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챈창작대회] 첫사랑의 법칙 (4)
― 약속은 지킬 수 있는 것만
학교 1층에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상담실.
평소라면 쓸 일이 잘 없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은 존재조차도 잊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카일은 학생 케어에 열정적인 선생님 덕에 쓸데없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학생 상담실에 끌려와야 했다.
불쾌하다. 귀찮다. 이럴 시간에 그냥 책이나 읽고 싶다…
카일의 볼멘소리는 그저 목구멍 아래에서만 맴돌고, 그런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선생님은 상담일지를 펼쳐놓고 카일에게 가벼운 질문부터 시작했다.
“점심은 맛있게 먹었니?”
“… 네.”
다음 질문은 안 봐도 뻔했다.
같은 반 애들에 대해 묻겠지…
“음, 그래… 여전히 반 친구들이랑은 서먹서먹해?”
“관심이 없는 겁니다.”
“하하… 그래도 친구들은 카일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건 아닐 거야.”
선생님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하는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카일이 홀로 마음을 바꾼다고 될 일은 아닐 터.
사교성이 하루아침에 좋아질 순 없으며, 이미 친구를 사귀는 법을 배우기엔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선생님은 인정하지 않았다.
서로 평행선으로만 달리고 있는 상담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상담을 받는 쪽, 카일이 마음을 열지 않는 한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어차피 늦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뭘 더 해봤자 더 이상한 놈만 될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데 카일…”
이 패턴이 아닌데…?
갑자기 바뀐 선생님의 목소리 톤에 줄곧 눈을 피하던 카일이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명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보고 있는 선생님의 표정은…
“요즘은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구나.”
아주 인자한 미소가 입가에 번지고 있었다.
물론 상담이라고 해서 무조건 심각한 표정을 지으셨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 무거운 분위기로 가면 안 되니까.
그런데… 지금 선생님의 미소와 어투엔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뇨… 똑같습니다…”
“하하하. 부끄러운 모양이구나. 괜찮아. 자연스러운 거란다.”
부끄럽다고…?
뜻 모를 말에 카일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반면에 여전히 웃고 있는 선생님의 얼굴에 흐뭇함이 번진다.
줄곧 아픈 손가락이나 다름없던 제자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했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즘 옆 반 시영이하고 조금씩 대화하고 그러는 것 같던데. 시영이가 참 밝은 아이더구나. 카일 너에게도 잘해주는 걸 보면 둘이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서 안심이 되는걸?”
예상하지 못한 이름을 들으니 카일의 눈이 커졌다.
따로 상담까지 할 정도로 제자를 아끼는 선생님이니, 카일이 방과 후에 남아서 뭐든 깨작깨작하고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처럼 카일이 무엇을 하는지 따로 지켜보다가 주시영과 같이 있는 모습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무언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려 해도 말문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
왠지 선생님과 단둘이 있는 작은 상담실의 공기가 덥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건 치부 같은 걸 들킨 게 아니다.
머릿속을 맴돌던 변명거리를 입 밖으로 내보낸다.
“…친구 같은 거 아닙니다.”
“후후, 차차 더 친해질 수 있겠지. 카일이 보는 시영이는 어떠니? ”
아무리 어른이 착한 아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해봤자였다.
카일의 시선에서 주시영은 그저 다른 반 찰거머리, 교칙 따윈 무시하는 양아치, 카드 게임밖에 모르는 바보…
딱 그 정도 위치였다.
조금도 높게 평가하지도 않았고 친구라고 부를 만큼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딱히… 친구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주시영이 다가왔던 계기는 카일이 들고 있던 카운터즈 카드였고,
같이 몇 번 카드 게임을 한 것도 본의 아닌 실수 때문에 생긴 미안한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맞는 구석이라고 해봐야 서로 딱히 친구가 없다는 공통점이 전부…
잘 쳐줘 봐야 취미가 같은 카운터즈 플레이어 정도가 적당했다.
그걸 ‘친구’라고 여길 수 있는지는…
카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주시영정도면 금방 다른 친구들과 친해질 거고, 그러면 카일 자신에게서 떨어질 거라고 단정 지었으니까.
