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투표(自決投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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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

 

기분 나쁜 불쾌감과 함께 박선정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눈을 부비며 일어나 탁상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통금 시간이 끝나있었다.

 

하품을 하면서 어제의 일을 떠올린다.

 

투표는 성공적으로 개시됐고 박루미가 탈락했다.

 

그리고 통화방에서 이시연으로부터 다음 번 투표는 최소한 사흘은 기다려야 된다는 소리를 전해들었다.

 

그놈의 방심하는 타이밍이라는 게 대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시연은 이미 한 번의 실적을 낸 적이 있었고,

딱히 더 빠른 시일 내에 투표를 개시할 수 있는 계책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박선정은 그저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머리가 아파왔다.

이시연이 자기 멋대로 하게 두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시연은 다른 여자들과 정반대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룰의 허점을 발견해내고 영원히 백이란 곁에서의 감금생활을 보내려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본래 목적을 따라서 우승 상품인 그를 쟁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잠재적인 위험도로 따지자면 그녀만큼 위험한 여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까지는 그녀의 계획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탈락자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다음번에는 박선정이 떨어져야만 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해 이시연을 우승으로 한 발짝 다가가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전히 백이란과 강문희가 남아있다는 점.

탈락이 투표로 이뤄지는 이상 쪽수를 뒤집을 방법은 없다.

 

아니, 오히려 어떻게 우승을 하겠다는 발상에 도달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 간사한 여우다.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문희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박선정은 아침식사를 하는 내내 그런 생각에 몰두하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식사 후에는 바로 개인실에 돌아왔다.

 

8시부터 11시까지는 어차피 탈락자들이 홀을 점령하고 있을 터였다.

 

할 수 있는 거라야 방에 들어가서 쉬거나 욕실에서 씻는 정도였다.

 

“…….”

 

그러나 방에 돌아와 곧장 침대에 몸을 뉘인 박선정은 위화감을 느꼈다.

 

신체가 뜨거웠다.

안쪽에서부터 열이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거칠어진 호흡으로 박선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음식에 뭔가를 넣기라도 한 것일까.

 

그리고 이제야 그런 발상을 떠올린 자신의 안일함에 놀랐다.

 

열흘이다. 저녁만 먹은 첫날을 포함하면 벌써 서른 끼 정도는 먹었단 말이다.

누군가 수작을 부리려고만 했다면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었던 것인가.

 

이런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해나가던 멍청함에 치가 떨렸다.

 

배 안쪽에서 무언가 근질거리는 감각이 몰려왔다.

이불을 움켜쥐며 그 감각을 참아내고서 박선정은 길게 한숨을 내빼었다.

 

그 숨결에는 저릿저릿한 열기가 담겨있었다.

 

“……!”

 

문이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선정이 언니, 잘 지내고 있나요?”

“여기는 왜… 온 거야…….”

 

백은하가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그 불청객을 박선정은 째릿 노려보았다.

 

오늘 음식을 가져온 건 이시연과 백은하였다.

자신의 몸을 이렇게 만든 범인이 둘 중에 있으리라.

 

어쩌면 공범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애초에, 투표함을 지켜야 할 시간일 텐데.”

“에이… 두 명이면 충분히 지키죠.”

 

능글맞은 표정과 함께 백은하는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쩐지 불길한 감각에 꼼지락대며 벽으로 달라붙는 박선정이었다.

 

“나름 언니를 생각해서 찾아온 건데 이렇게 대하면 저 상처받아요?”

“상처받으라지. 이란이랑 문희를 배신한 주제에.”

“으으, 그렇게 말하시면 할 말이 없는데요.”

 

그리 말하면서도 박선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히죽거린다.

아이를 귀여워하듯 마구 머리를 헝클어뜨리지만 저항할 수단은 없어 그저 노려볼 뿐이었다.

 

“문희 언니를 위해서 온 거기도 해요.”

“그러면 당장 걔한테 무릎 꿇고 사과한 다음 게임을 끝내버려.”

“저도 엄청 그러고 싶거든요? 근데 다른 언니들이 그렇게 두질 않네요.”

 

퍽이나 그러시겠다.

박선정은 숨기지도 않고 혀를 찼다.

 

“문희 언니,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거예요.”

“알면 자제하라고.”

“그러니까 제 의사와 다르게 이럴 수밖에 없다니까요?”

“헛소리.”

 

안 그래도 머리가 몽롱했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으니 여간 피로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다음 투표만 끝나면 괜찮아지겠죠?”

 

고개를 드밀어 박선정과 눈을 마주치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때 언니가 떨어질 테고, 그러면 탈락자들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을 거예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마구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때까지 문희 언니가 버틸 수 있을까요?”

“……나는 문희를 믿고 있어.”

“뭐를요? 고통받으며 흑흑 울먹일 게 틀림없다는 거요?”

 

뒤이어 비아냥이 찾아든다.

 

그러나 박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문희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을지 알고 있는 탓이다.

 

자신이 위로받고 싶던 만큼 강문희를 위로하는 데 더욱 애쓰던 박선정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언니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으세요?”

