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복XXX)
[카챈창작대회] 첫사랑의 법칙 (6)
― 그저 매일 보던 별들 중 하나가 되겠지
5전 1승 4패.
오프라인 매장에서 달성한 주시영의 전적이었다.
마지막에 달성한 1승도 이대로 질 수 없다며, 각성 호라이즌을 필두로 한 허연거덱으로 사기를 쳐서 얻은 승리였다.
결국 그렇게라도 한 번 이겨봤으니 뿌듯하다는 듯, 주시영의 표정은 꽤 개운해 보였다.
“역시 카일은 대단해. 사기덱 안 쓰면 이기기 힘들어~”
“……게임하고 카드팩만 까보면 되지 왜 여기까지 와야 합니까?”
“응? 배 안 고파? 여섯 시 넘었는데? 내가 사줄 게~”
“하, 됐습니다. 더치페이하시죠.”
저녁 일곱 시 전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카드 샵을 나오자마자,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또 손목을 잡혀 끌려온 곳은 유명한 프랜차이즈 피자집, 이름에 걸맞게 꽤 큰 규모의 가게였다. 냄새만 맡아도 배가 꺼지고 군침이 도는 피자 냄새가 가득하고, 가게 안에는 남녀노소 다양한 손님들이 있었다.
피자가 다 거기서 거기지. 꼭 이런 데까지 와서 먹어야 하나…
카일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쪼옵, 쫍.
벌써 바닥을 보이는 주시영의 콜라잔.
이미 텅텅 비어버린 잔을 들어 빨대를 문 채 카일을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카일은 딱히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원해서 시내로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
주시영은 왼손으로 페트병 콜라를 끌어와 비어버린 콜라잔을 채우며 가벼운 이야기를 던진다.
“여기 스파이시 치킨 엣지 살라미 미트 짜르봄바 딥디쉬 피자가 맛있대! 아까 이거 주문했어!”
“……요즘 피자 이름은 다 그런 식입니까?”
“글쎄? 그냥 친구랑 먹으면 뭐든 맛있는 거 아닐까?”
“친구는 무슨…”
“그럼 카운터즈 플레이어? 아! 피자다!”
어이없어하는 카일 앞으로 직원이 먹음직스러운 피자를 내려놓는다. 거창한 이름에 대체 뭔가 싶었지만, 막상 보니 조각별로 올라간 토핑이 다른 피자였다.
조금 정신 사나운 디자인이긴 해도 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때깔에 오만상을 짓고 있던 카일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주시영은 뜨겁지도 않은 지 냅다 한조각을 집어 먹는다. 밝고 붉은 눈에서 별똥별이 쏟아진다.
그 행동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포크로 피자 한 조각을 끌어다 놓았다.
“맛있어! 카일! 어때? 진짜 맛있지?”
“아직 안 먹어봤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다 아는 맛 아닙니까?”
“다 아는 맛이어도 맛있으니까 찾아 먹는 거 아닐까?”
이 순간,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딱 맞았다. 어쨌든 맛있으니 좋다는 뜻.
한창 먹는 게 좋을 나이. 아무리 투덜거리고 꽁해져 있어도 배고픔은 거스를 수 없다.
주시영이 집어 간 조각의 반대편. 완전 정반대의 다른 조각. 주시영은 페퍼로니, 카일은 닭가슴살.
뜨겁고 기름지니 차마 들고 먹진 못하고, 나이프와 포크로 천천히 썰어서 먹는다.
저녁을 먹을 때긴 했지만, 카드샵에서 실컷 놀다 온 것 때문일까. 둘 다 한참 먹는데 정신이 없었다.
한 조각, 두조각… 세 조각쯤이 되어서야 숨을 돌리고, 다시 이야기꽃이 핀다.
“넌 미러전도 엄청 잘하더라? 똑같은 덱으론 이기질 못하겠던데.”
“…같은 덱을 카운터 치는 것도 이기려면 알아야 하는 전략입니다.”
