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경비병을 사랑해버렸다 (6)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에.

 

 

 

 

 

 

12.

 

“오오! 왕자님이 오시는 겁니까? 저 왕자는 처음 봅니다!"


“호들갑 좀 떨지 마. 품위 있게 행동해, 얀센.”


“네!”


정말 이 바보를 믿어도 좋은 걸까……그냥 집에서 쉬라고 할 걸 그랬나?

 

이제 약 3분 뒤에, 스타벡 왕자가 여기 도착한다.

 

그런 거지발싸개 같은 놈의 비위를 맞춰주긴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스타벡 제 5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병사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며, 화려한 마차가 성 앞마당에 섰다.

 

문이 열리며 나온 것은……스타벡과 그의 경호원으로 따라온 라비스 경이었다.

 

“아- 허리 아파. 마차에 너무 오래 앉아있으면 이렇다니까.”


“그렇군요.”

 

꽤 오랜만에 보는 거지만 스타벡 왕자의 행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금발 머리에 재수 없게 생긴 얼굴,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한 옷.

 

얼굴은 반반하지만 품위 따윈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나이만 먹은 꼬맹이다.

 

반면 라비스 경은 말쑥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허리춤에 검을 찬 상태였다.

 

그는 흰 머리를 뒤로 묶고 수염을 길러 야성적이면서도 이지적이라는, 모순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잘 어울리는 행색이었다.

 

“오셨습니까, 왕자님. 실로 오랜만이옵니다.”

 

내가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으음, 여전히 아름다운- 잠시만. 옆의 그 자는 누구지?”


“저는 얀센입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호위병입니다!”


얀센이 대답하자마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취향이 고약해졌네. 어디서 이런 똥개를 주어오셨나?”

 

“충직한 자이오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충직합니다!”


“아, 그래?”


그 순간, 스타벡이 라비스 경의 검을 뽑아 얀센의 목을 겨누었다.


“내가 널 찔러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네!”

 

얀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정말 칼로 찔러도, 얀센은 군말 없이 죽어줄 것이다. 

 

내가 아는 얀센이라면 그럴 터였다.


“굳이 시험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얀센은 그런 도발에 넘어갈 자가 아니오니 말입니다.”


“흠, 최소한의 인내심은 있는 모양이군.”
 
“왕자님, 여행의 피로가 쌓이셨을 테니 올라가서 쉬시지요.”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던 라비스 경이 말했다.

 

“그럴까? 그럼 그레이스, 조금 있다 다시 보자.”


“네.”

 

왕자와 라비스 경이 성으로 들어갔다. 

 

어휴, 저 멍청이는 왜 성장할 줄 모르는 걸까…….

 

나는 정말 저런 애송이랑 결혼해야 하는 건가? 갑자기 살기 싫어졌다.

 

“그레이스라는 애칭 마음에 듭니다! 저도 그렇게 불러도-”


“한 번 불러봐. 혀를 뽑아버릴 테니까.”


“헉! 혀가 없으면 감자를 못 먹게 됩니다. 전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잊지 마. 너는 오늘 하루 공기가 되어야 해, 그냥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네!”

 

그냥 조용히 밥만 먹고 돌아가 주면 좋으련만…….

 

제발 아무 문제없이 오늘 밤이 끝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랬다.

 

 

 

 

 

 

13.

 

성의 홀, 오늘 밤엔 이곳이 바로 연회장이었다.

 

왕자에 이어서 몇몇 귀족들이 연회에 초대되었다.

 

요즘 수도에서 인기라는 기묘한 장식- 꼭 머리카락으로 탑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긴 

 

가발을 머리에 올려놓은 귀부인들과 배가 가슴보다 더 나온 노신사들, 그런

 

귀족들의 수발을 들어주는 경호원과 하인들도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아가씨, 근데 연회는 왜 하는 겁니까? 다들 밥 먹으러 오는 겁니까?”


내 뒤에 서 있던 얀센이 말했다.

 

“친목 도모……라는 이유로 하는 거지만, 실제론 우리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거나

 

더 높은 위치의 귀족한테 연을 대는 일을 하러 오는 거야. 아니면 남편감이나

 

신붓감을 물색하거나……이유야 다양하지. 정말 네 말대로 먹으러 온 사람도 있을지도?”

 

“저라면 분명 먹을 거 때문에 왔을 겁니다. 언제 이런 진수성찬 구경을 해봅니까?”


“침이나 닦아.”


얀센이 옷소매로 줄줄 흐르는 침을 닦았다.

 

소파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낯익은 얼굴들 사이로 낯선 얼굴들도 보였다.

 

나도 일단은 귀족이기에 저 사람이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고, 그가 누구인지 알면 왜 여기 왔는지도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아버지나 왕자랑 인연을 만들려고 온 건가……시시하긴.’