 

이시연은 다음 투표까지 사흘이라고 했다.

그러면 바로 다음날 박선정이 탈락자를 제압한다고 치면 나흘…….

 

…아니다, 이시연은 분명 ‘최소’ 사흘이라고 했다.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시연은 그런 의도로 했던 말은 아니었다.

그저 불확실한 미래의 변수가 나타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꺼낼 때 같은 방에 있었던 백은하는 이 간극을 이용했다.

 

백은하와 이시연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알지 못하는 박선정으로서는

다음 투표를 시도할 수 있는 게 일주일 뒤가 될지 아니면 더 이후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뒤이어 찾아오는 것은 불안이다.

과연 그 여린 아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미 잔뜩 상처를 입은 강문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저는 다른 분들이 오빠를 범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어요.

대신 문희 언니가 게임기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게 해줄 수는 있어요.”

 

몽롱해진 머릿속에 달콤한 유혹이 꽂혀든다.

 

“적어도 이 상황을 문희 언니가 즐기게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요?”

 

두뇌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제가 보기에 문희 언니는 그런 싹이 보여요.”

“그건…….”

“이 게임에서의 일은 약간의 일탈로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조금 특수한 플레이를 잠시 즐겼을 뿐.”

 

어느새 백은하는 귓가에 입술이 닿을 정도로 다가와서는 속삭여대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째서인지 방울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대신 선정이 언니가 조금 협력을 해주서야 돼요.”

“나, 나는…….”

“아,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절대 배신하는 게 아니에요.”

 

딸랑딸랑. 방울소리와 끈적한 목소리가 뒤섞여 음악을 이룬다.

 

“잘 생각해보세요. 문희 언니의 행복을 위해 약간 도움을 줄 뿐이잖아요?”

 

머릿속이 녹아내리며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 된다.

 

그러나 그 말에는 분명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핫, 언니라면 분명 도와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뿐이었다.

 

 

1.

 

“점심 먹고 나서 오빠 방으로 와주세요.”

 

유유히 방을 떠나간 백은하의 마지막 말은 그것이었다.

 

홀로 남은 박선정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몸 안쪽에 아직 남아있는 희미한 열기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지금의 상황을 강문희가 즐기도록 한다.

약간 정신이 나간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쳐돌아가는 이 상황이기에 그럴듯하게 들려왔다.

 

박선정은 점심을 먹으러 홀에 나갈 시간이 될 때까지 그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아니, 테이블에 앉아서도 그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언제나처럼 백은하와 이시연이 음식을 가지러 간 동안

다른 탈락자 두 사람은 백이란의 옆에 딱 달라붙어 그를 희롱하고 있었다.

 

헐떡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느껴졌다.

항상 그랬다. 백이란이 범해지는 것은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눈을 돌리며 조금이라도 현실을 피해왔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백이란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지금의 그 행동에는 강문희를 살펴본다는 목적이 담겨있었다.

 

“…이란아.”

 

강문희는 글썽이는 눈으로 그녀의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간절함도 섞여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박선정은 그 눈빛 가운데서 혼란스러운 감정을 들춰내었다.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흥분을 어떻게든 부정하려는 그런 눈빛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박선정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백은하의 그런 말을 들었기에 괜히 그런 식으로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

 

그렇게 이성적인 결론을 내리며 어떻게든 마음을 다스려보려 해도 잘 되질 않았다.

 

한 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생각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심기에 거슬리는 것처럼

강문희의 행동 하나하나가, 반응 하나하나가 그렇게밖에 해석되질 않았다.

 

문득 강문희가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지 이쪽을 흠칫 바라본다.

 

그러다가 무언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킨 아이처럼 시선을 피한다.

 

설마 정말로 그녀에게 그러한 성벽의 씨앗이 잠들어 있단 말인가.

 

박선정의 머릿속은 어느새 그것으로 가득 채워졌다.

 

너무 그런 생각만을 하느라 달칵 하고 그릇이 내려놓아질 때까지 백은하의 접근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제 말이 맞는 거 같죠?”

“……윽.”

 

백은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리 속삭이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양 자기 자리에 앉는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감각과 함께 몸을 움찔 떨었다.

 

이어서 백은하를 노려보았지만 저쪽은 그다지 관심도 없는지 유유히 식사를 시작했다.

 

어차피 뭐라 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박선정은 자기 앞에 놓인 그릇으로 시선을 떨궜다.

 

꿀꺽. 무심코 침이 넘어갔다.

 

아침에 그런 일을 겪었던 참이다.

이 식사에도 무언가 섞여있는 건 아닐까?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음식을 입에 가져갔다.

 

씹어서 삼키자 무언가 뱃속에서부터 살짝 뜨거울 정도의 열기가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

 

정말로 무언가를 또 집어넣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기분탓에 불과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스푼을 입으로 옮겨갈 때마다 점차 신체가 뜨거워져갔다는 점이다.

 

가빠지는 호흡을 어떻게든 평정을 연기하며 가라앉힌다.