“응응! 카일은 머리 쓰는 일 하면 잘하겠다. 음… 예를 들면 작전장교 같은 거?”
“되지도 않는 말을 막 던지시는군요.”
퉁명스럽고 성의 없는 대답이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륵 거리며 웃는 소리가 꽃향기처럼 은은히 맴돈다.
막 피어난 꽃처럼 활짝 웃는 얼굴을 피한다. 괜히 다 식은 피자 조각을 손으로 들어 올려 베어 문다.
“아하하! 맞아! 난 군인은 별로야. 너무 딱딱해~ 카일 너처럼?”
“…….”
“에이, 농담이야. 농담! 내가 널 싫어할 리가~”
카일은 그냥 쳐다봤을 뿐인데 황급히 수습하는 모습이 꽤 볼만하다.
괜히 카일이 불쾌했을까. 손사래를 치며 해명하더니 피자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냥 싫어해 줬으면 좋겠는데.
본심 아닌 본심은 꾸역꾸역 집어넣은 피자에 같이 삼켜져 내려갔다.
“근데 넌 핸드폰은 없어? 안 불편해?”
“…굳이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번호교환을 못 하잖아.”
“하? 됐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또 삐친 것처럼 튀어나온 오리주둥이.
하지만 이 패턴도 이젠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늘 하던 뚱한 표정으로 남은 피자 조각을 베어 문다.
어차피 3분도 안 가서 풀어져선 웃고 있을 거란 걸. 이젠 다 알고 있고, 예상하였다.
“아! 카일, 카일! 우리 저기 길 건너 베타트릭스 문고 가지 않을래?”
“하아…?”
그리고 보란 듯이 카일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
그래서 대체 카드깡은 언제 하자는 건지…
다행히 이번에도 손목이 잡힌 건 아니었지만, 주시영에게 끌려다니는 건 그대로였다.
대체 몇 년 만에 들러보는 대형 서점일까.
보통 필요한 참고서는 인터넷 주문. 읽고 싶은 책은 학교 도서관에서 빌리는 게 효율적이었으니 올 일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서점에서만 맡을 수 있는 막 인쇄된 종이의 냄새…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만, 카일은 이 냄새를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흐으으읍~ 새 책 냄새 좋은데? 아, 카일! 너 책 자주 읽던데. 나도 하나 추천해줘!”
“…그쪽이 책도 읽습니까?”
“너무해. 날 뭐로 보는 거야?”
내 이미지가 그랬냐며, 주시영은 머쓱하다는 듯 괜히 뺨을 긁적였다.
추천해달라고 하니 뭐…
카일이 먼저 앞서나가더니 낮은 책장 앞에 선다. 책 제목을 훑는 듯 쓱 보더니, 손을 올려 제법 두툼해 보이는 책 한권을 꺼냈다.
“역시 말은 그렇게 해도… 응?”
진짜로 해줬단 생각에 신나서 따라온 주시영이 두손에 올려지는 책의 무게에 당황했다.
책 제목을 보더니 책장에 붙은 팻말을 확인하고, 우는 소리를 낸다.
“추천해드렸습니다.”
“이런 걸 내가 어떻게 읽어… 됐어…”
“하! 못 읽겠으면 이리 주십시오. 다시 꽂아두겠습니다.”
주시영의 손에 들려있던 물리 공학책이 떠나고, 다시 책꽂이에 깔끔하게 들어간다.
묘하게 개운한 표정인 카일의 얼굴. 종일 끌려다닌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이겼다고 생각하고 꽂혀있는 물리 공학책을 쳐다보던 중.
“아이…! 진짜…!”
“카일! 저기 봐! 스티커!”
이젠 놓으라고 할 기운도 없었다.
카운터 손아귀가 얼마나 아픈데 종일 잡혀서 끌려다니니 뿌리치지도 못하고 은은한 통증이 맴돌았다.