 

인간은 다 비슷비슷하다. 하는 짓도, 생각하는 것도 일정 수준을 벗어나질 못한다.

 

나는 상대와 한 5분만 대화해도 그 사람의 본질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참으로 단순무식한 짐승이다. 술, 섹스, 권력, 돈, 인기- 그딴 시답잖은

 

것에 자신의 인생과 힘을 쏟아 붓는 걸 보고 있자면 가엾을 지경이었다.

 

……그런 면에서 얀센은 참 특이했다. 

 

돈, 여자, 권력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의 신념만을 관철한다.

 

이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인간은 몇 되지 않는다. 

 

나조차도 뚜렷한 신념 따윈 없으니 그 점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했다.

 

“좋은 밤입니다, 그레이시아 님.”


“라비스 경.”


그 무렵, 라비스 경에 내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손자 분은 잘 지내고 계신지요?”
 
“건강은 하다만, 수련도 안 하고 여자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고 있지요.”


“한창 그럴 나이니까요.”


“하여간 누굴 닮았는지…….”


라비스 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이렇게 말했다.

 

“뭐, 그보다도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


“최근 마녀들에 대해 뭔가 들은 게 있으십니까?”


마녀? 왜 여기서 마녀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맥락이 없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없습니다.”


“흠, 그레이시아 님은 뭔가 들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뭔가 있었습니까?”


내 질문에 그가 눈동자를 번뜩였다.

 

“최근 마녀들이 은둔 생활을 그만두고 활동하기 시작했단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영역과 연구 이외의 문제엔 관심을 가지지 않을 텐데요.”


“그것도 하나, 둘도 아니고 상당수의 마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데……설마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일까요?”

 

마녀들이 폭주하기 시작하면 이 왕국의 절반이 불타 사라질 것이다.

 

개개인의 무력은 대단치 않지만, 그들에겐 금지된 지식과 마법이 있다.

 

그걸 활용하면 국가를 전복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당장 복제 마법을 사용해 화폐를 무한정 늘려 뿌리기라도 하면…….

 

“조만간 소집령이 있을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수도까지 올라가고 싶진 않군요.”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나저나 얀센 얘는 의외로 조용하네?

 

나는 몸을 뒤로 돌려 얀센을 찾아보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얀센? 뭐야, 어디 갔어?”


“그레이시아 님의 호위병 말씀입니까? 방금 전에 웨이터를 쫓아가던데요.”


“아, 이 멍청이가 진짜…….”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도 못 지키나? 성가시게 하기는.

 

“저는 그 바보……아니, 제 호위병이 사고치기 전에 찾아봐야겠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얀센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귀부인들 사이에서 무언가 하고 있던 그를 발견했다.

 

“얀센, 거기서 뭐해?”


“잠시만……짠! 보셨습니까? 제 팔꿈치에 혀가 닿은 거!”


“어머, 어머 세상에……대체 어떻게 그런 기행을 하실 수 있는 거죠?”

 

“몸에 뼈가 없나봐! 어찌 사람이 저리 유연할 수가!”


얘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얀센은 귀부인들에게 자기 혀가 팔꿈치에

 

닿는 걸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귀부인들은 좋다고 그걸 반응해주고 있었고.

 

나는 얀센의 뒷덜미를 잡고 거기서 끌어냈다.

 

“너, 내가 연회 시작 전에 뭐라고 말했어?”
 
“공기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네가 공기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해?”
 
“……어……배고파서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랬습니다!”

 

콰직! 나는 조용히 그의 발을 짓밟았다.

 

“아파파파파!”


“제발 사고 좀 치지 마. 또 사고 치면 해고할 줄 알아.”


“하지만 배고픈 걸 어떻게 합니까……귀부인들이 재미있는 걸 보여주면

 

음식을 주겠다고 해서……흑, 저는 가엾은 집요정. 아니, 호위병입니다.”

 

“네가 진짜 개도 아니고, 음식 준다고 졸졸 쫓아가지 마.”


“네…….”


얀센이 풀이 죽어 축 늘어졌다. 이러고 있으니 진짜 혼난 강아지처럼 보였다.

 

나는 왜 이런 바보를 호위병으로 데려온 걸까. 

 

가끔은 내가 한 짓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

 

“자, 이거라도 먹어. 그리고 이젠 진짜, 제대로, 얌전히 있어.”
 
“감사하브다.”


나는 옆에 있던 구운 칠면조 다리를 뜯어 얀센 입에 쑤셔 넣었다.

 

“나는 잠깐 바람 쐬러 나갈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네.”

 

일단 좀 얌전해지겠지……나는 그를 두고 바깥으로 나왔다.

 

역시 연회 따윈 싫다. 사람 많은 곳은 정말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조금 숨을 돌리러 복도로 나와 걷던 중, 나는 그와 마주치고 말았다.

