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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는 거야?”

 

“네가 바라던 소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하얀 빛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소녀는 차갑게 말했다.

 

‘내가 이런 걸 원했던가,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칠 뿐이야......’

 

자신을 바라보던 소녀가 말했다.

 

“한 번 실행된 초기화는 이제 다시 되돌릴 수 없어”

 

잠시간의 침묵, 소녀가 침묵을 깼다.

 

“바라지 않았던 거야......?”

 

슬픈 눈빛의 소녀가 자신을 걱정스레 살폈다.

 

주저앉은 소년이 이젠 지긋지긋하다는 듯, 씹어뱉었다.

 

“모르겠어, 아무것도,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

힘없는 목소리가, 텅 빈 공간을 채웠다.

 

그런 소년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뭘까, 소녀의 따뜻한 살갗이 느껴졌다.

 

어미 새와도 같이, 자신을 품어주는 소녀

 

“힘들었니?”

 

힘없는 소녀의 목소리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그건 분명 물음에 불과했지만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들락날락하는 뜨거운 숨결에서, 소녀의 차가운 눈물이 느껴졌다.

 

정수리부터 적셔왔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어쩔 건데?’ 속으로 물었다. 누구에게 묻는지는 제 자신도 몰랐다.

 

 그저, 소년은 자신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등을 떠민 모든 대상에게 울분을 토하는 걸지도 몰랐다.

 

“단, 다시 시작하고 싶어?”

 

울음을 멈춘 소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년에게 물었다.

 

소녀의 온기를 느끼던 소년은, 소녀의 물음에 소리 질렀다.

 

“닥쳐! 닥치라고, 씨발년이......”

 

자신을 밀어내는 손길에 힘없이 밀려난 소녀가 그 힘을 못 이기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녀가 고개를 들고 혐오로 가득 찬 소년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했다.

 

우뚝 서서, 한참을 쏘아보던 소년이 손을 치켜들고서 소녀의 목을 졸랐다.

 

그 억센 힘에 소녀가 소년의 힘에 몸을 맡겼다.

 

강한 충격이 소녀에게서 느껴졌다.

 

목이 졸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소녀를 진짜로 죽여 버리겠다는 듯 소년의 손아귀는 그 힘을 더 해갔다. 

 

반항조차 하지 않는 소녀가 가증스러웠던지, 소년의 손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된다. 

 

소년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끝까지, 그저 무력하게 당해주는 소녀의 모습에, 소년의 손은 힘을 잃고서 맥없이 추락했다.

 

급하게 숨을 쉬느라 거친 숨소리를 내는 소녀의 모습에 주저앉은 소년이 공간의 천장이라고 해야 될 부분을 쏘아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소녀는, 누구 보는 이 없음에도 눈물 한 방울을 바닥 아래로 흘렸다.

 

“단이 바라던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구나”

 

“나는 너의 행복을 바라”

 

우두커니 천장을 보던 소년이 다시금 그 시선을 소녀에게로 옮겼다.

 

소녀는 목 졸려 넘어진 자세 그대로였다.

 

소년이 스스로에게 말하듯 불안하게 읊조렸다.

 

“모두 죽었어, 모두 없어, 모두가 없는데 나는 살아있어, 돌아갈 방법은 없어, 어떻게 해야 하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소녀가 단을 따뜻하지만 젖은 눈길로 바라봤다.

 

“나를 죽여 줘”

 

자신을 죽이려던 소년에게 다시금 자신을 죽이라 부탁한다.

 

“돌아가게 해줄게”

 

힘들게 입을 뗀, 소녀의 입이 처음의 선언을 부정한다.

 

소년은 제 몸이 떨리는지도 모르는 체, 소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소년에게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으며 머리에 새기라는 듯, 느리게 말했다.

 

“심장을 꺼내줘, 그걸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소년의 얼굴은 공포로 물 들어갔다.

 

원래대로 돌릴, 기쁜 방법을 가르쳐 주었음에도, 죽을 표정을 짓는 소년이 의뭉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소년이 소리 질렀다.

 

“전부 꺼져버려!”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존재가 만들어 낸 모든 생명체들보다도 소중한 소년의 절망이 소녀에게 전염된다.

 

담담하던 소녀의 안색이 소년과 마찬가지로 검게 물 들어갔다.

