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붕아아!"

 얀붕이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바보 같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얀순이가 보였다.

 "얀순이 버리지 마아~"

 "안 버렸어."

 "헤헤, 정말? 얀붕이 쪼아!"

 얀순이는 어리광 피우는 아이처럼 얀붕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이차 성징을 거쳐 이미 성숙해질 대로 성숙해진 뒤였다.

 부드러운 몽우리가 닿는 느낌에 얀붕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뭐, 뭐 하는 거야! 떨어져!"

 "시러! 얀붕이 꼬옥 안을 꼬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얀순이가 칭얼거렸다.

 얀붕이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얀순이를 살짝 안았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둘은 한동안 꼭 껴안은 채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얀붕아, 집에 같이 가자."
 "아, 응."

 얀붕이는 반 친구인 얀진이와 함께 교실을 나섰다.

 조용하고 똑 부러진 성격으로, 요새 얀붕이가 많이 의지하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교문을 나서며 얀붕이는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얀붕이는 내 꼬야! 건드리지 마아!"

 치마가 펄럭여 하얀 속옷이 드러나는 것도 모른 채 얀순이가 거칠게 달려왔다.

 그녀는 달려오던 관성 그대로 얀붕이의 품속에 안겼다.

 얀진이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적잖이 놀란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얀붕이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집에 갈 때는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잖아!"

 "얀순이 오늘도 학교 열심히 다녀써! 잘했지?"

 얀붕이의 말은 얀순이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얀진이를 한 번 매섭게 쳐다본 뒤 다시 얀붕이에게 어리광을 피웠다.

 헤실헤실 웃는 얀순이의 모습이 얀붕이에게는 혐오스럽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얀붕이는 얀순이에게 손찌검을 한 뒤였다.

 "아…?"

 충격에 빠진 눈으로 얀순이가 얀붕이를 쳐다보았다.

 험악한 분위기를 느낀 얀진이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쪽팔리니까 그만 해, 제발!"

 잔뜩 흥분한 얀붕이는 애꿎은 얀순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 웃고 다녀? 헤벌레 하고 다니니까 좋냐고!"

 씩씩거리던 얀붕이는 뒤늦게 주변의 시선을 느꼈다.

 아차 싶었던 순간, 얀순이의 두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파……미안, 미안해애……잘못해써……."

 손바닥이 얼얼하면서도, 가슴이 저린 듯이 아팠다.

 역겨운 죄책감이 치밀었다.

 "그만, 그만 때려…아픈 거 시러…."

 "…꺼져!"

 얀붕이는 서럽게 흐느끼는 얀순이를 버리고 도망쳤다.

 어느새 몰린 인파를 헤치며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기억하기 싫어도, 매일 밤 똑같은 꿈을 꿨다.

 "얀붕아, 방금 같이 얘기하던 그 여자 누구야?"

 그녀는 질투가 많았다.

 "앞으로는 다른 여자랑 얘기하지 마. 선물도 내 것만 받아."

 그녀는 간섭이 심했다.

 "얀붕아, 너 어제 또 라면으로 때우더라? 밥 제대로 챙겨 먹으라고 했지!"

 그녀는 잔소리도 많았다.

 "얀붕아, 나 버리는 거 아니지…?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지?"

 그녀는 집착도 심했다.

 "걱정하지 마……곧, 구조대가 올 거야…."

 "아…피 난다고? 별거 아냐. 하나도 안 아파. 난 괜찮으니까 어서 이 물 마셔."

 그리고 그녀는, 자신보다 얀붕이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




 '……차라리.'

 차라리 자신을 구속하던 예전이 좋았다.

 다른 여자와 얘기를 나눴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토라져 있던 그녀가 좋았다.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겠다며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안겨 오던 그녀가 좋았다.

 평생 놓아주지 않겠다며, 두 손을 붙잡고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던 그녀가 좋았다.

 "얀붕아아? 왜 우러?"

 얀붕이는 고개를 들었다.

 석양에 비친 얀순이의 얼굴이 흐릿하게 번졌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예전에 선물한 토끼 인형을 소중하게 껴안은 채였다.

 "우, 울지 마……."

 바보 같았다.

 자신을 때린 사람을 위로하려 하고 있었다.

 옛 추억도, 성격도 모두 잊은 주제에, 평생 놓아주지 않겠다는 말 하나만큼은 지독하게 잊지 않고 있었다.

 "얀붕이 울면, 얀순이도 슬퍼……."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었는지, 얀순이는 얀붕이의 어깨에 파묻혀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만 울어. 뚝."

 그렇게 말하는 얀붕이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는 결심했다.

 앞으로 평생, 얀순이를 지켜주겠노라고.

 그 날, 무너진 건물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던 그 날, 그녀가 자신을 지켜주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