 

“아, 여기 있었군. 그레이스, 나의 공주님.”


“……연회를 즐기러 가신 게 아니셨는지요?”


“그대가 안 보여서 찾고 있었지. 게다가 아가씨들이 내게 자꾸 치근거려서…….”


스타벡 왕자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나?”


“제 미천한 지혜로는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슬슬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서 말이야-”

 

쿵. 그가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이제 우리 사이도 진전할 때가 된 것 같지 않아?”


“조금 이른 것 같기도 합니다만.”


“부끄러워하는 건가? 귀여운 구석도 있었군 그래…….”


그가 내 뺨과 목을 쓰다듬었다.

 

기분 나빠……꼭 바퀴벌레가 내 얼굴에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그레이스, 내 사랑. 왕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사옵니다.”


“될 수 있어. 내가 왕이 되면, 그대를 왕비로 만들어주지. 금은보화와 하인들,

 

웅장한 성과 끝없이 이어지는 연회……그 모든 게 너의 것이야.”

 

그리고 너는 나의 것이 될 테고. 스타벡 왕자가 내 가슴을 만지며 말했다.

 

“여기선 자제하심이…….”


“그래, 침실로 갈까? 거기서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때?”


그가 개처럼 킁킁거리며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 엉덩이와 허리, 온 몸을 구석구석 만지기 시작했다.

 

역겨워……당장에라도 저 멀리 밀쳐내고 싶지만 참아야한다.

 

아버지가 이걸 바라신다. 그리고 이것만 참으면, 나는…….

 

…….

 

나는, 왕비가 되고 싶은 건가?

 

왕비가 되어야 한다고 들었지만, 정말로 그게 내가 바라던 일이었을까?


모르겠다. 

 

나는 뭘 바라고 있었던 걸까.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하아, 하아……그레이스, 드디어 너를…….”


그가 내 턱을 잡은 뒤, 입술을 갖다 대었다.

 

이제 입맞춤을 하고, 그와 섹스하고, 아내가 되어, 어쩌면 왕비가 될지도 모른다.

 

그게 다인가? 그게 내가 진정 바라던 일이었나?

 

나는- 

 

이 삶에서,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그 순간, 멀리서 누군가가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 아가씨한테 무슨 짓이냐아아아아아-!!”


“엉?”


퍼억-!!

 

한 순간에, 정말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

 

스타벡 왕자가 얀센의 주먹에 맞아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말릴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니 모든 게 끝나있었다.

 

“감히 아가씨한테 손대다니! 나, 호위병 얀센이 가만두지 않겠다!”


“아, 아그윽……이, 이 새끼가아아아아-! 너, 너, 너 이 새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스타벡 왕자가 줄줄 새는 코피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왕자고 왕이고 아가씨 몸에 손대는 놈은 용서치 않는다! 부끄러운 줄 알아!”


“얀센- 너 미쳤어?!”


사고를 쳐도 하필이면! 

 

야단났다, 이런 초대형 사고를 치다니- 뒷수습은 어떻게 하려고!?

 

“너는 사형이야! 사형! 아니, 사형으로 모자라. 펄펄 끓는 기름에 하루 종일

 

삶아서 죽여 버려야 돼! 씨바아아아아알-!! 내 코! 내 예쁜 코를 잘도오오오-!!”

 

“어차피 못생겼는데 더 못생겨져도 아무 문제없을 거야!”


“너는 입 좀 다물어, 이 멍청아!”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왕자님?”

 

아뿔싸, 최악의 순간 최악의 인물이 또 나타났다.


“라비스! 저 빌어먹을 개자식을 죽여!!”

 

라비스 경. 그가 얀센을 향해 검을 뽑고 겨누었다.

 

“……왕자님을 해하려 했다면 그것은 곧 반역. 즉결처형이다.”


“저쪽이 먼저 아가씨한테 손댔습니다!”


“상관없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선택해야 한다.

 

나는, 뭘 바라고 있는 거지?


나는- 얀센한테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야?

 

얀센을 감싸면 왕자와의 동맹은 파기된다.

 

이런 바보를 감싸줄 의리 따윈 없어. 냉정하게 생각해, 정답은 알고 있잖아?

 

“죽어라.”

 

그 순간-

 

나는 선택했다.

 

 

 

 

 

 

 

 

 

얀센이 해냈다. 그야말로 트러블 메이커, 살아 움직이는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중편으로 10편 내외에서 완결낼 생각이었는데 계획을 바꿔서 장편 연재하기로 함.

이게 좆망할지 잘 될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일단 써보기로 함.

쓰면서 얀붕이와 얀순이가 입체적이고 매력 넘치는 캐릭터이길 바라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매번 생각하고 된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