주시영이 막무가내로 끌고 간 곳은 대형 서점이라면 꼭 하나씩 같이 있는 문구류 판매 코너, 그중에서도 여학생들이 좋아할 법한 스티커 뭉치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카일하고는 완전히 정반대의 세계 앞에 멈춰 서 있으니, 거부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주시영의 손힘이 약해진 틈을 타 손목을 털어낸다.
“귀엽지 않아? 응?”
“…딱히, 별생각 없습니다.”
“이거 봐! 이거 뱀 귀엽지! 사서 내 틴케이스에 붙여야겠다!”
“……”
왜 물어본 거야?
자기 혼자 신나서 스티커 뭉치 하나를 집어 들더니 깡총깡총 들뜬 발걸음으로 카운터를 향해 뛰어가는 주시영을 어이없게 바라본다.
대체 오늘 온종일 누구 좋으라고 나돌아다녀야 하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한쪽 가판대에 있는 시계 샘플들을 발견해 시간을 확인한다.
‘7 : 12 PM'이라고 적힌 전자시계가 계획했던 일곱 시 전에 귀가한다는 계획이 산산조각이 났음을 알렸다.
“아…”
작은 탄식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카일의 부모님은 야근으로 훨씬 더 늦게 오시니, 늦게 돌아간다고 누가 뭐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이렇게 의미 없이 나돌아다니는 것이, 집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과 너무 달라서, 그게 너무 피곤했던 탓일 것이다.
“카일! 이거 봐!”
계산을 마치자마자 뜯어서 붙였는지, 붉은색 틴케이스에 뱀 문양 스티커를 붙여서 보여주는 주시영.
대체 뭐가 그리도 좋은지,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이 스티커 내 틴케이스랑 잘 어울리지 않아?”
“……유치합니다.”
“에이, 귀엽잖아! 카일도 하나 붙일래? 무슨 색 좋아해? 빨간색?”
“……"
처음부터 답은 정해놨으면서 왜 물어보는 건지.
강하게 부는 꽃향기가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틴케이스 줘봐. 붙여줄게!”
“아, 여자애들 같아서 싫습니다.”
“그런가? 그럼 내 것만 자랑하지 뭐! 어때? 이 빨간색이랑 잘 어울리지?”
“하…”
붉은색. 붉은색 꽃이었다.
먼지 부스러기랑은 너무도 다른. 처음부터 섞일 수 없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나가자며 손짓한다.
그 향기를 쫓아 마지못해 따라 걷는다.
***
“짜잔! 오늘의 하이라이트!”
기대감에 잔뜩 커진 눈. 주시영의 두 손은 카드샵에서 구입한 카드팩 상자 세 개가 들려있었다.
마치 너도 얼른 꺼내라는 듯, 반짝이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같이 뜯어보는 거야!”
“그냥 먼저 뜯으시죠. 전 한 통밖에 안 샀습니다.”
“아니야! 같이 뜯어야 해!”
마지막까지 참 피곤하다.
주시영은 기어이 카일이 가방에서 카드팩 상자를 꺼내고 나서야 자기 것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너무 으슥하지도 좁지도 않은, 번화가의 흔한 골목길 한쪽에 서서 시작하는 카드팩 까기.
도시를 눈부시게 비추던 해도 점점 떨어지고, 두 얼굴엔 붉은 석양빛이 물든다.
“으갹!”
성격답게 비닐 포장을 뜯는 것마저 요란스럽다. 이제 한상자인데 주시영은 벌써 두 번째 상자를 까고 있었다.
혀를 한번 쯧 차고는 천천히 상자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포장을 뜯어서 열었다. 상자 속에 넣은 카일의 손에 첫 번째 라인이 잡혀 나온다.
툭! 소리와 함께 투명한 비닐 속에서 벗어나 마침내 바깥공기를 만나는 열 장의 카드들.
하나, 둘, 셋, 넷…… 역시 한정 카드는 쉽지 않네.
