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울다 지쳐 쓰러진 유나를 업고서 집까지 왔다.

 

으깨진 케이크와 널브러진 책들 사이에 페인트로 물든 그녀를 두고 올 순 없었다.

 

그렇게 케이크와 페인트로 얼룩진 유나를 이부자리에 뉘였다.」

 

「‘낯선 천장이다.’

 

늘 코끝을 스치던 약품 냄새가 오늘은, 느껴지지 않았다.

 

멍한 의식으로, 기억을 더듬는다.

 

단의 옆에, 자신 말고 다른 이가 서서 마주보며 웃었다.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로 웃는 단이 낯설었다.

 

그 미소가 향하는 사람이 부럽고 미웠다.

 

왜? 그저 단이 웃어주었을 뿐인데, 단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데, 더 이상 단이 곁에 없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데, 

 

그런 생각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자신을 찾아온 단에게 소리 질렀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듣기 무서워 도망쳤다.

 

만약에 그게 꿈이었다면, 정말 그랬다면 더 바랄게 없을 텐데, 어제의 생생한 감각이, 분명 현실이란 걸 날카롭게 꼬집는다.

 

베갯잇이 흐르는 눈물에 젖어 차가웠다.

 

그 차가움에 멍한 정신이 차츰 돌아온다.

 

고소한 냄새, 비 내리는 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비, 오는 걸까’

 

상체를 일으켰다.

 

병실이 아니다.

 

또렷한 시야로 맺혀오는 선명한 상들이 낯설다.

 

하지만, 익숙한 냄새, 그리운 냄새다.

 

‘어딜까’

 

누군가가 살짝 열린 문으로 들어왔다.

 

단, 단이다.

 

‘단!’

 

이상한 앞치마를 두른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저 단을 온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매달려오는 자신을 품안으로 받아든 단이 말했다.

 

“일어났어?”

 

언제라도 질리지 않을 그 말이,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런 일을 겪고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침 떼는 , 편안한 단의 목소리가 상냥하다.

 

“배고프지?”

 

꿈이었으면 좋겠다. 깨지 않을 꿈

 

조심스럽게 단을 밀어냈다.

 

살짝 밀려난 단을 올려보며 말했다.

 

“...... 나, 좀 더”

 

“괜찮아”

뒷머리에서 단의 손길이 느껴졌다.

 

단의 품에 파묻힌 꼴이 됐다.

 

입 밖을 떠나지 못한 나머지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괜찮아”

 

그렇게 단이 자신의 등을 토닥인다.

 

“이제 씻고 밥 먹자,”

 

말을 마친 단이, 손을 잡아끌었다.

 

단이 씻으라며 수건 두 장과 옷 몇 가지를 품에 안겨줬다.

그렇게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한참 바라봤다.

 

머리에 엉겨 붙어 말라버린 페인트와 얼룩진 옷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벗고서 신경질적으로 닦아냈다.

 

이렇게 하면, 어제의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감았던 머릴 다시 감고, 닦은 얼굴을 한 번 더 닦아냈다.

 

피부가 빨갛게 부었다.

 

이런 꼴인 줄도 모르고 단을 안았다.

 

단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데,

 

멍청했다.

 

그렇게 한 차례 더 씻어내고 단이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에서 단의 냄새가 난다.

 

옷을 코끝에 끌어 당겨 그 냄새를 마시듯 맡았다.

 

단의 옷일까, 팔소매가 손을 덮고 입은 바지는 맞지 않아 흘러내렸다.

 

거추장스럽지만, 자신이 벌거벗고 있으면 단이 싫어한다는 걸 저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허리춤을 손으로 그러쥐고 단을 불렀다.

단도 옷을 갈아입은 건지 아침에 봤던 옷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자신 때문이다.

 

“....... 옷, 미안해”

 

“어차피 빨아야 했는데 뭐”

 

뒷머릴 긁으며 웃던 단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 

 

허리춤을 그러쥐던 한 손이 떨어지자 그 쪽이 흘러내리며 속살을 보였다.

 

이러면 단이 싫어할 텐데, 속으로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손을 쥐어오던 단이 손을 던지듯 놓고서 휙 돌아섰다.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어쩔 때 단은 이해할 수 없다.

 

“그, 그래 밥 먹으러 가자”

 

그렇게 그의 뒤를 쫓아 식기가 놓인 탁자에 앉았다.

 

앞에 놓인 젓가락이 신기했다.

 

숟가락은 단이 준비해준 도시락을 먹을 때 곧잘 썼지만, 젓가락은 처음이다.

