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언제쯤 올까, 턱을 괴고 식탁에 앉은 유나가 빈 접시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벌써 16:11을 가리켰다. 

 

초침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단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멀뚱히 쳐다보며, 몇 번이고 전화할까 했지만, 애써 그런 충동을 참았다.

 

식탁에 앉아 다릴 흔들며 천장을 바라보던 유나가 스크램블 에그를 몇 번 포크로 건들더니 이내 그만 뒀다.

 

아파트의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유나는 몇 번이고 현관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릴 들으며, 현관 앞에 우두커니 앉는다.

 

단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발걸음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으니까,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으니까 ......’

 

시계를 볼 엄두가 안 난다. 단이 돌아오지 않을 거란 불안이 자신을 좀 먹었다.」

 

「‘실험체’

 

혜은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유나 ......’

 

병동에서 계속 지내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런 이유라곤 짐작 하지 못했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지평선에 떠가는 구름에 불을 지폈다.

 

쓸쓸한 모양새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지금이 중요하다. 유나와 자신에게 놓인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파 위에서 잠든 유나가 눈에 들어왔다.

 

기다리는 이 없던, 그토록 쓸쓸하게만 느껴지던 집이

 

유나로 가득 차 있다.

 

종이 가방을 거실 한 편에 두고, 시간을 확인했다.

 

‘17:43’

 

늦었다.

 

기다리다, 지쳐 잠든 걸까, 

 

당장이라도 깨워서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곤히 자는 그 옆모습이 사랑스러워 그러진 못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를 유나를 위해, 식탁에 딸기 케이크를 올린 다음 홍차를 끓였다.

 

불현 듯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건 꽤나 오랜만이란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것도 다 유나 덕분이란 생각에 곤히 잠든 그녀를 돌아봤다.

 

미동도 없이 곤히 자는 그녀에게 다가가 담요를 덮어줬다.」

 

「‘꿈 ......’

 

끓는 소리, 격납고의 냉각수가 끓는 소리.

 

달아오른 보행기를 식히며 끓어오르는 그 소리,

 

“실험체 W1”

 

“실험체 W1, 보행기 가동 개시”

 

익숙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종간에 탑승한 ‘내’가 조종대에 손을 얹고서 보행기를 움직였다.

 

조종간에 탑승한 ‘내’가 소리 지른다.

 

고통에 찬 소리, 타인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연구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교수에게 뭐라 말한다.

 

실험이 중단되고, ‘내’가 조종간에서 쓰러지듯 걸어 나왔다.

 

승강기 난간을 붙잡고 겨우 서있는 내가 보인다.

 

어느새 계기 단말 앞에 모인 그들이 떠든다.

신경 제어 장치의 미흡이라느니, 실험체의 결함으로 예상된다느니, 떠든다.

 

기존 실험체 폐기 후 신규 실험체를 사용해야한다는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폐기, 못 쓰게 된 것을 버리거나 더 이상 보존할 필요 없는 것을 제거함.

 

그 날 밤, 사전에서 찾은 폐기의 뜻, 그들은 자신을 폐기하려고 했다.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나’는 무수히 많으니까,

 

지금은 왜 그런 걸까,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마음을 죄어 왔다.

 

‘왜?’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왜?’

 

무수히 많은 ‘내’가 자신을 지켜본다.

 

그들의 빨간 눈동자가, 피로 물든 것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쫓는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고서 자신에게 말한다.

 

“너는 특별하지 않아, 너는 대체될 수 있어, 우리가 있어”

 

“아니야!”

 

“나는 특별해, 나는 ......”

 

“뭐가 특별한데?”

 

“...... 사랑받고 있어”

 

“누구한테?”

 

“모르겠어”

 

“누군지도 모르는데 사랑 받는다니 이상하지 않아?”

 

“.......”

 

‘기억 해내, 기억 해내, 기억 해내’

 

속으로 끊임없이 외치지만, 그가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계속 말한다.

 

“너는 특별하지 않아,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 나는 인간이야”

 

초점이 흔들린다. 모든 게 일그러져서 기괴하게 보였다.

 

계속되는 어지러움에 속이 매스껍다.

 

‘아무나 도와줘, 제발’

 

“유나”

 

‘누구야’

 

기억나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따스한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유나, 이제 일어나”

 

‘누구야?’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더듬으며 찾았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흐릿한 초점 너머로 분간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흔들었다.

