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유나의 대답에 만족한 단이 자릴 일어섰다.

 

자신을 따라 일어선 유나가, 단의 옆에 꼭 붙어왔다.

 

유나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손으로 닦아냈다. 

 

단이 자신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닦아내는 것에 당황한 유나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이내, 단의 검지에 묻어나온 생크림을 보더니 혀로 입술을 쓸며 입맛을 다셨다.

 

먹고 싶다. 그런 생각에 단의 검지를 입 가까이 가져갔다.

 

눈을 감고서 입을 작게 벌렸다.

 

단이 손가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그 입을 살짝 밀어내고서, 검지를 휴지로 닦았다.

 

입 안에 느껴져야 할 단 맛이, 느껴지지 않자, 눈을 뜬 유나가 갸웃했다.

 

생크림이 묻어있던 단의 손가락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왜, 생크림을 안 준걸까, 갸웃한 유나가 물었다.

 

“왜?”

 

유나의 목소리에서 묘한 실망감이 느껴졌다.

 

“이런 건 먹으면 안 돼”

 

단호한 단의 말에 움찔한 유나가, 중얼거렸다.

 

“생크림......”」

 

「병동으로 가고 있다.

 

시무룩해 보이는 유나가 자신의 옆을 걷는다.

 

생크림을 주지 않았던 탓일까

 

손가락을 향해 입을 가까이하던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유나”

 

“...... 응?”

 

힘없는 유나의 대답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걸 참았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우리 공원 갈까?”

 

유나가 커다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것을 긍정으로 여기고서 유나와 함께 곁길로 샜다.

 

아직 해가 떠 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언덕을 오르느라 꽤나 땀 흘렸다.

 

꽤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유나는 이 공원이, 이 풍경이 맘에 들까? 의문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언덕위에 드러눕고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봤다.

 

티 없이 깨끗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드리우는 그림자에 유나를 불렀다.

 

“유나”

 

“응?”

 

위에서 내려다보는 유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유나가 옆에 누웠다.

 

그렇게 누운 유나가, 자신과 같은 하늘을 봤다.

 

유나의 손을 잡았다.

 

부르고서 말이 없는 자신에게 유나가 다시 물어온다.

 

“응?”

 

“좋아?”

 

“응”

 

그걸로 됐다.」

 

「먼저 도착한 단의 옆에 섰다.

 

주홍빛 노을이 담긴 호수와 펼쳐진 들판이 보인다.

일렁이는 노을 속에서 이름 모를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부서지는 물결 사이로, 물보라가 일며 반짝이는 빛이 흩어졌다.

 

다시금 노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 수면 위로 일렁거렸다.

 

살아있다.

 

생명 없을 호수가, 바람에 출렁이는 들판이,

 

우릴 밝히는 저 노을이,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단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드러누운 그의 머리맡으로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신이 다가옴을 안 것인지 단이 자신을 부른다.

 

“유나”

 

그의 입을 떠난 단어의 울림이 좋았다.

 

“응?”

 

부르고서 대답 없는 그의 곁에 드러누웠다.

단이 바라보는 하늘을 자신도 바라봤다.

 

단이 자신의 손을 잡아온다.

다시 그에게 대답했다.

 

“응?”

 

그가 말했다.

 

“좋아?”

 

좋았다. 단으로 물 들어가는 이 기분이 좋았다.

 

“응”

 

그렇게 말하고서 맞잡은 손에 힘을 꼭 주었다.

 

돌아눕고서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 돌려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에서 왠지 모를 기분이 든다.

 

단이 입을 뗐다.

 

“저길 봐,”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청설모 한 마리가 털을 고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조그마한 생명이 신비롭다.

 

그렇게 털 고르길 마친 청설모가 우리들을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보더니 쏜살같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언제나 그렇듯, 단은 자신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한다.

 

이런 값진 장면을 자신에게 보여준 단이 고마웠다.

 

고갤 돌려 말했다.

 

“고마워”

 

단이 자신을 끌어안았다.

 

“왜 울어, 울지 마”

 

스스로 우는지 조차 몰랐는데, 품으로 눈물을 닦아 주던 그가 일어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자, 늦으면 안 되니까”

 

단의 내민 손을 잡고서 일어났다.」

 

 

 

「해가 저문 길을 걸었다.

 

단이 난처하게 말했다.

 

“이렇게 늦을 줄 몰랐는데”

 

단이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누구 하나 없이 땅거미진 거리가 쓸쓸 했다.

