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게 솟은 빌딩 사이로 부연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탓에 한쪽 벽을 차지한 통짜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란 희끄무레한 빌딩의 흔들리는 그림자뿐이었다. 재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쨍한 햇빛 아래 바삐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훤히 보였지만 올해는 안개가 짙게 앉아 흐릿한 도시의 풍광만이 눈에 잡히는 전부였다. 보도국(報道局) 사람들은 안개가 낀 것은 불편하나 찜통 같은 더위가 한풀 꺾여 좋다 말했지만, 박(朴) 기자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음습한 냉기 탓에 끈적하게 눌어붙은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다.

 

  박 기자는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그리 크지 않은 보도국(報道局)에 들어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가 처음부터 기자의 꿈을 가졌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박 기자의 초등학교 시절 꿈은 대통령이었고, 중학교 시절 꿈은 대기업 임원이었으며, 고등학교 시절의 꿈은 대기업 사원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말 즈음 대기업 사원은 요원한 꿈보다도 더 작은 무언가로 변했고, 거창했던 꿈은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단지 공무원 말직만을 원할 뿐이었다. 허나 그가 기자가 된 것은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세한 지방 대학의 신문방송학과만이 그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과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성적에 맞춰 급급히 들어간 대학에서 성실히 임할 리는 만무했고, 5년간의 대학 생활은 변변찮은 학점도 얻지 못한 채 졸업해버린 취업 준비생을 하나 만드는 것으로 끝장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수렁과도 같은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직장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7년째였다. 취직한 지 7년째라 함은 높은 자리에 앉아 여유라도 가질 법하건만, 박 기자는 7년을 넘어 8년째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아직 말단 기자인 채였다. 허나 가슴 한구석을 좀먹는 답답함은 그의 절망스러운 진급 상황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앞에 앉아있는 한 각성자(覺醒者) 탓이었다.

 

  어깨 언저리에서 일자로 친 고동빛 머리, 깊게 내려앉은 푸른 눈동자, 천진해 보이는 얼굴. 만약 박 기자 앞으로 인사이동된 각성자만 아니었더라면 그 풍만한 몸매나 곁눈질하고 지나갈 일이었다.

 

  “제 말 듣고 계시죠?”

 

  사무실 안을 무겁게 채운 침묵을 가로지르며 들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박 기자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각성자, 최수진이었다.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몹시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듣고 있습니다.”

 

박 기자는 점멸하는 노트북 화면에 눈을 두고 성의 없이 대답했다.

 

  “이제부터 박 기자님과 저는 같이 다니게 됐다구요. 어찌 보면 동료가 된 셈이죠…… 아시겠죠? 아무튼, 사건 하나를 취재하러 가야 하는데…….”

 

  “언제 말입니까?”

 

  “지금 당장이요.”

 

  정말로 급한 일인가 보군. 박 기자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7년간 근무하며 사무실을 살핀바, 제대로 짐도 싸지 못한 채 서류 가방이나 달랑 들고 뛰쳐나갈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대문짝만한 특보 하나가 나가기 마련이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들은 박 기자의 몫이 아닌 동료 기자들의 몫일 뿐이었다.

 

  “그렇겠죠.”

 

  “또, 또! 성의 없는 대답!”

 

  여전히 시큰둥하기만 한 대답에 최수진은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박 기자는 움찔하는 기색조차 없이 시종 심드렁하기만 했다.

 

  “글쎄요, 전 각성자가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러기에요!”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수진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 기자의 앞에 놓인 모니터를 접어버리기에 이르렀다. 갈 곳을 잃은 박 기자의 눈이 잠시 그녀의 가슴에 머무르다 얼굴로 향했다. 수진은 뺨을 벌겋게 물들인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박 기자님이 말단 기자로만 7년을 보낸 거라구요!”

 

  수진은 제가 질러 놓고는 흠칫하여 눈치를 슬슬 보고 있었다. 벌컥 화를 낼 법도 하건만 박 기자는 여전히 심드렁하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수진씨는 7년 차 말단 기자 앞으로 인사이동 된 각성자고요.”

 

  “…”

 

  “취재하라는 사건도 뻔하디뻔한 일 아닙니까. 어디 관문에서 일반인이 실종됐다, 길 가다 마정석을 주운 청년이 있다……. 이런 기사를 누가 봅니까? 차라리 인터넷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자극적인 소문 한 줄이나 싣는 게 나아요.”

 

“그건 아니에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최수진은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갑작스런 대답에 박 기자는 노트북을 펴다 말고 흘깃 쳐다봤다.

