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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챈창작대회] 첫사랑의 법칙 (18)
― 기억 속에서 도망쳐 달려온 곳은, 스쳐 간 날들 중 가장 닳고 닳은 페이지
사령관의 안목은 탁월했고, 카일은 그 기대에 충분히 보답하는 인재였다.
책상 위의 행정도 일종의 전쟁이라며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고, 현장 임무도 현장특화대원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델타세븐 대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델타세븐에 발령되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라고 말한 교관의 말은⋯ 여전히 카일에게 있어서 공감되지 않는 주장이었다.
가끔 몇몇 대원들의 안일함과 방종에 스트레스를 받긴 해도 델타세븐에서의 시간은 평범한 학생의 신분으로 평범한 고등학교에 다닐 때보다 더 의미 있는 순간들이었다.
“카일 웡 소령. 지금 진행 중인 자료 취합은 어디까지 됐나?”
부사령관, 도미닉 중장의 목소리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린다. 흠잡을 곳 하나 없는 각 잡힌 거수경례 후 경과보고를 올린다.
“예, 이제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급히 필요하시다면 지금 정리한 자료 먼저 올리겠습니다.”
“아니. 그건 예정대로 하면 된다. 그 자료의 취합을 마치는 대로 이걸 정리 취합해주면 좋겠군.”
도미닉 중장의 두손에 들린 상자 위에는 ‘대규모 침식재난에 대한 조사 보고’라는 글자가 날림으로 적혀있었다.
받아서 든 상자의 무게가 꽤 나가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한두 가지 사례에 대한 보고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합중국 군대가 이렇게까지 조사할 권한을 관리국이 주지 않을 텐데⋯
분명 자칭 천재 해커인 실비아가 관리국 데이터베이스에서 빼내온 자료임이 분명했다.
크게 한 건 했네⋯.
아무튼, 많든 적든 간에 군인이라면 주어진 명령을 착실히 수행하는 것만 염두에 두면 된다. 카일은 지금 받은 명령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눈치껏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먼저 처리하던 자료와 함께 보고를 올리면 되겠습니까?”
“그래, 부탁하지.”

카일이 소령으로 진급을 하던 날, 부사령관 도미닉 중장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테라사이드 프로젝트’
이는 관리국과 무관하며, 카일의 탁월한 카운터 능력을 십분 발휘해준다면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말이라며 제안해온 것이었다.
카일에게 있어서 그 프로젝트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적재적소에 사용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프론트베이의 다발적으로 발생한 국소 침식 현상. 캄파멘토에서 보고된 특수 개체에 의한 도시 괴멸⋯.”
문서자료와 전술 태블릿을 오가는 눈과 손이 분주하다.
다른 평범한 대원에게 이 일을 처리하라며 명령했다면 분명 볼멘소리가 나오고도 충분한 양임에도, 카일은 불만하나 없이 분류부터 빠르게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샤레이드의 초대규모 침식 현상 조사 보고⋯⋯.”
바쁘게 움직이던 손과 눈이 멈췄다. 어색하게 허공에 멈춰있는 검지손가락이 자기도 모르게 까딱거린다.
여전히 사람이 살지 못한다는, 그 도시에 대한 조사 자료.
전혀 다른 지역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던, 먼 지역의 사건이었지만.
그 파급력은 카일에게 있어서 너무 큰 사건이었던, 통칭 샤레이드의 대재앙.

“⋯!”
어지러울 정도로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관자놀이를 두어번 때리고 나서야 다시 문서자료를 쳐다볼 수 있었다.
일단 이 상자 밑바닥에 있는 종이 더미, 샤레이드의 대재앙 보고서가 마지막 자료인 듯했다.
스스로 지우고 싶은 안 좋은 기억을 들춰야만 하는 것 같아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좋든 싫든 명령과 프로젝트를 위해서 살펴봐야만 했다.
카운터 능력 덕을 이럴 때도 보면 좋으련만. 감정을 얼릴 수 있다면, 순식간에 냉철하게 식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카일 답지 않은 실없는 생각과 함께 전술태블릿에 대분류를 마치고 보고서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하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여전히 구체적인 사상자 집계 불가능하다고?