“그렇구나. 그래도 밀어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네. 조금 안심이 되는구나.”
“그야…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니까요. 자기 멋대롭니다.”
조금씩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바람과 생각이 너무 밝은 꽃밭 같아서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꽃향기가 가득한 꽃밭에 먼지 부스러기는 아무 짝에 쓸모도 없는데…
“후후, 시영이는 카일이 마음에 든 모양인가 보네.”
“…아닙니다.”
주시영이 어떤 사람인 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에 든다. 친구가 될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고, 성립될 수 없는 말이었다.
부스러기 같은 인간.
그런 꼬리표를 뗄 생각이 없는 한…
“음, 왜 그렇게 생각하니?”
“……전 걔가 싫으니까요.”
꽃밭에 서 있을 자격이 없다.
다정한 선생님은 눈앞의 학생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고 믿고 있지만…
카일에게 있어선 바닥에 내다 버린 시간이었다.
***
내 시간…
귀한 점심시간이 끝나갈 때쯤이 되어서야 돌아온 교실.
“하아…”
남들 모르게 푹 내쉬는 한숨.
지금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다음 수업이 뭐였더라.
카일은 복도 쪽 창문 옆에 걸려있는 시계와 시간표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분명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와야 하는 건 벽걸이 시계인데…
조금 피곤해 보이는 올리브색 눈동자에 다른 게 비친다.
“안녕~”
창문 바로 앞에서 들리든지 말든지 눈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주시영이 있었다.
설마 나한테 인사하는 거야 지금?
당황한 카일은 주시영의 해맑은 인사를 무시하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돌려 복도 창가를 등지고 앉았다.
“응?”
예상 밖의 반응에 복도에 서 있던 주시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이해한 듯 풋―하고 웃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끙…”
저런 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마치 고장이 난 듯, 애꿏은 뒷머리만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이젠 작은 상담실이 아닌 넓은 교실로 왔는데도, 교실의 공기가 상담실에 있었던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가 되어도
카일은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
제발 오늘은 오지마.
오지마.
안 오겠지?
“야! 카일!”
“하아…”
열린 교실 뒷문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며 카일을 불렀다.
변함없이, 늘 그렇듯이.
카일이 교실에 남아있으면, 주시영은 기다렸다는 듯 카일이 있는 교실을 들여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한두 번 붙어먹으면 질려서 떨어질 줄 알고 세지도 않았건만.
대충 어림잡아보면 열 번은 더 넘은 느낌이었다.
“왜 내 인사 무시해~?”
“…….”
삐친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린 볼.
주시영이 무슨 말을 하든, 괜히 멋쩍은지 카일은 쳐다보지도 않고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무시했다기보단… 아니, 그게 무시한 건가…?
여전히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시선이, 펼쳐 놓은 책 옆 검은색 틴케이스에 멈췄다.
그래서, 오늘은 뭘까.
카드 게임? 옆에서 귀찮게 말 걸기? 퍼질러자기?
아니면, 무시했으니까 섭섭하다고 가버리기?
“같이 나가자!”
“…예?”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말에 카일이 얼빠진 표정으로 주시영을 쳐다보았다.
옆자리까지 단숨에 달려와서 한다는 말이 저것? 이젠 교실에서 귀찮게 하는 것도 모자라서 나가자고?
“나가자구!”
보통이라면 또 무시당하면 기분 상하기 마련이니, 이런 뜬금없는 제안도 무시당한 만큼 더 받아내려는 것인가?
“학교 밖을… 대체 어디로 가자는…”
“당연히 시내지! 오늘 챔버에 한정 카드 들어온 데! 그러니까 교실에만 있지 말고 같이 사러 가자!”
아니면, 무시당해도 아무렇지 않다던가…?
―라고 생각해도, 돌이켜보면 꽤 자주 무시한 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무언가에 집중해야 했지만, 오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에도 무시했다는 것 정도.
아무리 무시당해도 너는 원래 그런 애니까 라며 생각하는 듯, 카드깡! 을 외치며 잔뜩 들떠있는 여자애.
까칠하게 대해도 다시 주위를 맴돈다. 그런 건 딱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카일? 가자아~”
“아… 싫습니다.”