 

능숙하게 젓가락을 그러쥐는 단을 따라했다.

 

젓가락의 끝부분으로 능숙하게 음식들을 잡아내는 단을 보고 흉내 냈지만, 이상하게 잡히지 않는다.

 

잡힐 듯 하다가도 음식이 흘러내리며 떨어졌다.

 

단을 봤다.」

 

「자신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유나가 처음 보는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어설프게 젓가락질을 따라했다.

 

자신과 다르게 움켜쥐고서 가위처럼 교차하는 유나의 젓가락질이 음식을 잡아낼 듯 말 듯 하다 흘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 계속 지켜보자, 한참을 젓가락질 하던 유나가 고갤 들고서 자신을 바라봤다.

 

실망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던 유나가 입을 연다.

 

“...... 젓가락 싫어”

 

유나의 머릴 쓰다듬고 찬장에서 포크를 꺼내 그녀에게 쥐어줬다.

 

포크를 받아든 유나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음식을 푹 푹 찌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것저것 찌르던 유나가 마지막으로 달걀지단을 푹 찌르더니, 고갤 들지 않고 말한다.

 

“...... 미안해”

 

또 그런다. 

 

“뭐가?”

 

“나 .......단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뜸들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참을 수 없었어”

 

“그러지 않을 거라 알고 있었는데, 가슴이 아파서 ......”

 

“단을 놓쳐 버릴 것만 같아서 .......”

 

유나가 갑자기 어깰 들썩이면서 눈물을 흘린다.

 

단이 쥐고 있던 젓가락을 탁자에 탁 놓으면서 말했다.

 

“그만, 괜찮아 유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죽을 때까지 곁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젓가락이 놓이는 소리에 놀란 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벌떡 일어섰다.

 

“유나!”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바지가 흘러내린다.

 

자신의 말이 안 들렸는지 그대로 달려와 품속을 파고들었다.

 

달려오는 유나를 못 버티고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유나, 괜찮아?”

 

품속에 안겨든 유나가 조용히 고갤 끄덕이더니

 

볼을 붉히며 말했다.

 

“...... 기뻐”

 

“유나, 위험하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해”

 

“하지만, 너무 기쁜걸, 나랑 단은 이제 애인 ......”

 

“무슨 소리야?”

단이 부정하듯 되묻자, 유나가 갸웃했다.

 

“...... 어째서? 단이 평생 곁에 있어”

 

곰곰이 생각하던 유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애인 ....... 아니야?”

 

유나가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아니, 맞아 우리 애인이야, 유나 이제 내려와”

 

“....... 평생 함께야, 사랑해”

 

“근데, 서로 사랑한다고 말한 시점부터 그, 애인이지 않을까?”

 

“사랑하면 애인이야?”

 

품속을 파고들면서 묻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단, 감기?”

 

얼굴이 붉어졌나 보다.

 

“유나, 이제 내려와 밥 먹자”

가슴팍에 볼을 비비며 기뻐하던 유나가 마침내 비켜줌으로써 다시 식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냥 앉지 마, 바지 입어”

 

흘러내리는 바지가 못마땅했는지 유나가 칭얼거렸다.

 

“싫어, 이게 편한데 .......”

 

“......벗고 있으면 안 돼, 왜?”

 

“저번에도 말했잖아, 여자 아이가 다른 사람한테 속살을 보여선 안 돼!”

 

“...... 응”

 

한껏 시무룩해진 유나가, 주섬주섬 바지를 끌어올려 입었다. 한 손으론 허리춤을 그러쥐고 한 손으론 포크를 든 채 음식을 찌르며 가지고 놀다가, 입에 넣었다.

 

‘식사 예절을 가르쳐야 하나, 아니다.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니까, 그건 그렇고 옷을 사러 가야하는데 아, 유나가 없어진 걸 병동 사람들이 다 알았을 텐데’

 

긴장이 풀리자 뒤로 미뤄뒀던 고민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매만지자 유나가 포크로 음식을 건들다 말고 묻는다.

 

“단, 아파?”

 

“아니야 .......”

 

‘내가 어떻게든 해야 돼’

 

앞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들로 고민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그나저나 오이소박이를 입에 넣고서 오물거리는 유나가 귀여웠다.」

 

「“네, 혜은 씨, 아,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근데 저희 며칠 전에 보지 않았던가?”

 

“아, 네 아, 네, 다른 게 아니고 여자 옷을 좀 사야할거 같아서 도와주실 수 없나 해서요.”