보고서엔 구체적인 수치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관리국은 모르는 거냐며, 인상을 확 구기곤 전술태블릿을 두들겼다.
물론 일부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겠지만 적어도 자료 초창부터 맥 빠지는 소릴 적어놓은 것을 보니, 실비아가 어렵게 해킹한 보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상자 집계 사실상 불가능.
최초 샤레이드의 침식재난 징조는 도시관리국에 들어온 제보에 의하면,
날벌레가 너무 많이 날아든다. 악취가 심하다.
이 징조의 근거는 샤레이드 직할 도시 및 그로니아등의 외곽 지역에 카운터사이드 이펙트 경보 4단계를 발령한 시점,
이미 샤레이드와 외곽 지역에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수준의 파리 떼들이 현장을 날아다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직 클리포트 게임의 징조로 보긴 어려우나 초대규모 침식재난이 발생한 이상 빠른 시일 내에 게임이 발생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음.
“클리포트 게임⋯?”
군사학교 시절은 물론이고, 델타세븐에 배정된 뒤에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용어였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껄끄러웠던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왼손엔 문서 오른손엔 전술태블릿을 바쁘게 두들기면서 빠르게 다음 내용을 훑었다.
“특이점으로 추정되는 고위험군 개체인 사도 간의 교전 흔적 다수. 여전히 파리왕은 은거 중이며, 해당 침식체들의 코드네임은 암호화하여 별첨⋯?”
‘별첨’이라는 단어에 황급히 문서의 맨 뒷장으로 넘어가지만, 별다른 자료는 없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할 거란 생각에 태블릿을 바쁘게 두들기고, 그 이후로도 카일이 앉아있는 업무 책상에서는 둔탁한 액정 터치 소리와 종이를 넘기는 소리, 종이 더미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캄파멘토에서 보고된 특수 개체에 의한 도시 괴멸.
특이사항. 파리목의 벌레 사체들. 그 외 특이한 구조체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소수.
이 말대로라면, 샤레이드의 대재앙의 원인과 특수 개체가 같다는 뜻인가?
⋯⋯
프론트베이의 다발적으로 발생한 국소 침식 현상.
사상자는 많지 않았으나, 국소적인 규모임에도 상당히 많은 카운터 전력손실 발생⋯⋯.
개중엔 실종된 후 행적을 알 수 없는 전력도 존재.
특이사항. 이번 국소 침식 현상에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통칭 그림자들은 본디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대부분 외형이 카운터일 적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변이되는 경우가 다수 있으나. 프론트베이에서는 비슷한 외형의 그림자를 목격했다는 제보가 다수 접수됨.
정황상 암군의 사도들로 추측.
⋯⋯.
혼잣말도 하지 않고 집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불현듯, 똑똑한 두뇌가 의문을 툭 내놓는다.
“관리국은⋯⋯”
이렇게 압도적인 정보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뾰족한 수가 없어서 계속 이렇게⋯
그 정도로 능력이 없다면 대의를 위해서라도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했어야지⋯
‘테라사이드 프로젝트’
관리국은 이 합중국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를 알면 가만둘 것인가.
클리포트 게임, 파리왕, 사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들이 이렇게 쏟아지고, 이런 걸 가지고도 재앙을 막지 못하는데.
합중국이, 우리가 그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가?
“⋯⋯.”
정신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이 얼어붙어 있었다.
왜, 왜일까⋯
어째서, 이렇게까지 많은 걸 알고 있음에도⋯ 왜 죽어야 했는지⋯.
아무것도 막지도 못하고, 되풀이하는 건지.
“하⋯ 하하.”
문서도 내팽개치고, 두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끓어오르는 감정의 온도를 차가운 손으로 식히려고 얼굴에서 떼질 않았다.
매번 이런 문서는 순식간에 들여다보면서⋯
카운터 워치는 이럴 땐 진짜 쓸모가 하나도 없다며 헛웃음을 터뜨린다.
이성을, 냉철함을⋯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야 다시 문서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됐을 때쯤.
삑― 삑―
“호출⋯?”