 

같은 말만 반복하는 소년의 행동을 말리려고도 했지만 엄두가 서질 않는다.

 

안절부절하던 소녀가, 소년의 말에서 단서를 찾아 새하얀 공간을 그 가녀린 손으로 찢었다.

 

그 틈새로, 원래 소년과 소녀가 속했던 세상이 드러났다. 밝은 햇살이 새하얀 방으로 들어찼다.

 

같은 말을 내뱉던 소년이 이윽고 그 찢어진 틈새로 몸을 옮겼다.

 

소녀도 소년이 지나간 그 길을 따라나섰다.

 

한참 후, 갈색빛 해안가의 모래사장에서 소년은 멍하니 수평선 너머를 지켜봤다.

 

수평선 너머로 누군가 올 것 인양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도 함께 그 자리를 지켰다.

 

밀물과 썰물 소리가 감미롭게 섞여서 그들의 귓가를 때렸다.

 

석양이 그들을 비추고서 해가 산 너머로 저물 때까지 수평선을 바라봤다.

 

해가 모습을 다 감출 무렵, 쌀쌀한 바닷바람이 소녀와 소년을 할퀴었다.

 

추위를 느낀 소녀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소년의 몸에 기대어 갔다.

 

마침내 몸이 닿았다. 

 

소녀가 소년의 반응을 살폈다.

 

소년은 아무래도 좋아 보였다.

 

그저 멍하게, 어둠으로 물 들어가는 수평선을 처음과 마찬가지로 지켜봤다.

 

소녀가 소년을 어미 새 마냥 품에 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녀의 온기에서 따뜻함을 느낀 탓이었을까, 소년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조심스러운 소녀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그렇게 토닥이고 쓸어주길 한참, 굶주릴 소년이 걱정됐다.

 

그렇게 품속에 안긴 소년을 내려다 봤다.

 

자신에게 기쁨과 사랑, 즐거움, 슬픔을 가르쳐 준 소년이 한 없이 작아 보였다.

 

너무 작아서, 이대로 계속 같이 있다가는 자신의 존재에 묻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가슴을 베개 삼아 품에 기댄 소년은, 그때의 강인해 보였던 소년과는 달랐지만, 분명 지난날의 소년이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그 날의 추억을 간질였다.

 

자장가를 불렀다.

 

소년의 눈은 미동도 없이 천천히 깜빡였지만 소녀의 자장가는 소녀의 추억과 함께 멈추지 않았다.」

 

「익숙한 천장, 크레졸과 포름알데히드의 냄새가 떠나지 않는 공간은 소년과 만나기 전 소녀가 곧잘 지내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소년과 만났다.

 

이따금 창문 너머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서는 언제나 같은 풍경,

 

가끔 있는 실험을 제외하고서, 소녀는 이곳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스스로에게 해 본 적조차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왔다.

 

처참한 몰골, 희미한 활력 징후의 비프음이 불협화음의 박자로 조용한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그들이 소년을 두고 떠나갈 때 즈음, 마지막까지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던 그 사람

 

딱딱한 표정만이 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차가워 보이던 그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던 시선을 던졌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런 감정을 허용했던 걸까?

 

“...... 교수님?”

 

교수라 불린 그 남자가 소녀를 향해 돌아봤다.

 

아마도 자신의 얼굴이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마른 세수를 하던 교수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말을 던져놓고서, 교수라 불린 남자는 흰색 가운에 손을 푹 찔러 넣고 병실을 떠나갔다.

 

다시 돌아와서 지금, 깊은 어둠만이 가득한 이곳 수면에 들어가야 할 시간은 이미 지나버린 지 오래지만, 교수가 보였던 감정의 대상에 대한 소녀의 의구심은 깊어만 갔다.

 

소년이 눈을 뜨고서 조금이나마 의식을 차리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활력 징후가 다시금 뚜렷하고 규칙적인 소리를 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소년의 의식은 그것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게 분명했다.

 

그가 의식을 차렸단 생각이 들었던 것은, 여느 때와 같이 교수와 그 소년의 관계에 대한 의문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깊은 밤이었다.

 

뚜렷한 활력 징후 너머로, 소년의 목소리라고 짐작되는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엄마를 찾는 걸까?

 

계속되는 소년의 중얼거림에, 소년에게 다가 섰다.