 

그러나 괜찮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단이 있고,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있으니까, 

 

옛날과 같이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자신과 함께 있는 단을 생각했다.

 

옆을 보니 단이 웃으며 마주 바라봤다.

그리곤 재잘 재잘 떠드는 단의 목소릴 듣는다.

 

‘나중에 식사 하자, 영화는 본 적 있니, 바다는 가본 적 있어?’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 단을 보고 있자니

얼굴에 피가 쏠리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든다.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것 같아 고갤 숙이고서 그냥 걸었다.

 

단은 이만큼이나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됐다.

 

자신도 그럴까? 자신도 단에게 그러한 존재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병실에 도착했다.

 

이젠 달이 뜬 하늘 위로, 별들이 떠 있었다.

 

병실을 뒤로 하고 서로 마주보길 한참, 단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작은 종이가방 하나를 꺼내들어 자신의 품에 안겼다.

 

“....... 뭐야?”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그가 안겨준 종이가방을 들여다본다.

 

카페테리아에서 먹었던 딸기 케이크가 있었다.

 

“조금 부족했던 게 아닐까 해서”

 

매달리듯, 단을 꼭 끌어안았다.

 

땀으로 살짝 젖은 옷, 시큼한 땀 냄새가 올라온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포옹에, 잠시 가만히 있던 단이 마주 안았다.

그런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이 다가온다.

 

단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과 닿았다.

 

알 수 없는 행동에 놀라 눈을 치뜨다가도,

 

단에게 맡겼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단의 숨결이 얼굴을 간질인다.

 

천천히 단이 입술을 뗀다. 

 

눈을 떴다. 

 

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목을 끌어당겨 이번엔 자신이 입술을 포갰다.

 

단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 올 남김없이 그를 가지고 싶다.

 

그렇게 단을 마셨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흥미로운데”

 

안경 너머로, 지긋이 그 장면을 지켜보던 교수가 입에 호선을 그렸다.」

 

「차가운 냉수가 머릴 식혔다.

 

떨어지는 투명한 물줄기를 맞으며 눈을 감았다.

 

꿈만 같던 어제를 떠올렸다.

 

그가 사랑한다고 했다.

 

묘한 기분에 마음이 들떴다.

 

몸을 닦고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병상에 누웠다.

 

그가 안겨줬던 종이가방을 바라봤다.

 

그가 날 사랑한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듯,

 

있지도 않은 단을 안 듯 허공에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할 일 없는 오늘, 쌓아놓은 책을 꺼내들고서 읽는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 쌀쌀해 이불을 그러모아 품에 안았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들어오지 않는 책을 뒤로 하고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그는 뭘 하고 있을까?」

 

「속옷을 입고서 브라탑 다음으로 걸친 블라우스에 단추를 채운다.

 

스커트를 입고 스타킹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플랫슈즈를 신는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병실을 나섰다.

 

어제 느꼈던 생명을 다시 눈에 담으려 한다.」

 

「익숙한 가로수 길을 지나 공원으로 향했다.

 

내리쬐는 햇볕이 따갑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숨이 조금 가빠 온다.

 

이윽고, 언덕을 다 오르자, 어제 단과 함께 바라본 풍경이 눈앞에 다시 펼쳐졌다.

 

그 날과 조금은 다른 풍경이지만, 감동은 그대로다.

 

그렇게 풀밭 위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웃으며 떠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풀 위에 앉은 나비가 보였다. 

 

다문다문 피어난 이름 모를 꽃,

 

그리고 단, 단?

 

저 멀리서 웃고 있는 단이 보인다.

착각인가 싶지만, 분명히 저 얼굴, 분명히 단이다.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웃는 단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기 전까진,

 

자신도 보지 못한 미소를 낯선 타인에게 보여주는 단,

누굴까, 누군데 단이 저렇게 환하게 웃어주는 걸까, 즐거워하는 걸까?

 

불쾌한 감정이 마음을 물 들여간다.

 

그저 다른 사람과 웃으며 떠드는 것뿐인데도, 가슴을 죄어오는 이 마음이 이상했다.

 

묵빛 머리칼의 여자가, 단의 곁에 앉았다.

 

숨 쉬기가 조금 힘들다.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사이가 자신의 존재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죄인도 아닌데, 이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 사이 아닐 거야’ 같은 말을 속으로 계속 새기며 공원을 떠났다.」

 

「갈 곳 잃은 발이 어느새, 단과 함께 갔던 카페테리아로 유나를 이끌었다.