 

  “관문과 관련된 사건은 시시한 일로 치부할 만한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저희가 맡은 사건이 그런 일이란 것도 틀렸어요. 보도국장님이 저희에게 맡긴 일은…… 살인사건이에요.”

 

  박 기자는 잠시 내뱉을 단어를 찾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말단 기자인 채 사무실 한켠을 축내는 박 기자에게 살인 사건같이 굵직한 일이 들어오는 것은 뜻밖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살인 사건은 수진 씨가 필요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고작 살인 사건이라면야 사람 하나 불러다가 맡기면 될 일이에요.”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에요. 박 기자님.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취재할 일은…… 일반인에 의한 각성자 살해 사건이에요.”

 

  “뭐요? 헛소리!”

 

  박 기자가 저도 모르게 뱉은 고함은 사무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로 컸다. 최수진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박 기자님! 누가 듣겠어요!”

 

  “젠장, 들으라면 들으라지. 저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관심조차 없을 겁니다. 저들이 돌아본 것은 다만 만년 말단 주제에 소리를 지른 것이 몹시 못마땅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뭐라고요? 일반인이 각성자를 죽였다고요? 수진 씨가 한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건지 잘 알 것 아닙니까?”

 

  “예, 믿기 힘드시겠죠. 하지만 국장님이 직접 맡긴 일이에요.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길 일이 아니라고요.”

 

  “국장님이?”

 

  “예.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박 기자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몇 번씩이나 거듭 강조하셨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라고…….”

 

  박 기자는 몸을 젖혀 천장에 다닥다닥 붙어 점멸하는 형광등을 노려봤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더 이상 신문이나 뉴스를 보지 않고, 자극적인 인터넷 기사 따위에도 질려버렸으며, 단지 실시간으로 흩어지는 유행 따위에나 열광할 뿐이었다. 문자보단 그림을, 그림보단 영상을 선호하는 것이 대중이고 시대였다. 이(李) 국장이 보도국의 개국 이래 지금까지 국장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보도국의 문이 닫히지 않게 지켜왔던 것에 있었다.

 

  그런 보도국장이 지난 7여 년간 신경도 쓰지 않던 말단 기자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박 기자는 문득 벗어날 수 없는 파국의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박 기자는 심호흡을 했다. 옅은 커피 내음과 연일 무겁게 내려앉은 안개 탓에 나는 약간의 곰팡내, 그리고 축축한 흙냄새.

 

  박 기자는 천천히 마음속으로 이 일을 받아들일 때와 거절할 때의 상황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이 국장은 이 일이 기밀이라 말했다.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박 기자일까.

 

  박 기자는 그 이유만큼은 알기 힘들었다. 다만 굳이 박 기자에게 기밀이라 말하며 각성자를 붙인 국장의 의도에서 밖에 낀 짙은 안개만큼이나 음습한 기운이 느껴질 뿐이었다. 하여 박 기자는 서류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1

 

 

  선로에 지하철이 들어온다. 점심을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콩나물 시루마냥 빡빡하게 들어찬 사람들의 머리통 사이를 비집고 나온 박 기자는 땀에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지하철이 선로로 들어오고 있었다. 박 기자는 최수진이 사람들 사이를 제대로 헤치고 나온 것을 확인하고 지하철의 문이 닫히기 전 몸을 실었다.

 

  사람으로 요란하게 가득 찬 역과는 다르게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지하철은 두 사람이 앉을 자리가 날 정도로 한산했다. 박 기자는 땀에 젖은 셔츠를 몇 번 펄럭이고 자리에 엉덩이를 올렸다. 최수진은 박 기자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그의 옆자리가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맞은편 빈 자리에 앉았다. 박 기자는 맞은편에 걸터앉은 최수진을 잠깐 노려봤다. 시선에 민감한 각성자는 그 잠깐 사이에도 뭔가 느꼈는지 고개를 퍼뜩 들어 박 기자를 쳐다봤다.

 

  “저희가 가는 곳이 수도 외곽이라 하셨죠?”

 

  “네. 일단 그곳으로 이동해서 국장님의 지시를 기다리라 말씀하셨어요.”

 

  “그 말은 사건이 수도 외곽에서 일어났다는 말입니까?”

 

  “박 기자님!”

 

  박 기자가 사건을 입에 담자마자,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혹 누가 듣지나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본 박 기자는 기가 차 입을 열었다.

