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방패의 전설 모음집(계속 업데이트) - 창작문학 채널 (arca.live)

----------------

24화, 이라


일주일이 지났다. 아인은 정령군주와의 싸움에서 뼈가 무려 12군데나 부러졌지만-비록 빛의 힘이 도왔으나- 놀라운 회복력으로 이제는 몸을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인이 마누엘의 가족에게 임시 제공된 천막 앞에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때, 마누엘이 다가왔다.


“뭐하나?”


“마누엘 씨.”


마누엘은 아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참 신기하지 않나? 믿고 지내던 인물이 사실은 적이었다니. 자네가 위르겐 씨… 아니, 위르겐을 믿었던 만큼 나도 그를 매우 신뢰했었네. 그 놈이 용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


마누엘은 무너진 집 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가족들은 아무도 죽지 않아 다행이야. 자네의 동료들 덕분에 살았네. 집이야 무너졌지만 고치면 될 일 아닌가.”


“아직 ‘이라’에 대한 소식은 없나요?”


“성문의 경비병들이 놈을 마지막으로 봤으니 그 말을 토대로 수색 중이네. 이 땅은 여기서 천년 넘게 살아온 우리 조차도 모르는 곳이 많아. 조금만 길에서 떨어져도 용암 강 위를 덮고 있던 화산재를 밟아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지. 북동쪽으로 날아갔다는 것 이외에는 아직 별 소득이 없어.”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지금 상황이 그저 용이 어딘가로 도망쳤다는 소식이었다면 다른 지역에서 소식이 들려오기까지 여유롭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은 한시라도 빨리 그를 찾아 목을 배어버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남긴 유일한 유품인 방패를 하루빨리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아인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인, 그때 그 빛은 뭔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벽에 난 자국만 아니라면 정신이 반쯤 무너진 상황에서 본 환상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인은 멀리 벽을 바라보았다. 그날 정령군주와의 싸움에서 아인과 아인의 칼이 일으킨 수수께끼의 힘은 정령군주를 단번에 배어버릴 뿐 아니라 반대편 벽에도 긴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그 빛의 정체는 아인뿐만 아니라 고문서를 수 없이 읽었을 마리와 잔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학자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용을 만나갈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나고 있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지?’


그 순간, 부상을 입은 병사가 나타났다. 그는 몸 전체에 화상을 입고 반쯤 죽어가고 있었다.


“놈을… 찾았습니다… 북동쪽… 푸른 절벽에…”


단 한마디만을 남기고 병사는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누엘은 조용히 병사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가세나, 이제 행동해야 할 시간일세.”


이틀 후, ‘이라’를 잡기 위한 군대가 만들어졌다. 일반적인 기병과 궁병, 사제들로 이루어진(드위프 군에는 마법사가 없다.)부대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아인과 마누엘의 건의로 손대포를 든 병사 30명이 더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마누엘이 지휘하는 병사 5000명이 출정하게 되었다. 화염의 산에서 푸른 절벽까지는 닦여진 길이 없기에 모든 병사들이 말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서식하는 불 도마뱀을 타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이 생명체에 익숙한 듯했지만 아인과 잔, 마리는 말과는 전혀 다른 흔들림 때문에 적응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지에서 올라오는 열기 또한 셋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듯했다. 아인이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5시간 정도는 가야 하네.”


마누엘의 말에 아인은 한숨을 쉬었다.


“왜 그곳을 푸른 절벽이라 부르는 지 아나? 그곳이 엘프들의 영토와 우리 드워프들의 영토를 가르는 경계이기 때문이지. 원래 영원한 불의 땅은 산맥을 경계로 북쪽은 습지이고 남쪽은 평원이 펼쳐진 풍족한 지역이었지, 그러나 300년 전 거인들이 모든 것을 망쳐 놓았어.”


아인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을 이어가는 마누엘을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벌써 말을 끊었겠지만 너무 더운 나머지 그럴 기운도 없었다.


“화염의 거인들이 이 대지를 휘저어 놓았지. 물과 그곳의 생명이 가득하던 깊은 늪은 용암이 흐르는 용암 늪이 되었고 말과 소들이 뛰어 놀던 대평원은 이젠 재의 평원이 되어 있다네. 그곳의 수많은 생명들도 사라졌어. 오로지 이 불 도마뱀 만이 변한 환경에 적응해서 살고 있지. 그날 이후로도 300년을 살아온 우리 드워프들 조차도 길이 놓여있지 않은 곳은 그 이전의 지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네.”


그때, 앞서 나아가던 정찰병이 다가왔다.


“사령관 님. 푸른 절벽 아래에 ‘이라’가 있습니다.”


“얼마나 남았는가?”


“앞으로 30분 정도입니다.”


“지도보다 더 가까이 있었군. 전군 전투준비! 놈이 가까이에 있다!”


마누엘의 말 한마디에 전군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몇 분 후, 모두의 시야에 높은 절벽이 들어왔다. 화염의 힘이 닿다 끊겨 절벽의 중간부분을 경계로 위는 초목이 우거져 있었지만 아래는 회색 바위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야말로 푸른 절벽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위르겐 마테우스, ‘이라’가 있었다. 날개를 접은 채 가만히 앉아있는 그는 군대가 다가온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최대한 조용히 그의 근처까지 다가온 군대가 그에게 일격을 날릴 준비를 마치자 마누엘은 손을 높이 들었다가 그대로 내렸다. 

