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이 뭐지?”

 

생각에 빠진 단이, 유나의 물음에 답이 없자 다시 유나가 입을 뗐다.

 

“단......”

 

얼빠진 목소리가 단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응?”

 

“......애인이 뭐야?”

 

그녀에게서 나올 거라곤 예상조차 못한 질문에 단이 얼어붙었다.

 

다시 멈춰선 단이 고갤 숙이고서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자, 묘한 불안감에 유나가 맞잡던 손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말해줘”

 

애처로이 묻는 유나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은 듯 했다.

 

“그, 그 말은 누구한테 들은 거야?”

 

“아까, 그 여자......”

 

신경 안 쓰나 했는데 신경 쓰고 있었나,

 

홍시처럼 붉어진 단이, 그러나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유나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관계라고 해야 할까?”

 

두루뭉술한 단의 대답에 유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속으로 단이 말한 것을 되뇄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랑?’

 

단의 설명에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어'

단을 계속 바라봤지만, 쑥스러운 시선 말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해, 고갤 바로 했다.

 

앞서 가듯 걸어가는 단의 뒤를 따르며 조용히 고민에 빠졌다.

 

단의 손바닥이 축축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흰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특수 병동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그랬던 그 풍경이, 가까워 오는 그 풍경이 싫다.

 

유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그리고 땀 흘리며 걷는 단의 옆모습을 본다.

 

왜 싫은지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지도 못했는데, 유나와 단은 병동 입구에 다다랐다.

 

단이 유나의 손을 놓으려 했다.

 

맞잡은 손이 놓아지려는 찰나, 유나가 단의 손을 쥐고서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 유나를 지켜보던 단이 곤란하다는 듯 웃다가, 이내 유나의 뜻대로 병동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다시, 걸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했다. 

 

이윽고 병실 앞, 유나가 멈춰 섰다.

 

따라 멈춘 단에게 유나가 뒤돌아보지 않고서 말한다.

 

“.......같이 들어가”」

 

「그저 데려다주는 것만 생각하고 따라 온 단이, 갈등에 빠졌다.

 

그 갈등은 자신을 잡아끄는 유나의 손길에 금방 해소됐다.

 

‘엇’하는 사이에 익숙한 병실의 풍경이 단에게 다가왔다.

 

4개의 병상, 이젠 흔적조차 남지 않은 자신의 자리, 그리고 먼지 하나 없이 쌓여있는 책들, 익숙했다.

 

그제야 손을 놓고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가는 유나, 이 병실 안에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안도감일까,

 

그렇게 병상에 앉은 유나가,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단이 달려 나가 유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단추를 풀다 말고, 자신을 막아서는 단의 행동에 의아함이 든 유나가 입을 열었다.

 

“...... 왜?”

 

“그건 내가 물어 볼 말인데!”

 

“......무엇을?”

 

“갑자기 단추는 왜 푸는 거야!”

 

“불쾌해”

 

땀으로 흠뻑 젖은 단보단 덜했지만 역시 유나도 걸어오느라 땀을 조금 흘린 탓인가, 축축한 겉옷이 들러붙어 불쾌하구나, 하지만 자기 앞에서 갑자기 저러는 건 아무리 그래도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있는 데서 벗으면 안 되는 거잖아!”

 

“...... 어째서?”

 

저도 모르는 새에 단이 소리쳤다.

 

“여자 아이가 남에게 몸을 보여선 안 돼!”

 

“...... 하지만 씻고 싶어”

 

“그럼, 나 이제 갈 테니까”

 

어느새 단의 손을 벗어난 유나의 손이 단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앙 다문 입새로, 불만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 그건 싫어”

 

병실을 같이 쓰던 그때도 이랬던가? 아니, 애초에 그땐 정신이 없었으니까 유나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선 하나도 몰랐다.

 

‘유나는 돌아오면 바로 씻는구나, 아니 누구나 씻는 건가’ 하는 멍청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씻고 싶다. 하지만 씻으면 단이 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은 왜 씻는 걸 못하게 하는 걸까, 씻는 다는 행위는 위생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데, 혹시 단은 그것을 모르는 걸까, 그렇게 생각이 닿자 단을 위해 입을 열었다.

 

“씻는 것은, 위생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행동......”