 

중얼거림은 이제 분명한 소리로 소녀의 귓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마를 찾는다는 소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그 소리만큼은 분명히 들렸으니까,

 

소년은 엄마를 부르며 애원했다.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소녀는 그저, 그 악몽이 끝날 때까지, 소년의 곁에서 밤을 보냈다.

 

그런 소녀를 발견한 것은 교수였다.

 

소년의 옆에서 쪼그리고 앉은 소녀를 발견했다.

 

교수는 소녀를 깨웠다.

 

 

눈을 뜬 소녀는 교수를 빤히 쳐다봤다.

 

교수의 일련의 행동에서 소녀는, 그날 보았던 교수의 감정이라고 할 만한 그것을 자신의 착각으로 잘못 보았던 걸까?

 

실험실로 가던 중간, 소녀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 교수님, 그날의 행동은 어떤 의미?”

 

교수와 단둘이 걸어가는 그 복도에서 소녀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과 같은 질문이다.

 

대답을 얼버무리고서, 실험실로 향하던 교수가 입을 열었다.

 

“유나, 조만간에 출격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 출격, 명령?”

 

“명령이다.”

 

출격을 명령 받은 소녀에게서는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을종 보행기에서의 회선이 끊어졌습니다!”

 

바쁘게 송신 화면을 쳐다보며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회선이 끊어졌다고 소리친 목소리의 주인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조종사의 활력 징후 발견되지 않음!”

 

사람들이 숨 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침묵한 관제실의 적막함을 깬 것은, 이목이 집중된 사람의 말소리였다.

 

“괴수는?”

 

 

자신을 돌아보던 남자가 다시금 모니터를 보며 손을 바쁘게 놀렸다.

“아, 괴수의 생명 신호는 감지되지 않습니다!”

 

“회수반을 파견하고 조종사를 구출하도록”

말을 마친 남자는 집중된 이목 속에서, 관제실을 떠나갔다.

 

보행기가 날아가며 처박혔다. 

 

흘끗 보이는 보행기의 그을린 장갑과 피어오르는 열기가 그간의 사투를 말해줬다.」

 

「‘익숙한 천장이다.’

 

그렇게 흰색과 무기질의 천장을 바라보던 소녀의 코끝으로, 익숙한 약품 냄새가 맴돌았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괴수 섬멸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걸 의미하겠지, 그렇게 생각을 마친 소녀는 소년이 누워있을 방향으로 욱신거리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깊은 잠에 빠져있었지만, 소년의 상태는 예전보다 많이 나아보였다. 전신을 감싸던 깁스도 어느새 인가 하나둘씩 사라졌다.

 

소녀는 성치 않은 몸을 일으키고서 소년의 곁으로 다가갔다.

 

의식을 잃기 전, 소녀는 이것이 마지막이라 짐작했다만, 이렇게 오늘은 왔고 소녀의 의식은 다시금 깼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먹먹해지는 가슴속 깊은 곳의 감정을 소녀는 몰랐다. 그저 반복되는 일상의 상실에 대한 불편함이지 않을까?

 

이윽고 소녀는 소년의 축 늘어진 오른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

 

따뜻하다.

 

그런 소년의 온기를 느낄 무렵, 소년의 입에서 무어라 말이 흘러나왔다.

 

“엄마......”

 

소년의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가 그리운 걸까?

 

소년의 오른손을 쥔 소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소년이 말하는 잠결에 말하곤 하는 엄마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소년에게서 그토록 중요한 존재일까?

 

하지만 손을 잡고서 소년의 말을 듣자 하면, 가슴속이 따뜻해져왔다.

 

느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마침내 소년이 의식을 깬 것은, 소녀가 돌아온 그날 밤이었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소년에게 처음 다가섰을 때와 같았지만, 그 내용은 달랐다.


“누구.....?”


힘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소년의 눈동자가 소녀와 마주쳤다.


“대괴수 전담 부서 소속 갑식 을종 보행기의 조종사, 한유나”


소년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소녀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소녀에게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대답을 들은 소년은 이윽고 자신의 오른손이 소녀에게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는 소년의 손을 마찬가지로 소녀가 힘을 주며 막자 소녀를 올려 다 보며 소년이 말을 더듬었다.


“혹시, 놓아주지는 않을까?”


붉어진 소년의 얼굴과, 아까보다 분명히 빠른 박자의 활력 징후에, 의문을 느낀 소녀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