그와 동시에 수백 개의 석궁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하고, 그 중 일부가 날개에 박히자 그 고통에 마침내 ‘이라’가 눈을 떴다. ‘이라’가 금방 잠에서 깬 듯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그 틈을 타 아인이 그에게 칼을 박아 넣으려는 순간, 또 다시 천지를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났다. 아인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주저앉았고 화살을 쏘던 석궁병들도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이라’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패도 없는 주제에 겁 없이 나에게 왔구나. 게다가 용케 정령군주를 쓰러뜨렸군.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이제 나에게 죽을 차례다!”


‘이라’의 입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마누엘의 군대는 빠르게 산개하여 공격을 피했다.


“위치로! 훈련받은 대로 해라!”


마누엘의 명령에 30명의 손대포를 든 병사들이 3열 횡대로 서더니 가장 앞줄이 ‘이라’를 손대포로 겨누고 그대로 발사했다. 예상대로 10발 전부가 빗나가 버렸다.


“2열 발사!”


명령과 함께 2열이 ‘이라’에게 손대포를 발사했고 2발이 ‘이라’의 뿔과 옆구리에 명중했다. 놀랍게도, 아인의 무기를 제외한 그 어떠한 것도 뚫을 수 없었던 용의 가죽이 탄약에 의해 상처가 났다. 옆구리의 가죽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던 것이다. 그것을 본 모든 병사들이 환호하며 사기가 올랐고 반면 ‘이라’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3열 발사!”


3열이 그대로 손대포를 발사했다.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이라’가 회피해버렸다. 하지만 ‘이라’의 표정에서 처음 느껴보는 듯한 당혹감을 볼 수 있었다.


“아인! 역시 우리 생각이 맞았네!”


마누엘 말에 아인도 화답했다.


“마누엘 씨 덕분입니다.”


며칠 전, 손대포의 효율적인 사용을 고민하던 둘은 일정한 수의 병사들을 세워 교대로 발사하고 다른 줄이 발사하는 동안 장전하는 전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덕분에 명중률이 낮은 손대포의 명중률을 어느 정도 높일 수 있었으며 빠른 사격 또한 가능해졌다.


“전군 발사! 놈을 쓰러뜨리자!”


마누엘의 명령에 다시 석궁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손대포도 교대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라’는 최대한 회피하며 기회를 노렸으나 결국 배와 머리에 6발의 탄알을 맞고는 그대로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인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라’가 떨어지며 흘린 자신의 방패를 챙긴 후 칼을 들어 그의 목을 배려는 순간… ‘이라’가 여태까지 들을 수 없었던 끔찍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땅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흔들리더니 아인을 비롯한 모든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절벽에 금이 가며 돌덩이들과 나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몇 병사들이 떨어지는 잔해들에 깔리거나 바닥을 구르는 등 혼란에 빠지자 ‘이라’는 다시 날개를 펴 날아올랐다.


“걸렸구나! 네놈들은 나의 함정에 걸린 것이다! 저 아래로 추락해라!”


그러자 아인의 발 밑의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은 순식간에 발을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넓어지고, 아인은 가까스로 벽의 틈을 잡고 매달렸다. 균열은 점점 더 커지더니 병사들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몸을 가누지 못하던 병사들 몇이 틈새로 추락하고, 그렇지 않은 병사들도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그나마 잔과 마누엘이 흔들림 속에서 떨어지는 병사들을 구하고 있었다.


“다른 것들은 필요 없다! 네놈만 죽는다면 우리가 승리다! 이대로 죽어라!”


‘이라’가 입을 벌려 아인을 끝장내려는 순간, 균열의 저 아래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순식간에 붉은 빛의 무언가 균열 아래에서 뛰쳐나왔다. 그것은 순식간에 탄환에 의해 상처가 난 ‘이라’의 가죽 속으로 들어가더니 그의 육신을 헤집어 놓기 시작하였다. ‘이라’가 고통에 날뛰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진동이 멈추고 아인은 다시 땅 위로 기어올라왔다. ‘이라’는 미친 듯이 날뛰며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무언가를 내쫓으려 했으나 세찬 강물을 손으로 막는 것만큼이나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이라’의 육신이 갈라지며 그 틈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짧은 단말마와 함께 ‘이라’의 육신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가 방금 전까지 있던 자리에서는 시뻘건 용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아인은 방금 ‘이라’의 몸 속으로 들어간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불의 정령군주였다. 용암더미에서 정령군주가 나오자 아인은 그에게 칼을 겨누었다.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그는 마치 아인을 비웃듯이 캘캘거렸다.


“정령은 죽지 않아, 육신이 소멸해도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지. 그리고 나는 너희들에게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나를 속인 놈을 벌하러 왔을 뿐, 이제는 쉬고 싶다.”


그는 순식간에 균열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아인은 그가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다 반쯤 녹아버린 ‘이라’의 두개골을 들고 본진에 합류했다.

 -----------

총알 박히면 꼼짝도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