전술 통신기에 들어온 알림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급임무라고 하기엔 보안 채널로 온 통신이 아닌데다가, 호출한 사람은 꽤 의외의 인물이었다.
“실비아 씨?”
***
“그래서! 마리아 안토노프 님이 이끄는 델타세븐의 구성원들도 카운터즈 카드 한정판에 들어가면 어떨까 싶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됐습니다. 어떻습니까. 카운터의 인식개선에도 아주 큰 도움이 될 거고, 물론 비용도 섭섭하지 않게⋯⋯”
응접실의 테이블에는 한눈에 봐도 반짝반짝하고 휘황찬란한 카드들이 늘어져 있었고, 그 앞에 앉아있는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마리아 사령관의 긍정적인 사인을 받아내기 위해 보는 사람들이 짠할 정도로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부사령관은 부재중, 제이크 대령은 임무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니, 그나마 남아있는 대원을 실비아가 호출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출한 이유가 이딴 것 때문이었다니⋯
다시는 저 카드들 볼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군대에서도 저 카드들이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군대에서 카드놀이 할 일이 없을 테니 더더욱 그랬다.
“와~ 저거 엄청 유명한 거잖아! 저기에 실존 인물 실리는 거 웬만한 전쟁영웅이나 되는 건데, 진짜 우리가 들어가나 봐!”
어느새 카일의 옆으로 다가온 실비아의 호들갑에 카일이 황급히 그 옆에서 떨어졌다.
들떠 보이는 실비아 자신과는 다르게 경직된 표정으로 서 있는 카일이 의아한지, 떨어진 만큼 다시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왜 그래? 너 저 카드 몰라?”
모를 수가 없지.
차라리 아예 모르고 싶을 정도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기분이 나빠.
“저거 승인 나면 우리 얼굴 실리는 거잖아!”
싫다. 기껏 다 피해서 도망쳐왔는데 또 엮이라고?
왼쪽 손목이, 괜히 워치가 있는 부분이 차갑고 시려서 오른손으로 매만졌다.
“괜찮지 않아? 저거 마리아 아줌마처럼 영웅급의 카운터만 해주는 건데 우리가⋯⋯”
“필요 없습니다.”
수많은 말 중에서 제일 날카로운 한마디가 응접실에 메아리쳤다.
듣고 있던 마리아 사령관도, 그녀를 설득하던 직원도, 바로 옆에 있던 실비아도 크게 당황한 듯 카일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시선이 마구잡이로 꽂히는 이 불쾌한 느낌⋯ 꽤 오랜만이다.
“⋯죄송합니다.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황급히 자리를 뜨는 카일.
직원은 잠깐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마리아 사령관에게 한정 카드 제작을 위한 초상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지만⋯
“야! 카일! 너 왜 그래!”
실비아는 걸어가는 카일의 뒤를 쫓아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사자에겐 고통스러운 물건이지만, 제삼자인 실비아가 그걸 알 리가 없기에 카일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굴이 팔리는 게 싫어서? 군의 기강이 해이해질까 봐? 돈만 보는 속물들의 집단 같아서?
온갖 추측이 실비아의 머릿속에 오간다.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하도 소리를 지르는 탓에 지나가는 병사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흘긋 쳐다보고 갈 길을 간다.
여전히 포기할 줄 모르고 쫓아오는 실비아.
카일은 한참을 걷다가 복도에 우뚝 서더니, 고개만 살짝 돌려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뭐⋯ 왜⋯?”
새까만 동태눈깔로 변한 눈이 실비아를 노려보자 잔뜩 움츠러든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싶을 때 쯤,
“그림 카드 같은 무가치한 종잇조각일 뿐입니다. 수집해봤자 돈 낭비밖에 안 되는 것에 연연할 필요가 있습니까? 전 그럴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죠.”
카일다운 발상이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답안에 실비아는 멍해진 표정으로, 복도 저 멀리 걸어가 유유히 사라지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진짜 인생 피곤하게 산다며 한숨을 쉬곤, 마리아 사령관과 카운터즈 직원이 있는 응접실로 발길을 다시 돌렸다.
결국 델타세븐의 카운터즈 한정 카드 일러 섭외는, 이후 부사령관 도미닉 중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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