 

“아니 그걸 내가 모르는 게 아니라,”

 

다행이다. 단은 위생의 중요성을 아는 듯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갸웃하던 유나가 물었다.

 

“그러면 왜......?”

 

“아니, 잘못 짚었어, 내 앞에서 벗으려고 하는 게 문제라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는 흘끗 흘끗 자신을 흘겨보며 말하는 단이 이상했다.

 

“하지만 내가 씻으면 단이 가 버리는걸......”

 

잠시 고민하던 단이 퍼뜩 고개를 들고서 무언가 깨달은 듯 유나를 불렀다.

 

“유나, 나 안 갈게, 밖에서 기다리면 되지?”

 

그러고선 병실 문밖을 지나 쏜살 같이 나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유나가 따라 나섰지만, 그 발걸음 소릴 들었는지 단이 문 너머로 외쳤다.

 

“빨리 씻어!”

 

그러곤 문을 닫는다.

 

유나는 단이 왜 저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씻는 중에, 단이 그냥 가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저 단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물기 먹은 머리칼을 채 말리지 못한 유나가, 병실 밖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유나가 단을 불렀다.

 

“단”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단이 뒤돌아봤다.

 

자신을 바라봐주는 눈길이 좋았다.」

 

「이윽고 목욕을 마친 유나가, 자신을 불렀다. 한적한 바깥 풍경을 보던 걸 멈추고, 목소리가 나온 방향을 찾았다.

 

유나의 덜 마른 머리칼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는 유나를 따라 병실에 들어가고서 

 

지금,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배경으로 책 읽는 유나를 지켜봤다.

 

책장이 넘어 가는 소리가 잔잔한 노래 같았다.

 

막 들어갔을 때는, 나더러 씻으라고 권유하는 유나를 뜯어 말렸다. 

 

셔츠를 풀어주려는 유나의 손길을 뿌리치고서 자신은 집에 가서 씻겠노라 외쳤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차례를 보낸 직후

 

잠시 시무룩해 보였던 유나였지만, 아무래도 좋은 듯 했다. 

 

유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누운 채, 책 한 권을 펼치고서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집에 가겠다. 했을 때의 불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 있어주는 것이 퍽 안심되나 보다.

 

‘하지만 이러고 계속 있을 수 도 없는 노릇인데...... 뭐, 지금은 상관없나?‘

 

단조로운 시간에 잠시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던 유나가, 규칙적인 숨소리에 고갤 돌리고 단을 바라봤다.

 

모로 누운 채, 살며시 감은 두 눈이 그가 자고 있단 사실을 알렸다.

 

읽던 책을 덮고, 단에게 다가갔다.

 

잠시 서서 바라보던 것을 그만 두고, 단의 옆에 함께 누웠다.

 

1인용 병상이지만 둘이 눕기엔 딱 맞았다.

 

마주보고 누운 유나가 단의 가슴팍에 머릴 묻었다.

 

단의 냄새가, 땀 냄새와 섞여 느껴졌다.

 

어느새 바깥은 높게 떠올랐던 해가 저물어 갔다.

 

쌀쌀한 바람이 창문 너머로 불어와 단의 몸을 훑고 지나가자, 단이 몸서리 쳤다.

 

추운 걸까, 싶어 창문을 닫으려 했지만, 자신을 붙잡는 손길에 그러지 못했다.

 

잠이 깬 걸까, 일어서려다 붙잡혀 엉거주춤한 몸을 그대로 두고서 고갤 들어 단을 바라봤다.

 

깊게 내려앉은 눈꺼풀에 그건 아닌 듯 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갈망하는 단의 몸짓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마칠 즘 단이 유나를 끌어안았다.

 

이래서는 창문을 못 닫는데 하던 걱정도 잠시, 온몸으로 단의 따스함이 전해졌다.

 

단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느리게 뛰는 단의 심장이 가슴팍 너머로 유나의 머릴 쓰다듬듯 뛰었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무슨 느낌인지는 스스로 규정하기 어렵다.

 

무언가, 무언가 자신은 알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윽고 단이 끌어안아 갇힌 팔을 조심스레 빼낸 유나가

 

살며시 단의 등을 쓸었다.

 

고른 숨결로 들썩이는 등에 맞춰 위 아래로 쓸었다.

 

방금 알아 낸 단어의 뜻을 속으로 외웠다.

