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타다다닥.


다섯 평 남짓한 작은 방. 창문 밖으로는 해가 슬슬 떠오르고 있었다.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무 말 없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펑!


"이런 시발."


아군 기지가 타지는 것과 동시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욕설을 내뱉는 순간 내 코에서까지 단내가 확 느껴질 정도의 악취가 느껴졌다.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의 악취였다. 대체 얼마나 양치질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입냄새가 느껴질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걸까.


그러고보니 내가 몇시간째 컴퓨터 앞에서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지. 시발 그놈의 승급전이 뭐라고. 내가 또 롤 하면 자살한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10시...크흠."


무심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걸걸했다. 마치 칠판을 긁을 때 나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였다. 이게 정녕 사람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군. 

어제 아침 9시부터 게임을 시작했으니 이미 하루를 갱신한 셈이었다. 휴식이라도 취할 겸 의자에 몸을 기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


수십개의 쓰레기가 방안에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며칠 전에 벗어둔 옷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지 오래였다. 책상 위에는 컵라면 용기나 달걀 껍질 등이 데코레이션인 마냥 먼지가 쌓인 전공서적 위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바닥에는 꾸불거리는 기분나쁜 털 쪼가리나 모기 시체나 먼지가 심심찮게 보였다. 


이런 방에 맨발로 있는 나도 정상정인 위생관념을 가진 인간은 아니었다. 

아니 뭐, 사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쓰레기지만.


"이 정도면 행위예술로 쳐줄지도 모르겠네..."


쓰레기의 산을 바라보며 무심코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밤새 게임을 하니 뇌수가 전자파에 활활 타버리기라도 했나보다.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면.


그보다 이 방은 언제 다 청소한담.


".........아 몰라."


귀찮은 일은 역시 미루는 게 제맛이지. 일단은 담배나 한 대 빨고 와야겠다. 


팬티바람인 상태에서 널부러진 옷가지를 대충 골라입고 나는 방을 나섰다. 내가 문을 여는 순간 하는 수 없이 잠시나마 내 꼴을 감상해야 했다. 하필이면 방문 앞에 떡하니 전신거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헐..."


내 모습을 보는 순간 무심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꼴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추악했다.


기름기가 금장이라도 흐를 법한 떡진 머리에서는 눈이라도 떨어진 것 마냥 군데군데 새하얀 비듬이 보였고 눈가에는 큼지막한 눈곱이 껴 있었다. 여기에 시궁창을 연상케 하는 악취는 덤. 


바닥까지 내려간 인간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완벽한 견본이 눈앞에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그야말로 혐오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이유인 듯한 존재.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청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모습.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그랬다.


"......그래도 세수는 하고 갈까."


물론 거울 속 내 꼬라지를 보았다고 해도 1년간 단련된 내 귀차니즘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꼴로 나갈만큼 내가 낯짝이 두꺼운 인간은 아니었다. 세수 정도는 할 생각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머리는 모자 쓰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연 순간,



"......?"



문 앞에 룰루가 서 있었다.



보라색 가득한 옷차림으로 무장한, 게임 캐릭터를 코스프레한 소녀가 내 가슴에도 못 미치는 키로 지팡이를 든 채 서 있었다.


아니, 옷이나 지팡이 뿐만이 아니었다. 특수한 화장이라도 한 건지 피부에서는 푸르스름한 색이 감돌았고, 눈에는 컬러렌즈를 낀 것인지 날카로우면서도 장난끼가 엿보이는 초록빛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가슴도 없다.


2d가 3d로 구현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지금 내 눈앞의 소녀가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될 만큼 내 눈앞에 있는 소녀의 모습은 룰루 그 자체였다. 


"어......"


내가 아무리 대범한 인간이라고는 해도 우리 집에서 비상식적인 저 모습을 보니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면 너무도 훌륭한 룰루 코스프레에 감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나는 그 요정 코스프레를 한 소녀가 남의 집에 무단침입한 상황이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그 모습을 감상했다. 이래서 씹덕은 안돼.


"안녕!"


얼마나 넋이 빠져 있던 걸까. 소녀가 긴 자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씨익 웃었다. 심지어 목소리도 룰루랑 똑같았다. 설마 이 꼬마애가 실제 성우일 리는 없을 텐데. 복화술 같은 건가? 그나저나 코스프레 한 번 하는데 엄청나게 공들였군.


"누구세요?"


언제까지고 멍하니 감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소녀가 엄청난 싱크로율의 코스프레를 보여준다고 해도 이 꼬마애는 결국 무단으로 남의 집 화장실에 들어온 셈이었다. 심지어 룰루 같이 미친 요정 코스프레까지 하고 말이지. 


...머리에 꽃만 안 달았을 뿐이지, 생각해보니 진짜 미친년인데? 


"나?"


룰루가 쯧쯧 혀를 차면서 검지를 좌우로 까닥였다. 


"아까 같이 한 서포터."


그러더니 얼굴을 들이대며 씨익 웃었다.


"그렇게 욕을 해댔으면서 벌써 까먹은 거야?"


룰루는 내 얼굴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


그 때 나는 망설이지 말고 그녀를 내쫓아야 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내쫓지 않은 것은 왠지 모를 찝찝함 때문이었다. 