 

“......?”

 

“유나, 이제 일어나”

 

점점 선명히 맺혀오는 사람을 기억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단 그래, 단이다.’

 

“단!”

 

곁에 앉은 단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짐을 정리하고, 유나가 일어나면 입을 옷들을 준비했다.

 

홍차는 이미 미지근하게 식었지만, 뜨거운 것보단, 미지근한 편이 유나가 먹기 쉬울 테니까 상관없었다.

 

언제쯤 일어날까? 같이 먹을 딸기 케이크가 기대 되는데, 깊게 잠든 건지 내려앉은 표정이 도통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잠든 얼굴이 아기 같아‘

 

그렇게 잠든 유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유나가 입을 오물거리며 소리를 냈다.

 

“...... 아니야”

 

뭐가 아니란 건진 몰라도 꿈이라도 꾸는가 보다.

 

이내 미간을 찡그리던 유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악몽일까 걱정된 나머지 유나를 흔들어 깨웠다.

 

천천히 유나의 눈이 떠지면서 자신과 마주봤다.

 

유나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는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조금씩 떠는 유나의 등을 손으로 쓸어줬다.

 

“유나, 괜찮아?”

 

품속을 파고드는 유나가 대답하지 않고 고갤 끄덕였다.

 

그러더니 품에서 벗어난 유나가 말했다.

 

“단, 나 인간이 아니어도 사랑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됐지만, 분명 눈앞에 있는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유나는 사람이었다.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유나에게 말했다.

 

“유나, 유나는 사람이야”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닌 듯 멍하니 있다가, 다시 말없이 품속을 찾는 유나를 안아주고 달랬다.

 

조금 진정한 유나를 앉혀 놓고 옷이 든 종이가방을 건넸다.

 

자신에게 안긴 종이가방을 보던 유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옷, 지금 입고 있는 건 안 맞으니까”

 

“옷?”

 

“그래, 저번에 입고 온 건 쓸 수 없게 돼서”

 

그도 그럴게 케이크는 몰라도 굳은 검은색 페인트가 도저히 지워지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고갤 숙이는 유나, 어제의 기억이 생각난 탓일까, 

 

“유나!”

 

“...... 응?”

 

“빨리 입어보자, 예쁠 거야”

 

“단이 사준 옷?”

 

“그래”

 

“단이 사준 옷 .......”

 

당장이라도 옷을 벗으려는 유나를 뜯어 말리느라 실랑이를 벌였다.

 

“유나,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 하지만, 속옷 입고 있는데”

 

“속옷도 마찬가지로 남에게 보여줘선 안 돼!”

 

“....... ?”

 

“아무튼 안 돼, 방으로 들어가!”

 

유나를 억지로 밀어 넣듯 방으로 몰아넣고, 문을 닫았다.」

 

「단이 사준 옷, 어느새 종이가방은 저만치 집어 던지고서 옷가지들을 품에 끌어안은 유나가 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새 옷 냄새에 조금 역한 느낌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단이 자신을 위해 준 옷이다.

 

가슴이 따스해진다.

 

옷들을 죽 살피던 유나가 뭘 입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눈에 띈 인 초록색 옷에 손을 가져갔다.

‘단이 타는 보행기와 같은 색’

 

헐렁해서 불편하던 단의 옷을 벗고 초록 옷으로 갈아입은 유나가 옷을 그러모아 쥐더니 얼굴로 가져갔다.

 

‘기뻐’

 

그렇게 유나가 문을 열고 거실로 향했다.」

 

「초록색 잠옷을 입고 나온 유나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초록색 잠옷도 샀던가, 잠시 생각하던 단이 유나에게 말했다.

 

“유나, 식탁으로 가자”

 

“...... 응?”

 

“오늘 잘 기다려줬잖아”

 

곰곰이 생각하던 유나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딸기 케이크?”

 

“그래, 가자”

 

유나가 입에 호선을 그리며 먼저 식탁으로 갔다.

 

아기같이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식탁에 앉기 전, 찻잔에 홍차를 따른다.

 

유나가 호기심 넘치는 시선으로 자신을 쫓더니 말했다.

 

“뭐야?”

 

“홍차”

 

“그때와 같은 거?”

 

“응”

 

“뜨거워 ......”

