덜컥 -


네번째는 로키의 세 자식에 관한 것이다.


말했듯이 거인이면서 불의 신인 로키는 거인 앙그르보다사이에 태어난 세 자식을 두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에시르 신들은 운명의 세 여신으로부터 로키의 세 자식이 라그나로크 때 신들과 대적한다는 예언을 듣고 부모한테 떼어내고 자기들 앞에 끌고 온 다음 각자 다른 곳에 봉인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도 모순을 발견하였다.

 

라그나로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세 자식을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에 끌고가 죽였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들은 그걸 알면서도 세 자식을 죽이지않고 봉인하는데만 그쳤다. 만약 그 아이들을 죽일 때 그 주변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이 있었어야 했는데 전국의 신전에 기록된 목판과 시인들, 심지어 저명한 예언가들한테도 그 말을 들을수도 찾지도 못했다.

 

멸망을 막아야한다면서 죽이지않는 모순은 무엇인가. 그리고 앙그르보다는 왜 로키한테 심장이 뽑히고 먹혔던가?

 

- 덜컥 -


다섯번째는 프레이의 검이다.

 

한 때 바니르 신족이자 에시르의 일원인 프레이의 검이 만들어진 기원은 거인족을 이기기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불의 거인인 수르트를 이길 수도 있을 정도로 스스로 싸워 죽일 수 있다고 전해졌다.

 

이상했다. 단 한번도 무스펠하임에 가지도 보지도 못했으니 이들의 약점을 완벽히 아는 것이 아닌게 정확하지않은가? 불의 거인들의 약점이 다른 거인들과 비슷하다고 단정할 수 없을텐데? 오딘이 미미르의 샘에서 알아냈다고 하기에는 그 구절도 존재치도 않았다.

 

그럼 누가 스스로 싸우는 검의 아이디어를 제공해주고 프레이한테 무기로 준 걸까?

 

- 덜컥 -

 

여섯번째는 라그나로크 이후의 예언이다.


모든 것의 종말인 라그나로크를 예언한 그 무녀가 말하길 오딘은 글레이프니르에서 풀려난 펜리르한테 살해당하고, 그 펜리르는 오딘의 아들 비다르한테 살해당한다. 토르는 모든 세계를 감싸는 요르문간드와 대결하면서 이기지만 그 독의 영향으로 끝내 죽는다. 티르는 여왕 헬의 영토를 지키는 사냥개 가름과 동귀어진, 신들의 파수꾼 헤임달과 로키도 서로 동귀어진을 한다. 그리고 스스로 싸우는 검을 잃어버린 프레이는 마지막으로 수르트한테 살해당한다. 이후 수르트는 자신의 무기 레바테인을 들고 세계수를 불태우고 세계를 파괴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발드르가 부활하여 세상을 복원한다. 이것이 대무녀가 말한 라그나로크의 예언이다.


하지만 예언은 완벽하게 맞출 수는 없었다. 보통 예언은 일이 일어나면 그 식대로 해석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라그나로크를 예언한 그 무녀는 어떻게 그 일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걸까? 직접 그 현장을 본 사람이 아니면 설령 신이라도 자세하게 예언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경이 쓰이는 것은 덕 있는 자들이 니다푤에 가서 산다고 한다. 어째서... 헬이 지배하는 영역에 왜 덕이 많은 자들이 살게 되는 것이지? 아니. 그보다 라그나로크를 예언한 그 무녀는...


정녕 사람인것인가? 신? 그것도 아니면...


- 덜컥 -


마지막 일곱번째는 이미르.


무스펠하임의 열기와 니플헤임의 냉기가 합치면서 태어난 태초의 거인 이미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육체를 가진 그 거인은 무의식적으로 거인들을 창조하면서 잠을 자왔다.


난 이 기록을 보고 결정적으로 내가 느껴왔던 위화감의 정체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오딘과 그의 두 형제의 힘만으로도 거인들을 상대하기도 벅찼을 것이다. 그리고 강한 힘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 수많은 거인들과 이미르를 상대로 정면으로 이기는 것도 기습적으로 공격해도 죽이는 것은 힘들다. 결정적으로 이미르는 잠을 많이 잤다고는 해도 그의 곁에는 거인들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딘과 그 형제들은 어떻게 이미르가 잠들어있는 틈을 발견하고 죽이는 데 성공했을까?


- 덜컥 -


나는 이 수많은 모순들 중에서 제일 결정적인 일곱개의 모순들을 정리하였고 또 정리하였다. 그 이외에도 다른 전승이 남아있는 목판들을 찾아다니고 정리하면서 내가 발견했던 모순들이 있는지 대조를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 전승들에 대한 목판도 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신들의 모순된 행동의 원인과 수르트가 세상을 파괴하려는 이유 그 어느 것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아버렸다. 나 이외에도 지금껏 전해내려오는 일화들의 모순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알아낸 사람들의 영혼이 응답을 하지도 않고 부활의 룬 마법을 써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치 이 세상에서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처럼.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기이하고 맞아떨어졌다. 결정적으로 나의 스승이었던 하랄드도 화재가 일어나던 날 방 안에 홀로 아사한 채로 발견된 사실도. 왜냐하면 주변에는 식량이 가득했는데 굶어죽었다니.


그래서 나는 동료들한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한테 비밀로 하고 이 내용을 적게 되었다. 나는 이 수많은 모순들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여러가지 추론을 하고 또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단 하나의 결론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누구도 진실을 밝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라그나로크는 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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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게 다야? 그러니까 결론이 뭐길래 그런거야?"


차례대로 목판을 읽고 있던 남자는 찰랑거리는 붉은 포니테일을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곱상한 피부를 한 그 남자는 라그나로크에 관한 말을 읽으려던 순간에 끊길 걸 알고는 상당히 실망한 표정을 지어내었다.


"그 아저씨도 참. 죽는 걸 알고 있었으면 결론부터 말했어야지. 이미 세상이 망해버린 후에는 누가 읽지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그 청년은 이왕이면 한번에 사실을 알려주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에 불평을 놓았다. 그리고는 지하 서재의 바닥에서 머리를 도끼에 맞은 채 서늘한 미이라로 변해버린 그 사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그 붉은 포니 테일의 청년은 그가 발견한 모순점이 담긴 목판들이 흥미로웠는지 기묘한 무늬를 띈 반지를 낀 오른손에 든 작은 배낭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 목판들을 하나둘씩 담아내고는 그 신전에서 빠져나왔다. 밖은 폐허가 되고 잿더미만 남은 집들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한손에 불을 키고는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후우. 니드호그하고 흐레스벨그가 서로 싸우는 것만 봐도 즐거웠는데 이제 말짱 다 탔으니 재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목판들이 타지않게 조심히 들고 다니면서 중얼거렸다. 한 때 그 즐거웠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내었다.


"그런데 앞으로 내가 더 흥미를 가질만한 유희감이 생겼네. 그럼 가볼까?"


그렇게 새로운 유희감을 찾아냈다고 기뻐한 붉은 포니테일의 청년은 마을 가까이 옆에 파묻혀진 무언가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렇게 잿더미가 날아갈 때 그의 모습도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