심장이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쿵쿵 뛰었다.

머릿속이 천천히 멍해지는 게 느껴졌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식사가 끝나있었다.

 

피부에 가볍게 한기가 감돌며 머리가 차갑게 식은 것은 백은하가 그녀 앞에 놓인 그릇을 치울 때였다.

 

아니, 나름 뇌가 돌아가기 시작하긴 했으나

밤이라도 샌 것처럼 여전히 머리 한 편에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박선정은 비틀비틀 욕실로 향해 가볍게 세수를 했다.

조금이라도 몽롱함이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는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자신은 그것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일까.

 

백은하는 점심을 먹은 후 백이란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하지만 식사의 뒷정리 담당 역시 그녀이므로 찾아간다고 하면 실제로는 조금 더 나중이어야 하리라.

 

이제 슬슬 딱 그 방에 찾아가도 될 시간이지 않을까.

 

어쩌면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그 잠깐을 보내기 위해

자기 방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있는 건 아닌가?

 

어쩌면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온갖 생각이 이성을 점령해온다.

 

대부분 헛소리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미묘한 불안감이 의식을 뒤흔든다.

 

박선정은 머리카락 탓인지 양아치 같다는 인상을 갖는 사람이 많았고

실제로 행동을 보아도 모범생과는 아득히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그러나 순전히 성적만으로 보자면 꽤나 우등생 반열에 속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기본적인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특히나 이것저것 분석하고 계산하는 것은 나름 특기였다.

 

좋게 말하면 사려 깊고, 나쁘게 말하면 생각이 많은 여자였다.

 

백은하는 그런 그녀를 줄곧 곁에서 봐왔다.

어릴 적부터 오빠의 소꿉친구였던 박선정은 그녀의 소꿉친구나 다를 바 없었다.

 

박선정이 약간의 떡밥만 던져줘도 온갖 가능성을 떠올리며

혼자 삽질해대는 타입의 인간임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박선정은 방문 앞에 서있었다.

 

문에 적힌 이름은 그녀의 개인실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과연 자신은 스스로 이곳에 온 것일까, 아니면 유도당한 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방에 찾아가는 것만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도 거기까지라면 문제가 없었다.

 

스르륵. 문이 열린다.

 

“아, 왔어요?”

 

방문 앞에 멈춰선 그녀를 안쪽에 있던 백은하가 환히 웃으며 맞이했다.

 

“……!”

“쉿.”

 

안쪽에는 당연하게도 백이란이 침대에 묶여서 누워있었다.

 

안대를 끼고 있는데다가 위에 올라탄 성란에게 범해지고 있는 중이라

아직 이쪽을 알아차리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백은하는 훌쩍 다가오더니 검지로 박선정의 입술을 막았다.

 

그러고는 소곤소곤 속삭여온다.

 

“와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체 왜 부른 건데? 애초에 내 협력이 필요하다는 건 또 뭐고.”

 

박선정 역시 분위기에 휩쓸려 조용히 질문했다.

 

“이미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문희 언니가 우리 오빠 다음으로 좋아하는 건 언니잖아요?”

“너 설마…….”

“네, 그래요. 언니와 우리 오빠가 스킨십하는 걸 사진이라도 찍어서 조금씩 흘릴 생각이에요.”

 

백은하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문희가 얼마나 상처받을 줄 알고.”

“이쪽 성벽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박선정은 그녀의 제안에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그 말은 이른바 친구와 연인을 동시에 잃는 충격이라는 것이었다.

 

“차근차근 개발하는 게 안정적이지만, 문희 언니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몰라요.

그러니까 무진장 배덕적인 상황을 통해서 꽝 하고 한 번에 개화시켜야 해요.”

 

스스로의 손을 박수치듯 맞대면서도 힘을 주어 소리는 나지 않게 하는 백은하였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란이랑…….”

“언니, 고상한 척은 관두세요.”

 

주먹을 말아쥐고 다짐을 말하려던 박선정의 말을 그녀는 갑자기 식은 표정으로 끊는다.

 

“아직 미련이 남아있잖아요?”

“아니야. 나는…….”

“아주 잠시에요. 해봐야 며칠 정도잖아요.”

 

귓가에 나긋나긋 들려오는 악마의 유혹.

 

“한 번 정도는 마주해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어요?

혹시 걱정되면 오빠한테만큼은 절대 안 들키게 해드릴게요.”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끔찍할 정도로 크게 울리는 그 북소리에 자신의 역겨운 감정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문희 언니를 위한 거잖아요. 절대 배신하는 게 아니에요.

이번 일로 온전하게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야 좋은 일 아니겠어요?”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킨다.

위장으로 내려가는 타액에서 죄악과 배덕의 무게가 느껴졌다.

 

“자, 언니. 일단 이쪽으로 와주세요.”

 

백은하는 박선정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 손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제대로 느껴지질 않았다.


딸랑. 방울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박선정은 침묵했다.

 

그러나 천천히 백은하의 인도를 따라 발을 떼었다.

 

…꺼져가던 장작더미에 욕망의 불씨가 다시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