 

바로 시무룩해진 유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미지근해서 유나도 마실 수 있을 거야”

 

“미지근?”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정도라 해야 할까”

 

포크를 쥐고서 딸기 케이크를 괴롭히던 유나가 눈을 맞춰 오며 말했다.

 

“그럼 따뜻한 거야”

 

“단처럼, 따뜻한 거야”

 

그리 말하고서 고갤 푹 숙인 유나가 볼을 붉혔다.

 

‘갑자기?’

 

포크를 놓은 유나가 찻잔을 양손으로 들더니 홀짝거렸다.

 

홍차의 쓴 맛에 인상을 찡그린 유나가 찻잔을 멀리하면서 말했다.

 

“그 때와 달라”

 

“홍차도 종류는 많으니까”

 

두어 번 더 입술을 적시더니 갸웃하는 유나가 말했다.

 

“같은 홍찬데 .....?”

 

“이렇게 하면 조금 비슷해질 거야”

 

그렇게 말을 마친 단이 각설탕 2개를 찬장에서 꺼내오더니 유나의 홍차에 넣었다.

 

네모난 하얀 덩어리가 홍차에 스며들 듯 녹아 사라지는 모습에, 눈을 커다랗게 뜬 유나가 단을 바라봤다.

 

“각설탕이야”

 

“각설탕?”

 

“달달하게 만들어 줄 거야”

 

단의 설명이 부족한 듯, 한참 홍차를 바라보던 유나가, 단에게 물었다.

 

“단, 사전”

 

“사전?”

 

“응, 백과사전”

 

“백과사전은 갑자기 왜?”

 

“각설탕을 찾아보고 싶어”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이상 자세히 설명하기란 단에겐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니, 집에 백과사전이 있던가, 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단이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지자, 유나가 단에게 보내던 시선을 거두고서 홍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쓰지 않은지 인상을 구기지 않았다.

 

이윽고 홍차를 다 마신 유나가, 생각에 빠진 단의 코앞에 빈 찻잔을 들이밀었다.

 

“더 마실래?”

 

“응”

 

백과사전이 어디 있을 지 고민하다 말고, 단이 빈 찻잔에 홍차를 따라 주었다.

 

한 번 더 찻잔을 들이미는 유나에게 왜 케이크는 안 먹고 있는지 묻자, 유나가 말했다.

 

“단이 안 먹고 있어 ......”

 

백과사전에 정신이 팔려, 케이크에 손도 못 대고 있었는데 유나가 그걸 기다려준 모양이다.

 

유나의 말에 퍼뜩 케이크를 조각내며 입에 넣었다.

 

그러자 유나도 따라, 포크로 딸기를 푹 찌르더니 조금 베어문다.

 

저번과 비슷 상황이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든 말든, 딸기에 정신이 팔린 유나가 귀여웠다.

케이크를 입 안에 넣으면서 생각했다.

 

‘그나저나 백과사전이 어디 있더라, 아니 애초에 그런 물건이 집에 있던가.’

 

아니, 절대 없을 거란 확신이 든다. 애초에 자신은 책을 안 읽으니까, 집에 몇 권 정도 굴러다니는 책이 있긴 하지만 기억을 더듬었을 때 그것들은 백과사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없다고 하면, 유나가 실망할까봐 섯불리 말하기 어려웠다.

 

‘사러 가야하나?’

 

그래, 유나랑 같이 사러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생각을 마친 단이 유나에게 물었다.

 

“그럼 나랑 같이 나갈까?”

 

“응”

 

‘어디로 가는지 말도 안했는데‘

 

“어디 가는지 안 궁금해?”

 

발을 흔들며 케이크를 먹고 있던 유나가 고갤 들고서 말했다.

“단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아”

 

“서점에 갈 거야”

 

“서점 ......”

 

“집에 백과사전이 없어서 유나가 원하는 것으로 하나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응 ......”

 

그렇게 말을 마친 유나가 다시 케이크에 시선을 돌리려고 했다.

 

“저번에 영화 본 적 없다고 했지, 시간 남으면 영화도 보자”

 

“영화?”

 

“응, 영화 그 엄청 큰 화면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나오는 거라고 해야 할까”

 

단의 설명을 듣고 생각에 잠긴 유나가, 끙끙 거렸다.

 

그런 유나의 모습을 본 단이,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하며 묵묵히 케이크를 해치웠다.

 

아무래도 유나는 지금 백과사전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좀 답답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