 

  “수진 씨. 누가 듣는다 하더라도 저희가 무얼 하려고 수도 외곽으로 가는지,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마음을 읽는 각성자라도 오지 않는 이상에야……. 그리고 그런 각성자가 있다면 저희가 이렇게 조심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죠. 오히려 그렇게 경계하는 모습이 주변의 이목을 끌 것이라는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최수진은 박 기자의 퉁명스런 말에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박 기자님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질 필요가 있어요.”

 

  “예, 알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뚝 끊겼다. 지하철 안은 선로를 내달리며 나는 덜컹거리는 소리, 역마다 문이 여닫히고 사람이 오르내리는 소리와 여상스런 대화 소리 뿐이었다. 박 기자는 최수진의 관심을 끄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녀를 노려보는 대신 눈을 내리깔고 핸드폰에 집중했다.

 

  각성자에 의한 살인사건은 흔치 않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다. 아직 관문이 안정되지 않았던 시절엔 각성자 하나가 아쉬웠던 탓에 덮어놓고 쉬쉬하는 일이 많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곧장 감방으로 들어가고 만다. 하여 살인 사건을 일으키는 각성자는 정말로 정신에 이상이 있거나, 능력 행사 도중 우연히 휘말린 일반인이 죽는 사고사뿐이었다.

 

  그런데 일반인이 각성자를 죽였다. 박 기자는 인터넷 기사를 뒤적이는 것을 그만두고 허옇게 발광하는 화면을 노려봤다. 물론 각성자도 사람이다. 그들도 칼침 맞고 총알 맞으면 죽는 것은 매한가지다. 허나 그들에게 칼침 한 방이라도 놓으려면 최소한 같은 각성자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총은? 방심 상태의 각성자의 뒤통수에 총알 한 방 먹인다면야 못 죽일 것도 없지만, 그런 일이라면 이렇게 비밀리에 움직일 리가 없었다. 이미 정부가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전국을 쑤셔대는 탓에 특보가 쏟아질 테니까.

 

  결론은 간단했다. 각성자는 일반인이 죽일 수 없는 방식으로 죽었다. 배때지에 칼 한 방 쑤셔졌든, 몽둥이로 다져졌든……. 일반인은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장식이 아니다. 각성자 협회 또한 유명무실한 집단이 아니다. 그런데도 각성자가 죽은 사건에 고작 영세한 언론의 말단 기자가 나서고 있었다.

 

  박 기자는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그는 가치없는 기자였고, 잊혀져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지인에게 연락했던 것은 석달 전 결혼식이었다. 그 이후로 그의 전화기가 사적인 일로 울리는 일은 없었다. 박 기자는 문득 자신이 죽는다 하여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는가 잠시 생각해봤다. 박 기자는 창백해진 안색을 숨기기 위해 마른세수를 하던 자세 그대로 멈춘 채 헛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해도 그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사무실 내 동료가 빈 자리를 의뭉스레 쳐다보긴 하겠으나, 그게 심각한 관심으로 이어질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기 때문에 박 기자가 이 사건을 취재할 기자로 발탁된 것일까? 박 기자는 그 가설이 꽤나 그럴싸하다 생각했다.

 

  박 기자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슴이 말라 비틀어지는 듯 답답했다. 한산한 지하철 칸도, 맞은편에 걸터앉아 자신을 흘겨보는 각성자도. 모든 것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박 기자는 굳게 밀폐된 지하철의 창문을 깨버리고 그 텁텁한 역 안의 공기라도 마음껏 들이쉬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맞은편에서 각성자가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진다. 최수진은 박 기자의 바로 앞에 서서 말했다. 박 기자는 손아귀가 허옇게 변할 만큼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박 기자님, 이번 역에서 내려야 해요.”

 

  “이번 역에서 내리면?”

 

  박 기자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물었다. 수진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글쎄요, 어디 한가한 카페라도 앉아서 국장님의 지시를 기다려야겠죠?”

 

  천진한 대답이었다. 그녀의 대답 그 어느 구석에서도 음습한 음모나 살의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박 기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등허리가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도심보다는 덜 하나, 여전히 북적거리는 역에 내려선 최수진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역에서 5분 정도 걷다 보면 나오는 공원의 맞은편에 있는 고즈넉한 카페였다. 안개가 잔뜩 낀 날씨 탓에 어찌 보면 음산하기까지 한 카페였건만, 최수진은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종업원을 불렀다. 박 기자는 그녀의 주문이 끝나자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딱딱한 플라스틱 테이블 앞에 최수진과 마주 앉은 박 기자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국장님이 연락을 주신답니까?”

 

  “음, 그렇겠죠?”

