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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기가 뜯어 먹히는 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더 이상 유나도 고통을 꾹 참을 수만은 없던 것인지, 입술이 터지도록 질끈 깨물던 입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된 거지?

 

유나는 지금 죽는 거야, 나도 죽는 건가, 잡아먹힐 거야......’

 

단이 심상 세계에서 공포에 질려 하는 순간에도, 을종 보행기의 들썩임은 멈추지 않았다.

 

아스팔트 위로 흩뿌려지는 보행기의 검 붉은색 물감은 그칠 줄을 몰랐다.

 

씹고 뜯고, 핥고 찢어발겼다.

 

밀려오는 고통과 격해지는 흔들림이 유나의 정신을 좀 먹어갔다.

 

이제는 보행기의 조종간이 유나를 위한 관이 되어갔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기 위해서,

 

머릴 처박고서 조금이라도 더 살점을 뜯어내려는, 괴수들을 막아보기 위해서

 

이젠 힘조차 주기 힘든 손을 움직여 허우적거렸다.

 

그러면서도 단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둘 순 없었다. 아니, 자신이 지금 뜯어 먹힌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라도 단을 지켜봤다.

 

이젠 조종간에서 벗어나 웅크린 단이 보였다.

 

제발, 제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망쳤으면 했다.

지금이라면 조금 늦지 않았을 수도 있다.

 

긴급 탈출 규정을 발동한다면 단은 충분히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나가 소리쳤다.

 

“단, 긴급 탈출 규정을 실행!”

 

각혈이 유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목구멍 속에서 터져 나오는 피가 을종 보행기의 조종간을 더럽혔다.

 

쿨럭거리며 침과 피를 함께 쏟아내는 유나와 웅크린 단의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새하얗게 질린 유나가 내지른 외마디가 귀에 들어온다.

 

계속되는 흔들림에도 조종간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유나가 보인다.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질러도 모자를 유나가, 떨리지만 담담히 말했다. 입가에 미소를 띤 듯했다.

 

“지켜줄게”」

 

「‘죽여 버리겠어’

 

“...... 갰어”

 

단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단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유나는 점점 더 초조한 듯 보였다.

 

이윽고 다시 조종간에 앉은 단의 모습에 드디어 자신의 권유를 들으려는 건가 싶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더 버티는데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그 순간 단의 통신에서 이제는 뚜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여 버리겠어”

 

그렇게 말을 마친 단의 갑종 보행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유나의 눈동자가 경악에 물 들어갈 무렵, 통제탑의 인원들도 갑종 보행기의 변수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갑종 보행기 기능 회복과 더불어 동기율 급속도로 상승 중.....”

 

체념한 체, 손아귀에 얼굴을 파묻은 부사령관이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갤 들었다.

 

‘말도 안 돼’

 

화면이 보여주는 수치들은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조종사와의 통신 연결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을종 보행기와 연결하도록”

 

“을종 보행기, 활력 징후 감소,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무엇하나 되는 게 없었다.」

 

「분명히 구멍 나 찢겨 있어야 할 갑종 보행기의 복부가 새살이 돋은 듯 메워져 있었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뚝 일어선 갑종 보행기가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보행기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의 모습을 한 갑종 보행기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유나는 의식을 잃었다.

 

들러붙은 괴수들이 을종 보행기의 하반신을 게걸스럽게 뜯어 먹는 장면이 송출됐다.

 

다시금 일어난 갑종 보행기 따윈 관심도 없는 듯 박아 넣은 머릴 꺼낼 생각조차 않는 듯했다.

 

갑종 보행기가 증기를 배출하듯 온몸에서 아지랑이를 피어 올렸다.

 

천천히 을종 보행기에 들러붙은 괴수들에게 다가간 갑종 보행기가 숙인 상체를 크게 젖히며 오른손으로 괴수의 어깻죽지를 잡아챘다.

 

어깨 위를 허용하고서야 또 다른 보행기의 존재를 눈치챈 괴수였지만, 그것은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오른손으로 어깻죽지를 붙잡은 갑종 보행기가 왼손으로 그 괴수의 머릴 으스러뜨리듯 움켜쥐고선 부욱 잡아 뜯었다.

종이가 찢기는 듯한 느낌으로 쉽게 찢어진 괴수가 고성조차 지르지 못하고 검붉은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을종 보행기 위로 엎어졌다.