 

“아니 제가 그런 쪽으로 성벽이 있는 게 아니라 ....... 만나서 부탁드릴 것도 좀 있고 해서요.”

 

“아, 그런 성벽가지고 있는 사람이랑 만나기 싫다구요? 아니 저 그런 성벽 없다니까요.”

 

“어쨋든 점심쯤에 만나는 거 어떠세요?”

 

“예? 점심 사라고요?”

 

“......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들고서 거실을 서성이는 단을 소파에 드러누운 유나가 영문도 모른 채 지긋이 바라봤다.

 

누구랑 대화하는 걸까?

 

“유나, 점심때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올 테니까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밥 해놓을 테니까 먹구, 알았지? 그리고 급한 일 있으면 전화번호 줄 테니까 전화해”

 

“...... 점심?”

 

“12:00시에 나갔다가 16:00 근처에 돌아온다는 말이야”

 

유나가 고갤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0:48 .......”

 

좀 있으면 단과 4시간이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

 

단이 자신의 머릴 쓰다듬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 올 테니까, 잘 기다리고 있으면 딸기 케이크 사줄게”

 

“같이 먹는 거야 .......?”

 

“응”

 

‘단과 같이 먹는 딸기 케이크......‘「」

 

 

「“어째서 네가 힘들어 하는 거야, 돌아다니면서 골라 준건 우린데”

 

혜은이 단에게 톡 쏘듯 말했다.

 

‘아니, 짐이 이렇게 많을 줄 누가 알았겠냐구’

 

양 손 가득 종이가방을 쥐고선 단이 땀을 뻘뻘 흘리며 혜은과 소연 뒤를 쫓았다.

 

“그런데, 여자 옷을 왜 갑자기 골라 달란 거야?”

 

소연이 물었다.

 

“그건 이제, 카페에 들어가서 설명 할게요.”

 

“네가 사는 거지?”

 

“...... 네”

 

.혜은과 소연이 뒤처지는 단을 두고서 한적 해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그 때, 같이 있던 여자 아이랑 같이 살게 도와달라고?”

 

단의 자초지종을 들은 혜은이 경멸로 가득 찬 시선을 쏘아 보냈다.

 

“아니 그래도, 병동에 계속 지내게 하는 건 좀”

 

“병동에 지내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니? 개 실험체야”

 

“예?”

 

“실험체라고,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 때 처음 보셨던 거 아니에요?”

 

“그럼 대뜸 실험체라고 말해주랴?”

 

한숨을 푹 쉬던 혜은이 등받이에 늘어지듯 기댔다.

 

“그래, 너를 봐 온 정이 있으니까 이번에 힘 좀 써볼게, 점심에 커피도 사주니까 봐주는 거다.”

 

소연이 끼어들었다.

 

“실험체 외부 유출을 허락해줄 리가 없잖아”

“사실, 나도 자세히 들은 건 아닌데, 개 실험 끝났어, SRB에서도 애물단지 취급하던데, 뭐 그런 짐짝 재가 떠맡으면 걔네도 좋아해주겠지”

 

“흐응......”

 

“SRB요?”

 

“넌 몰라도 되는 거야, 쨔샤”

 

“...... 네”

 

“근데 너 돈도 많다. 옷에 전화기에 그렇게 지출해도 되는 거야?”

 

혜은이 소연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하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런데 팍팍 써야지 안 그래?”

 

소연이 잠깐 단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선 커피를 한 모금 삼키더니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러네”

 

잠시간의 침묵이 그들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단이 자릴 일어서더니 계산대로 향했다.

 

“야, 삐졌어?”

 

“아닙니다. 16시 전에는 돌아가기로 해서요.”

 

“그래? 알았어, 조심히 가”

 

단이 떠나가고 둘 만이 남은 자리에서 소연이 혜은을 쏘아붙였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틀린 말이야?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잖아, 세상 지키겠다고 어른들이 애들 등 떠미는 세상인데 재는 뭐, 모를 것 같아? 아까 말하던 실험체도 폐기 대상 이었어”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홀짝이던 혜은이 다시 말했다.

 

“실험 담당 교수가 힘좀 써서 보행기 조종사로 빼낸 거지 아니면 당장에 ......”

 

소연이 혜은의 말을 끊고 자릴 일어섰다.

 

“알겠어, 오늘은 이쯤하자, 나 가 볼 데 있어”

 

그렇게 카페를 나가는 소연의 뒷모습에 대고 혜은이 조용히 말했다.

 

“재, 은근히 저런 구석이 있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