 

  그렇겠죠 라니! 아침부터 이어진 비정상적인 사태의 연속에 신경이 극에 달한 박 기자는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린 박 기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불확실한 대답에 불안감만 자꾸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카페에서 기약도 없는 연락만을 기다리며 앉아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음, 굳이 카페에 있을 필요는 없죠. 심심하시다면 조금 돌아다니셔도 좋아요.”

 

  박 기자는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잠시 그녀가 정신병자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하여 최수진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그녀의 얼굴을 뜯어봐도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뻔뻔스럽게도 약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박 기자의 시선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박 기자는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 캐내는 것을 그만두고 그녀가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그녀는 박 기자가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다. 살인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병적으로 경계하던 그녀의 태도와는 동떨어진 발언이었다. 허면 박 기자에게 감시가 붙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멀리 떨어지더라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박 기자는 머릿속에서 두 가지 가정을 저울질하다 이내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다. 실제로 이런 능력을 가지고 기자가 되는 각성자도 많았다. 그들은 유명한 각성자들의 잡스런 사생활을 캐내거나, 정치인들의 더러운 뒷배를 후벼파 그들의 뇌물을 받아먹는 것을 즐겨하곤 했다.

 

  그렇다면 최수진도 그런 각성자인가?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졌다면, 어째서 이런 영세한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단 말인가. 어느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헤이즐넛 커피 나왔습니다.”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의 상념을 끊어낸 것은 카페 종업원의 알림이었다. 박 기자는 테이블에 못 박아뒀던 시선을 올려 코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쳐다봤다.

 

  박 기자는 최수진이 헤이즐넛 커피를 두 모금 마실 때까지 아메리카노에 손도 대지 않다가, 그녀가 세 모금 째 마시기 시작했을 때 간신히 입을 열었다.

 

  “수진 씨, 실례란 걸 알고 있지만……. 혹시 수진 씨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음, 어려울 건 없죠. 간단한 사물 기억 읽기 능력이에요. 길면 1시간 정도의 과거까지 읽을 수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잔 밑바닥에 붙어있는 작은 쪽지를 떼어내 박 기자의 눈앞에 흔들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이 쪽지는 국장님이 보내신 거예요.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죠?”

 

  박 기자는 굳어버린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최수진이 눈썹을 찌푸리며 종이에 집중할 때, 박 기자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의 축축한 밑바닥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최수진의 손이 허공을 더듬는다. 달싹거리는 입술에서 작은 단어가 드문드문 들렸다. 그 괴기한 광경이란 사물에 담긴 과거를 읽는 감각의 표상이겠지. 박 기자는 각성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여 박 기자는 그 감각이 어떠한 느낌인지 애써 상상하기보다 어째서 국장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통해 얘기를 전하지는 지에 대해 고민하기로 했다.

 

   커피잔 바닥에 붙은 종이라 함은, 종업원이 완벽하게 국장의 통제 안에 들어와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뿐인가. 종이 쪼가리를 준비한 지 한 시간이 넘기 전에 최수진이 카페에 도착해야만 했다.

 

  박 기자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렇게 기밀을 요하는 일이라면 출발 전 최수진에게 미리 귀띔을 하면 될 일이란 사실이었다.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통하지 않더라도 그녀에게 말을 전할 방법은 많았다. 허나 국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여 박 기자는 국장의 진의를 더듬어가는 데 있어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박 기자의 상념은 오래 가지 못했다. 최수진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종이를 입에 털어 넣고 당황 어린 표정으로 박 기자에게 말을 건넸다.

 

  “박 기자님, 상황이 약간 곤란하게 된 것 같아요.”

 

  “여기서 더 곤란하게 될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게 놀라운데요.”

 

  “박 기자님도 참,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건 없잖아요. 아무튼……. 여기서 말하긴 곤란하니, 자리를 옮길까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음, 그건 비밀이에요. 박 기자님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국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최수진은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지만, 일그러진 박 기자의 표정은 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박 기자는 턱 밑까지 치밀어오른 욕지기를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비밀입니까? 제가 알 수 있는 게 있기나 합니까? 이럴 거면 굳이 저를 데리고 올 필요가 있었습니까? 수진 씨 혼자 사건을 조사해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요.”

 

  “죄송해요, 박 기자님.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박 기자님이 필요하다는 것뿐이에요.”

 

  사과, 그리고 잠깐의 침묵. 박 기자는 천천히 마른세수를 하다 한숨을 삼켰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최수진의 정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수진의 태도는 각성자라고 하기엔 이상하리만큼 낮은 면이 있었다. 어찌 보면 비굴하기까지 한 태도는, 각성자가 비각성자에게 보일 태도라고 하기엔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