“엑? 한정 카드잖아! 이번에 마리아 안토노프 카드가 새로 풀린다고! 가자아~”
“아니…! 손 떼십시오!”
단호한 거절에 주시영은 카일의 팔을 두손으로 잡고 잡아당기며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팔을 좀 붙잡았을 뿐인데…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카일이 오른팔을 빼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카운터의 힘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인 카일은 붙잡힌 팔을 어떻게든 빼내려고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보아도 주시영을 이길 수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억지에 벗어나려면 결국 타협을 해야 했다.
이미 오늘 점심시간을 빼앗기고, 이를 보완할 하루 계획을 짜놓은 이상. 오후 시간을 뺏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아아아~”
“아, 알았으니까… 그만! 그만 좀…!”
“그럼 가는 거지?! 빨리 일어나서 가자~”
“후… 오늘은 안 됩니다.”
거절과 함께 재빨리 주시영의 손에 힘이 풀린 틈을 타 팔을 빼내었다. 안된다는 말에 주시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먹구름이 진다.
“왜―?!”
한층 울적해 보이는 얼굴. 마치 물에 젖은 고양이처럼 울상을 짓지만…
주시영이 아무리 떼를 써도, 오늘만큼은 정말 양보할 수 없었던 카일은 다시 펼친 책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한정 카드인지 뭔지는 혼자 사러 가도 되잖습니까. 전 오늘은 정말 안 됩니다.”
“…….”
늘 그렇듯 외면해버리는 모습에 오리 부리 마냥 툭 튀어나온 입.
한참을 옆에서 뚱하게 보고 있다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한번 치더니 얼굴에 낀 먹구름이 걷혔다.
“그럼 내일은 된다는 이야기지?”
“네?”
이게 아닌데…?
허점을 공략당한 카일이 놀란 눈으로 주시영이 있는 오른쪽을 올려다보았다.
하이에나.
사냥감을 찾아낸 하이에나의 반짝이는 붉은 눈엔 카일이 담겨있다.
“오늘은 안되지만? 내일은 된다는 거! 아냐~?”
“내일도 안…”
“한! 정! 카! 드! 포기 못 해! 한정! 카드! 같이 가자아아아!”
다시 거절하려고 하자 채 다 말하기도 전에 주시영은 이젠 카일의 팔을 붙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놔… 놓으시죠! 놓으라고요!”
역시 카운터의 무식한 힘은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남은 오후가 어떤 식으로든 무사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ㄴ, 내일! 내일 가시죠! 내일!”
“…! 진짜? 정말이지? 약속이다? 무르기 없기~”
“하아…”
되찾은 오른팔의 자유. 그게 다음 날 오후와 바꿀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빼앗겨야 하는지…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는 동굴에 갇힌 이 기분.
아려오는 오른팔을 매만진다.
“한정 카드 진짜 기대되지 않아? 이번엔 저번보다 확률이 높대!”
“하…! 너무 기대하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치이―”
카드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
확률이 낮기 때문에 효율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카일은 굳이 무리해서 한정 카드깡에 도전하진 않았어도,
결국 카일이 카운터즈 카드 수집가인 이상, 그에게 있어 카드깡은 몇 안 되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단지, 주시영을 끼고 사러 가야 한다는 점이 큰 불만이었지만.
“늘 혼자서 카드깡하니까 재미없더라고~ 같이 기뻐해야 재미있는 건데…”
주시영이 책상에 쭉 엎드리며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카드깡을 하는데 왜 다른 사람이 필요한지 카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랑 다 같이 해본다고 해서 한정 카드가 더 잘 나오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같이 가준다고 해줘서 고마워!”
“…….”
거의 반쯤… 그냥 억지로 끌고 간다는 점은 알고 있는 건지, 건네오는 감사 인사.
고맙다는 말에 책장을 넘기던 카일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움직였다.
그래… 아는 게 어디야…
한바탕 폭풍이 지나고,
둘만이 남은 교실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책상에 엎드려 이따금 재잘거리는 주시영의 말소리, 틴케이스가 열렸다 닫히는 소리…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소리들이 창밖에 꽃향기와 섞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