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빨강색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빨간색은 너무 짙다. 내 몸에 흐르는 피가 어떤 동물들처럼 파란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예전만큼 싫지는 않은데 그건 불타는 소년을 만났던 덕분이었다.


 그 애를 처음 본 건 지하철 3호선 열차 안에서였는데 그 때 그 애는 말 그대로 머리 전체에 불이 붙은 채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발견했을 때는 거의 열차 칸 반대편에 있었는데도 열기가 전해져 올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년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알고는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소년의 얼굴은 새까맣게 탄 숯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목부터는 평범하게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푸른색과 하얀색이 조합된 유니폼으로 학교 축구복 쯤 되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문이 닫히고 역 하나가 지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이내 내가 빤히 보고 있는 걸 느꼈는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활활 타오르는 소년이 가까이 오면 화상이라도 입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다행히 열기는 멀리 있었을 때와 별반 차이나지 않았다.


 가까이 온 소년이 말했다.

 

 “이모. 이모는 내가 활활 타오르는 게 보여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소년은 -여전히 이목구비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돌려 창밖의 흘러가는 풍경을 쳐다봤다. 마침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온 터라 차창으로 거의 다 저물어가는 도심의 풍경이 보였다. 노을은 그날따라 이상하리만치 짙어서 꼭 누군가의 몸에 있던 피가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싫어하는 빨강 중에 하나였다. 갓 자른 석류 색깔보다도 짙다.

 

 불타오르는 소년이 말했다.


 “활활 타오르고 있어요. ...이제 곧 전부 끝날 거예요.”

 “뭐가?”
 “목숨이요.”


 나는 그가 말하는 목숨이 자기 자신의 것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세상사람 모두의 것을 말하는 건 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의 어조는 어쨌든 마치 내일 오전은 흐릴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그리고 어느 쪽의 의미든 간에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모두 금세 끝날 것이다.

소년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차창 밖을 어두워질 때까지 쳐다봤다. ...사실 어두워진 건 열차가 다시 지하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볼 게 없어진 우리는 다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젠 소년이 내뿜는 불빛에도 좀 익숙해진 내가 물어봤다.

“어디서 내리니?”



 소년이 내린 역은 근교였지만 경제지리적인 이유로 약간 도외지 같은, 대도시에는 좀 맞지 않는 낡은 간판과 낡은 가게들 그리고 어두컴컴한 좁은 도로가 이어지는 지역이었다. 듬성듬성 가게 문이 잠겨있어 을씨년스러웠지만 옆에서 소년의 얼굴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나는 불 켜진 작은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와 하나는 건네주고 나도 하나 물고서 함께 걸어갔다. 소년은 열기 때문에 금방 녹아 뚝뚝 떨어지는 아이스크림을 잘도 입에 물고서 한 걸음 정도 앞장 서 걸어갔다.


 “여기예요.”

 
 소년이 멈춰선 곳은 낡은 2층 건물이었는데 아래쪽엔 셔터가 닫혀 있었고 위층에는 창문이 몇 군데 비어있어 언뜻 봐도 사람이 살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옅고 붉게 비쳐 보이는 외벽에는 아직 불 탄 흔적이 조금 남아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그 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가 불을 질렀어요. 뭣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나 때문인 것도 조금 있는 것 같아요. 죽은 후에는 함께 죽은 사람과 몇 년을 더 같이 보내야 돼요. 엄마랑 둘이 같이 살기는 조금 싫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아빠는?”

 
 소년은 불타는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본 적 없어요.”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화상을 입을 것 같아서 그러진 못했다. 그러지 않은 건 실제로 다행이었는데, 불길이 거세지더니 머리 뿐 아니라 소년의 몸 전체를 뒤덮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돌아갈거니?”

 

“네.” 소년은 말했다. “늦었으니까요.”

 

나는 그의 푸른색 상의가 천천히 타들어가는 걸 보다가 말했다.

 

“축구는 한 적이 없나보구나.”

 

 소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돈이 없었거든요.”


 돌아갈 때는, 본질적으로 속하지 않은 것들은 사라진다. 소년은 아마 제대로 축구를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미련은 있니?”


 “아니요. 그냥 학교 끝나고 운동장에서 몇 번 본 것 뿐이예요.


 나는 속으로 소년이 본 그 풍경도 해질녘이어서 빨강색이 뒤덮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말했다. “아이스크림 하나 더 사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소년은 웃었다. 내 인상이었다. “천국엔 아이스크림 많아요.”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구나.”

 

 이윽고 소년의 몸은 완전히 불길로 뒤덮여 활활 타올랐다. 그의 불빛이 어두운 유리창에 비쳐 일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열기와 강한 불빛 때문에 몇 걸음 물러섰다. 그래도 완전히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소년이 불길 속에서 까만 형체로 보이는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고마워요, 이모. 아이스크림 사줘서 고마워요.”


 “그래.” 나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다른 손을 흔들면서 외쳤다.


 “근데 사실 아직 이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데!”


 소년은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곧 잿더미가 되어서 사라졌다. 돌아갔다, 라고 적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진 것을 적응하려고 눈을 한동안 깜빡여야 했다.


 휴대폰을 켜보자 어느새 시간은 막차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런류의 경험들은 언제나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문제였다. 익숙해져버려서 그렇게 신경 쓰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가 끊기면 드는 택시비는 문제였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다가 소년이 불타죽은 건물을 한 번 돌아봤지만 이제 그곳엔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붉은색이 싫다. 지금도 몸속에서 흐르는 이 섬짓한 붉은색은 우리 모두를 태우고 소모하고 모두를 데려갈 테니까. 하지만 그 소년은 활활 타오르면서도 마음이 무뎌지지도 혼자 스러지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그 애가 인정한 자신의 불길은 좋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아마 이렇게 생각한다. 여전히 붉은색은 싫어하지만, 나도 결국 그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처럼, 빨강을 좋아하게 되고 긍정하게 되는 그런 과정 속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문득문득 운동장에 서 있는 축구복의 소년을 떠올리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