 

‘사랑은 어떤 사람 또는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걸까?

 

그렇다면, 그게 맞다면 자신은 단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단도 자신을 사랑할까?

꼬리에 꼬릴 물던 의문은 불안한 마음으로 변한다.

 

단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봐줄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그를 깨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두렵다.

 

불안하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달빛과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가 창문 너머로 흐릿한 모습을 띠었다.

 

얼마나 잠든 걸까, 유나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질였다.

 

‘머리카락?’ 정신을 차리고서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품속에, 유나가 담겨 있었다. 

 

‘말도 안 돼’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렇게 속으로 외치며, 유나를 밀어내려던 찰나,

 

조금씩 들썩이는 유나의 어깨와 가슴팍의 축축한 감각이 느껴졌다.

 

혹시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울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조심스레 유나를 불렀다.

 

“유나”

 

역시나 자고 있는 게 아녔던 건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들던 유나가 다시 단의 목에 얼굴을 묻고서 비볐다.

 

옷에서 느껴지던 축축하지만 찬 느낌이 목에서 느껴졌다.

 

분명히 울고 있다.

 

단이 유나를 살짝 밀고서 시선을 마주쳤다.

 

“유나?”

 

울은 탓에 눈이 살짝 부어보였다.

 

“......응?”

 

“왜 우는 거야?”

 

달빛을 머금은 유나의 눈이 반짝였다.

 

“...... 무서워”

 

‘무섭다니, 뭐가 무섭다는 걸까?’

 

무섭다며 다시 목을 파고들어 온기를 찾아 비비는 유나가 고양이 같단 생각이 들었다.

 

‘땀 냄새 날 텐데......’ 그런 걱정을 속으로 삼켰다.

 

덜덜 떨리는 유나의 손이 자신의 등을 끌어당겼다.

 

무엇이 이토록 소녀를 불안케 한 걸까, 소년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단이 그대로 유나의 등을 토닥였다.

 

단의 행동이 조금 효과를 보인 탓일까, 부들대던 그녀의 몸이 차차 잦아들었다.

 

어느 정도 안정된 걸까, 안아 준 그 상태로 물었다.

 

“왜 무서운 걸까?”

 

“...... 몰라”

 

그러더니 품속에 묻은 얼굴을 떼고서 시선을 보내는 유나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단을 사랑하는 거야”

 

너무도 쉽게 사랑을 입에 올린 소녀의 말에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단이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단을 무시하고서 유나가 말했다.

 

“원래 사랑이란 건 아픈 것?......”

 

혹시 유나가 착각하는 게 아닐까 그녀는 감정 부분에 있어서 조금 모자라다. 

 

단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유나, 혹시 사랑이란 게 뭔지 아니?”

 

유나가 말했다.

 

“사랑은 어떤 사람 또는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그렇게 유나가 멍하니 단을 바라봤다.

 

“나는 단을 사랑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녀는 진정으로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유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단이 가까이 있으면 즐거워, 행복해 하지만 

멀어지면......, 보이지 않으면 가슴 한 쪽이 아파, 내가 좋아하는 걸 함께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단이 날 싫어할까 봐 무서워”

 

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숨이 차도록 쏟아 낸다.

 

“단이 나를 밀어낼까 봐 무서워, 그때처럼 나를 신경 쓰지 않을까 봐 무서워, 무시할까 봐 무서워,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서워”

 

뭐라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유나의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곤히 자던 단의 품속에서, 자꾸만 들던 응어리진 생각들을 단에게 쏟아 냈다.

 

그렇게 자신의 말을 듣던 단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미동도 없이 자신을 지켜본다.

 

심장소리가 터질 것 같이 귓속을 울렸다.

 

역시, 아무런 말 하지 않는 게 맞았다.

 

다시 단이 자신을 외면하리란 생각이 든다.

 

자신을 무시하던 지난날의 단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불안한 생각에 더 이상 단과 눈을 마주칠 자신이 들지 않아 다시 단의 온기를 탐하듯, 가슴팍을 파고든다.

 

그러고서 단을 터질 듯 품에 안았다.

 

그런 유나를 단이 토닥여줬다.

 

이건 무슨 의밀까, 생각이 깊어질 무렵, 단이 입을 뗐다.

 

“유나”

 

다시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단을 쳐다볼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