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그래, 이게 '그거' 야."


노골적으로 귀찮음을 드러내며 한 소녀가 소년의 질문에 대답했다.

현실이었다면 중학생... 아니, 고등학생 정도 되는 나이일까.

소년은 가만히 성물을 내려다 보았다.

인류의 적을 수없이 처단해 왔다는 이 성물.

그 전설 상의 위용에 맞지 않는 투박한 디자인에, 소년은 어딘가 기묘함마저 느꼈다.


"그렇게 무겁지는 않네."


치켜 든 성물은

흡사 창을 연상케 하는 기다란 손잡이와

본 목적을 다하는 부분인 끝 부분, 스피어헤드로 나뉘어져 있었다.


먼저 소년이 눈을 둔 곳은 모서리 부분.

스피어 헤드 부분에는 보통의 창과는 달리 날이 서린 매서움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비를 강조하듯 반구의 모습이 돋보였을 뿐.

반구에는 단단한 강철을 대신하여 튼튼하고 부러지지 않지만 가벼운 소재가 쓰였다.

금속보다는 가죽과 비슷한 느낌이다.


"도중에 부숴지지는 않겠지?"

"안 그래."


한참 끝 부분을 감상하던 소년이 눈길을 돌렸다.

자루 부분이었다.


길이는 50cm 정도 될까.

얇고 긴 원기둥 형태로 된 손잡이는 한 손으로 잡기에 적당한 두께였다.

은백색으로 표표히 빛나는 그 모습에서는 달리 대단한 장식이 붙은 것도 아닌데 특유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아무런 장식도 안 붙은 것은 아니었다.


반투명하고 얇은 무언가의 조각이 붙어 있었다.

천이나 비단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 아직도 안 뗐구나."

"그래."


여전히 설렁설렁 대답하고 있는 소녀.

소년은 천을 닮은 그 장식을 매만졌다.

추억이 어린 그윽한 눈으로.


소년의 눈에 지난 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무기와 함께 넘어온 시련들, 그리고 시간들.

돌아가라면 싫지만 잊을 수는 없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눈앞의 [악] 을 쳐다보았다.

[악] 은, 마왕은 위엄 있는 모습으로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손끝 하나 까딱 않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은 마치, 소년 따위는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여유롭게 기다려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성검을 들어라 용사여. 어디 한번 들어보아라.


소년의 귀에 어렴풋한 환청이 들렸다.

마왕의 위압감이 빚어낸 환각이다.

소년은 자신의 나약함을 한번 비웃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


소년의 신조였다.

신조였을 터다.

그런데 뚜껑을 열기도 전에 상대에게서 흘러나오는 아우라에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다니.
환각을 들을 정도로까지 겁을 집어먹다니.


소년은 성물을 뒤로 한 채 다시 마왕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마왕의 위엄은 굉장했다.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음에도 느껴지는 그 포스는 어쩌면 오히려 부동의 자세이기에 풍길 수 있는 위압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해야하는 거야?"


그래서였다.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음에도

또다시 흔들리던 것은.


"오빠."


소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계속해서 흔들리는 의지에, 소녀는 짜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오빠가 해야지."


마왕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소년의 공포는 짐작하지만

소년이 걷기로 한 길이다.

소녀가 말을 차갑게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도 있었다.


"오빠가 한다며."

"그치만..."

"눈 돌리지 말고 똑바로 봐."


다소 작위적인 말을 섞어가면서까지

소녀는 소년을 재촉한다.


"저게 오빠가 만들어낸 거야."


사실이 그랬다.

마왕의 존재는 소년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


몰랐지.

소년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무슨 변명이 된단 말인가.


기실 인간의 적으로까지 자란 버린 지금,

그것이 무슨 변명이 된단 말인가.


원래의 동기야 어쨌건 소년은 마왕을 만들었고

이제 그는 마왕을 처치해야 하는 입장이다.


"... 아 진짜!"


드디어 소년이 성물을 쓸 마음이 들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소년은 마왕의 몸 정중앙에 성물을 박아 넣었다.


'꾸욱'


박아 넣은 채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나약한 어제의 자신에 대한 혐오 같기도 했고

자신이 낳은 괴물에 대한 혐오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마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정도론 굳이 자신이 일어날 필요도 없다는 듯,

그저 도도하게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 씨...!"


약이 오른 소년이 미친 듯이 성물을 휘둘렀다.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다.


"하나! 둘! 셋! 넷!!"


소년은 스스로의 공격에 숫자를 매기고 있었다.

넷.

숫자 하나를 셀 때마다 찌르기는 다섯 번을 하니

벌써 스무번 째 찌른 셈이다.


"망할, 망할, 왜 안 끝나는 건데 왜!"


어느덧 마왕의 몸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만신창이가 된 마왕의 몸은 그러나 여전히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초조해졌다.

소년은 초조해졌다.

자신이 과연 쓰러뜨릴 수 있을 지에 대한 초조함과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통하고 있는 지에 대한 초조함.

쓰러뜨린다면 과연 제 시간 내에 쓰러뜨릴 수 있을까에 대한 초조함과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지에 대한 초조함.


팽개치고 싶다.

그 생각이 소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방금 한번 헤집었던 생각이니 '다시 한번' 이라는 부사를 붙이는 것이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이 무거운 의무감도, 눈앞의 적도, 그리고 등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동생의 시선조차도

지금의 소년에게는 퍽 징그러웠다.

기분 나빴다.
팽개치고 싶었다.


그럼에도

성물을 꼬나쥐고 마왕을 찌른다.

또다시 한번, 두번, 세번...


미동도 없는 마왕을 보며 소년은 생각에 잠겼다.

물론 손은 계속해서 마왕을 찌르면서.


진짜로 팽개쳐 버릴까?

꼭 내가 해야 할까?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난 이렇게 될 줄도 몰랐는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결국 소년의 한심한 망설임을 보다 못한 여동생이 입을 열었다.


"오빠."

"어."

"그러니까..."


소년을 바라보는 여동생의 눈은 죽어있다.

소년을 향한 답답함과 마왕을 향한 공포가 적당히 혼합되어 생겨난 눈이다.

소녀는 그런 눈으로 무정하게 내뱉었다.












"풀떼기 좀 먹었어야지."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겠냐고!"

"아무튼 다 끝나면 나 불러. 화장실 급하니까. 기왕이면 빨리 좀 뚫어주고."

"야! 환풍기 틀고 가! 야!!"
"자기 똥은 자기가 뚫어야지 뭐 저래 진짜."
"야 환풍기!"


그렇게
소년은 뚫어뻥 한 자루만 들고

쓸쓸히 화장실에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