 

아무 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 단이 살펴보던 책자를 펼쳤다.

 

익숙한 단어의 낯선 조합은 아직도 모르겠지만, 책자 속 딸기 케이크는 선명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몇 시간, 누군가 다가왔다.

 

“손님”

 

낯선 타인의 목소리가 생각에 빠진 유나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자신을 부르는 그 사람의 목소리에 유나도 모르게 속말이 튀어나왔다.

 

“...... 딸기 케이크”

 

얼마나 흘렀을까, 펼쳐 든 책자 앞으로 놓여 진 딸기 케이크에 딸기 케이크를 놓은 손의 주인을 찾았다. 

 

‘단 일까’

 

아니다.

 

딸기 케이크를 놓은 이는 이미 저만치 가서 사라졌다.

 

그날과 같이 유나가 포크를 쥐고서 딸기 케이크를 가지고 논다.

 

딸기를 집어든 유나가, 딸기를 몇 번 베어 물고서 오물거렸다.

 

찌릿 찌릿한 신 맛이 그 날과 다르지 않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니 달랐다. 단은 지금 없으니까,

 

채 다 먹지 못하고 자릴 일어선 유나가, 카페테리아를 떠났다.

 

아무도 유나를 붙잡지 않았다.

 

병동으로 가는 길을 달리듯 걸으며 눈물을 훔쳤다.

 

정신없이 걸었다.

 

온갖 불안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 자신을 죄어왔다.

 

숨 쉬기가 힘들다.

 

병실에 도착한 유나가 단이 선물한 딸기 케이크를 으스러뜨리듯 품에 안고서 병상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딸기 케이크가, 병상과 옷을 더럽혔다.

 

그 모양이 지금 자신의 마음과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발걸음이 병실로 향했다.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 돌아보자, 단이 서있었다.

 

무슨 말을 하러 온 걸까,

 

죽을 것 같은 절망감이 몸을 짓눌렀다.

 

단의 말을 듣지 못할 것 같다.

 

문 옆에 선 단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유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병상에 엎드린 채 돌아보는 유나가 창백해 보였다.

 

“유나!”

 

자신을 밀치고서 밖으로 뛰쳐나간 유나가 어둠 속 저편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야 .......?’

 

유나가 엎드렸던 병상 위가 으스러진 케이크의 파편으로 가득했다.

 

유나가 뛰어간 방향으로 달렸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지만, 불안한 생각이 자신을 좀 먹는다.

 

위태로워 보이는 유나가 걱정됐다.

 

이윽고 복도의 막다른 곳에, 서서 숨을 몰아쉬는 유나를 찾을 수 있었다.

 

“어디 가는 거야?”

 

대답이 없다.

 

고갤 숙이고서 움츠린 모습이 불안해 다가가려 하자 갑자기 유나가 소리쳤다.

 

“다가오지 마!”

 

‘잘못 들었나?’

 

“...... 아침에 봤어”

 

뭘 봤다는 걸까

 

“사랑해 ......”

 

의미 모를 말이 계속 튀어나왔다.

 

“이런 나론 부족한 걸까?”

 

“나, 단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닌 걸까?”

 

“무슨 말이야, 유나?”

 

“여자, 여자, 여자!”

 

차분하게 말하다가도, 소릴 지르는 유나의 모습이 불안하다.

 

시선을 더듬던 유나가, 어디서 찾은 건지 모를 페인트를 머리 위로 끼얹으며 말했다.

 

“이러면 좋아해줄까, 머리카락도 조금만 있으면 길게 만들 수 있어”

 

검은색 페인트로 엉망진창이 된 유나가 제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붉은 눈은 기분이 나빠? 그렇다면 그것도 바꿀게”

 

주저앉고서, 흐느끼는 유나에게 다가갔다.

자신도 검은 페인트에 몸이 더러워지겠지만, 상관없었다.

 

떨고 있는 유나를 무시할 수 없다.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서 등을 쓸어줬다.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일이야?”

 

“...... 공원에서 단이 다른 사람과 함께였어, 행복해보였어”

 

잠시 흐느끼던 유나가 이어 말했다.

 

“버리지 말아줘 ......”

 

“나, 단이 좋아하는 여자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

 

유나가 엉겨 붙어 왔다.

 

“......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