 

한참을 포식하던 두 마리의 괴수가 자신의 동포를 찢어버린 갑종 보행기를 올려다봤다.」

 

「“저, 저게 보행기?”

 

통제탑의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극도로 팽창된 인조 근육과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이제 더 이상 그것을 보행기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갑종 보행기 조종사와의 통신 연결은 아직 인가?”

 

“통신 회선 접속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동포의 죽음에 몸을 일으켜 보행기를 제압하려던 괴수의 시도는 뻗어오는 손을 낚아챈 갑종 보행기의 행동에 좌절됐다.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괴수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종 보행기에게 붙잡힌 괴수는 양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런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보행기의 오른발이 빠르게 솟구치며 괴수의 복부를 걷어찼다.

 

대기가 파열음을 내며 터졌다.

 

괴수는 양손을 남겨 두고서 저 멀리 콘크리트의 숲으로 형편없이 날아가 처박혔다.」

 

 

「“심, 심도 5급 괴수 생명 신호 사라졌습니다.”

 

“저건 더 이상 보행기가 아니잖아, 저래서야 괴수 아니야?”

 

통제실이 술렁였다.

 

“갑종 보행기 재기동!”」

 

「이제 더 이상 이런 장난감은 필요 없다는 듯, 괴수의 양손을 던져 버렸다.

 

갑종 보행기의 관심은, 을종 보행기에서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킨 괴수에게로 넘어갔다.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증기의 아지랑이, 원래라면 필요 없을 기관인 입이 벌려진 갑종 보행기의 모습은, 보행기라고 하기에는 이질적이었다.

 

그 보행기라고 하기 어려운 존재가, 사람의 마음을 가진 듯, 싸늘한 시선으로 괴수를 노려봤다.

 

엉거주춤 자세를 일으킨 괴수와, 언제든 달려들 것 같은 갑종 보행기 간의 기묘한 대치는,

 

갑종 보행기가 먼저 손을 뻗음으로써 깨졌다.

 

갑종 보행기의 손아귀가 괴수의 머리통을 잡아채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짓쳐들어오는 손아귀를 쳐내려던 괴수의 손짓은 보행기의 우악스러운 힘을 이기지 못했다.

 

한 손으로 괴수의 머리통을 붙잡고서 들어 올리는 보행기의 전완근이 꿈틀거렸다.

 

계속되는 압력에 괴수의 두개골이 우그러들었다. 괴수의 비명은 갑종 보행기의 손바닥에 막혀 입안을 떠나지 못했다.

 

갑종 보행기의 손을 할퀴고 잡아 뜯던 괴수의 손짓은 다급해지다가도 이내, 천천히 늘어졌다.

 

머리통을 즙 짜듯 쥐어짜낸 갑종 보행기가, 이제 더는 이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 전과 같이 집어던졌다.

 

그 괴수 또한 그전의 괴수와 마찬가지로, 콘크리트의 숲으로 날아가 처박혀 새카만 흙먼지 구름을 일으켰다.

 

마침내 을종 보행기를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세 마리의 괴수가 이해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 갑종 보행기에게 침묵 당했다.

 

상반신만 남은 을종 보행기 앞에 다가간 갑종 보행기가 우뚝 멈추더니 자세를 무너뜨리고서 마치 네발을 가진 짐승처럼 수그렸다.

 

을종 보행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듯, 한동안 그러고 있던 갑종 보행기가 입을 벌리더니 구슬픈 울음소리가 퍼졌다.

 

울음은 갑종 보행기가 을종 보행기의 머리를 삼키기 전까지 계속됐다.」

 

「“말도 안 돼......”

 

삼켜버렸다.

 

보행기가 보행기를, 괴수가 보행기에게 그러하듯 입안으로 인조 육신을 뜯어 삼켰다.

 

조종간이 들어가는 경추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깔끔하게,

 

을종 보행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가 갑종 보행기의 입안에서 흘러내렸다.

 

‘이 새끼, 우리 편 아니었어......?’

 

부사령관이 속으로 신음성을 삼켰다.

 

그 끔찍한 장면은 길지 않은 시간에 벌어졌지만, 통제실 전원이 지켜보기엔 충분했다.

 

누군가가 헛구역질을 하며 먹은 것을 게워내려고 하는 듯했다.

 

갑종 보행기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을종 보행기를 마침내 다 삼켜버린 듯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조그마한 희망이 되어 속 안의 불 꽃을 지피려던 찰나, 그 희망이 깨져버렸다.