뭔가 꺼림칙했다. 내가 방금 끝낸 승급전. 거기서 내 아군 서포터도 룰루였다. 

그러고보니 어지간히도 못해서 실컷 부모님 안부까지 물었었는데. 그걸 이 여자애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방 너머로 몰래 훔쳐본 건가?


...아니다. 미친년이랑 굳이 말을 섞을 필요는 없지. 

나는 머리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위화감을 애써 무시하고 입을 떼었다.


"헛소리 작작 해라. 꼬마야.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소녀의 코스프레가 얼마나 훌륭하든 뭐든 겉모습으로만 보면 꼬마에 불과했다. 여기서 어른인 내가 괜히 기고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겁이라도 줄 생각으로 일부러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소녀를 노려보았다.

뭐, 노려본다고 해도 머리에 비듬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거지같은 몰골을 한 지금의 내게 어른으로서의 위엄 따위가 과연 존재하긴 할까?


"너 이거 무단침입인 건 알아? 보니까 중학생 정도 된 거 같은데. 경찰에 신고는 안 할 테니까 그만하고..."

"너의 그 못된 정신머리를 고쳐주러 왔다!"

"뭐?"

"룰루는 여린 아이라고! 그런 아이한테 그렇게 심한 욕설을 퍼붓다니!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



룰루 코스프레를 한 년 다웠다. 



진짜 미친 년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섰다. 이미 대화하는 건 포기했다. 미친 사람 곁에 있어서 손해보는 건 나처럼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이니까. 괜히 다가갔다가 해꼬지라도 당하면 나만 손해지.


일단은 112에 신고를...


"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손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손뿐만이 아니다. 가위에라도 눌린 듯 온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후후..."


당황한 내 눈앞에서 룰루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룰루는 웃는 표정 그대로 내게 당당하게 걸어와 내 등 뒤에 섰다. 


그러더니 억지로 짜낸 듯한 중후한 목소리로 대사를 읊조렸다. 

이건 설마...



"내가... 시간을 멈췄다!"



"......"



한 순간의 정적. 

수 초도 되지 않는 그 순간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참고로 시간을 멈췄다는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저 년의 씹덕함에 소름이 돋았다는 얘기다.


덕후 중에서도 상종못할 종류가 네 가지 있다. 


생물도 아닌 것에 욕정하는 배박이. 수간물의 대표주자 말박이, 그리고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똥퍼.


그러나 지구에 존재하는 가장 악질의 덕후는 바로 죠죠러다. 이 새끼들은 공공장소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쪽팔리는 포즈나 잡고 사진을 찍는 미친 짓거리를 아무 거리낌없이 하는 녀석들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멀찌감찌 떨어져서 지켜보는 나같은 선량한 덕후들 몫이었다. 참고로 이건 경험담이다.


즉, 이들을 세계에서 모조리 박멸해 씨를 말리는 것이 덕후계에 밝은 내일을 약속하는 한 걸음이 되리라! 나는 죠죠러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래서 씹덕은 안된다는 거다.



하지만 이걸 알아듣는 나도 안될 놈이라는 거겠지. 

진짜 싫다...


"후후, 내 능력에 너무 놀라 말도 안 나오는 모양이군."


룰루가 다시 내 눈앞으로 오더니 빈정거렸다. 하긴, 어떤 의미에선 맞는 말이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저 년이 생각하는 게 전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쯤 되니 나도 슬슬 만만하게 봐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사람이 몸이 돌처럼 굳었는데 내 눈앞에 있는 여자는 나를 조롱하며 마구 움직인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위기감을 느끼기엔 충분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 때도 나는 뭔가 초현실적인 일이 내게 일어났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 마취침이라도 맞았나? 내가 생각한 건 그 정도였다.


물론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시발. 너 뭐야?"


이 상황에서 좋은 말이 튀어나올 리가 없다. 여유를 잃고 욕설을 퍼붓는 나를 룰루가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말했잖아? 니 서포터. 게임에서만 입이 더러운 게 아니었구만, 강수진."

"내 이름은 어떻게..."

"요정 룰루는 모든 걸 꿰뚫어볼 수 있답니다!"


이런 썅. 미친 년이라 말이 안 통하는 건가?


"그럼 벌칙 시간입니다!"


내가 짓고 있을 무시무시한 표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룰루가 쾌할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내 눈 앞으로 지팡이를 내밀었다. 저걸로 뭔 짓거릴 하려고?


"내가 욕 먹었다고 분해서 이러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 

뭐 때문에 이러는지는 아주 자알 알겠다. 


부모님 안부라도 여쭙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제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속에서 꿈틀거리는 패드리퍼의 혼을 분출할 기회도 없이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며 룰루를 노려보았다. 이 마비만 끝나봐라. 여자고 뭐고 싸다구 한대는 반드시 갈기고 말리라.


"나를 욕보였다는 것 자체가 큰 죄이긴 하지만 말이야. 나는 관대한걸. 강수진. 한동안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할께."


그 말과 함께 나를 향한 지팡이가 보라색으로 빛낙 시작했다. 놀랄 새도 없었다. 영롱한 빛을 보며 내가 눈을 크게 뜬 순간 룰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해라!"


영원히 저 년의 싸다구를 갈길 일이 없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끼면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