 

“을종 보행기, 대파...... 통신, 활력 징후 감지되지 않음......”

 

이젠 의미조차 찾을 수 없는 보고가 경악에 찬 통제사 한 명에게서 흘러나왔다.

 

을종보행기의 머리를 삼킨 갑종 보행기가 그 자세 그대로, 도심을 거닐었다.

 

네발의 짐승은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꿈속 같다.

 

‘단......’

 

웅크린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단의 머리 위로 따뜻하기 그지없는, 하지만 가녀린 손이 얹어진다.

 

포근하기 이를 데 없는 온기에 단은 눈물 자욱이 가득한 얼굴을 들고서 자신의 머릴 쓰다듬는 이를 바라봤다.

 

‘단......’

 

다시금 들려오는 따뜻한 목소리에 단은 울음을 터뜨리며 뭔가를 말했다.

 

너무나도 서럽게, 두서없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단의 응석과 투정, 그것을 말없이 들어주던 이가 이윽고 단을 품에 안았다.

 

‘단, 지켜줄게’

 

그 목소리에 단은 울음이 멎는 걸 느꼈다.

 

불안함이 씻겨간다. 품 속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희미한 의식 너머로, 일정한 박자의 흔들림이 단의 머릿속을 흔들어 놨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뚜렷해지는 의식과, 낯설지만 익숙한 흰색 무기질의 천장이 이곳이 병실이라는 사실을 알 게 해줬다.」

 

 

「유례없는 괴수 침공이었다.

 

심도 3등급 괴수와 10 여체 이상의 5,6 등급의 괴수 침공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살아남았다.

 

‘저 소년을 통해서’

 

작전이 파국에 치달을 무렵, 기묘한 고성과 함께 네 발 짐승처럼 도심을 활보한 갑종 보행기는,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과 같이 잔여 괴수들을 찾고 뜯고 찢고 죽였다.

 

어린애들 장난처럼, 그토록 손쉽게 괴수들을 찢어발기는 광경은 들은 적도 본적도 없던 것이었다.

 

 

마지막 괴수를 처리하고, 심도 3급의 괴수의 속을 파헤치던 갑종 보행기는 소름 끼치는 울음을 내뱉더니 쓰러졌다.

 

회수반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희멀건 액체와 함께 미동도 없이 쓰러진 을종 보행기의 조종사와 옆으로 누운 듯 엎어진 갑종 보행기가 있었다.

 

먹은 것도 없을 텐데, 헛구역질을 하는 소년이 안쓰러웠다.

 

“정신 차렸나?”

 

게워내려도 게워낼 게 없을 소년이 입가를 소매로 훔쳤다.

 

“부사령관님”

 

힘없는 목소리다.

 

“상황은......”

 

부사령관이 단의 말을 끊었다.

 

“상황 종료다.”

 

“어떻게”

 

“자세한 건 곧 열릴 강평회에서 대원들과 함께 확인하도록,”

 

“혹시, 모두들 살아남았습니까?”

 

“살아남은 대원은, 두 명이 끝이다.”

 

초조해 보이는 눈동자가 부사령관을 쫓았다.

 

“그러면 을종 보행기의 조종사는......?”

 

“옆에 있지 않나?”

 

떠나가는 부사령관의 발걸음 소리가 일정한 박자를 만들어냈다.

 

옆 침상에 누워 조용히 숨소리를 골라내는 유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녀의 목숨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것이던가, 다른 대원 7명의 소식에서 느꼈던 불안함은 유나의 생존으로 인한 안도감으로 씻겨 내려졌다.

 

그런 스스로가 역겨웠다.

 

형편 좋은 소리다.

 

결국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첫 만남에서 불안함을 느꼈던 유나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안심을 느낀 스스로가 역겹다.

 

잘 떠오르지 않는 꿈들의 조각 속에서, 자신을 따뜻이 품어준 이가 유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속으로 품은 내가, 미웠다.

 

내일은, 아니면 그다음은?

 

자신은 또 그렇게 타인의 삶을 외면해버리지 않을까?

 

작전 중 마지막으로 들었던 유나의 입에서 나온 지켜줄게란 말이 기억났다.

 

내가 지켜주기로 했는데, 유나를 지켜주기로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타인을 원하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주제에,

 

무기력함이...... 자신을 좀 먹는다.

 

더 이상, 유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눈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