이미 있는 카드들이 대부분. 한정 카드에서만 볼 수 있는 깔끔한 디자인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한정 카드를 노리고 산 것은 아니었기에, 중간중간에 나오는 괜찮은 성능 카드들에 만족하고 있었다.
얼마나 뜯어봤을까, 아홉번째 라인을 꺼내 드는 순간. 벌써 세 통을 다 깠는지, 실망감 가득한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에이! 세 통이나 샀는데 없어!”
“그러게, 제가 말했잖습니까. 성능 카드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낮은 확률로 돈만 챙겨 먹는 상술에 속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한정은 다 모아줘야 인지상정이라구~”
주시영의 외침은 가뿐히 무시하고, 아홉번째 라인의 비닐 포장을 뜯었다.
다시 열 장의 카드들이 투명한 비닐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어! 나이엘 블루스틸 카드! 이거도 카일이 잘 쓸 것 같은데?”
“…러시덱 말씀하시는 거라면 나쁘진 않습니다만. 카운터 덱이 많아져서 대처하기 까다롭습니다.”
“치, 한마디를 안 져~”
입을 삐쭉거리는 주시영을 살짝 흘겨보곤 마지막 라인의 포장지를 뜯었다.
말이 마리아 리미티드 에디션 카드팩이지. 결국 악질 가챠상품. 메인이 되는 카드를 뽑기란 쉽지 않았다.
“어?”
“…?”
“어어어어?”
놀란 주시영이 카일의 손에 들린 카드에 삿대질하곤 발을 동동 굴렀다.
똑같이 뭔지 깨달은 카일도 이번만큼은 뚱한 표정이 아닌 개구리 왕눈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 어울리지 않게 카드를 잡은 손이 움찔거렸다.

“지, 진짜 마리아 카드잖아?! 역시 카일이야 대단해!”
“아니, 잠깐! 잠, 잠깐 이거 놓고…! 그만…!”
카드의 주인인 카일보다 더 신나서는 카일의 팔뚝을 붙잡고 깡총깡총 제자리에서 뛴다. 그 반동을 따라 카일의 팔도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요동친다.
떨어질 뻔한 카드를 꽉 붙잡고, 그만하라는 말을 대여섯번이나 하고 나서야 주시영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주시영에게 붙잡혀서 얼얼해진 팔을 불쾌하단 듯 손등으로 털어낸다.
“카일, 축하해~”
“예…?”
“응? 한정 카드잖아! 네가 뽑은 거! ”
해가 떨어지면서, 주황빛으로 물드는 거리가 그 빛을 받아서 왜인지 빨갛게 빛나는 단발머리.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부는 봄바람에 살짝 살랑이고, 마치 꽃밭에 만개하는 꽃들처럼, 붉은 눈 반달로 작은 입은 활짝 웃고 있었다.
잔뜩 신난 맑은 웃음소리가 왜인지 귓바퀴를 은은하게, 오래 맴돈다.
“그쪽은 못 뽑지 않았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카일이 뽑았잖아? 내 것은 나올 때까지 사면 돼!”
“그… 렇군요.”
평범한 학생이 돈으로 해결한다라…
오른손에 들고 있는 마리아 안토노프 한정 카드를 빤히 본다.
나온 건 기분 좋지만, 그 정도로 절실히 갖고 싶었느냐고 하면 딱히 그렇진 않았다.
어차피 다른 성능 카드들 몇 장 건졌으니 본전은 뽑은 셈이었고, 이 한정 카드를 가지고 있는다고 해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을 터.
…….
그래, 어차피 필요 없던 거고. 괜히 우는소리 듣기 싫으니까.
“하…”
“어휴, 땅 꺼지겠다. 한정 카드 먹었는데 기뻐해야...”
“가지시죠.”
“…엥?”
카일이 소심하게 한정 카드를 주시영에게 내밀었다. 반짝이는 카드 겉면, 그 위로 노을빛이 내려앉아 있다.
분명 신이 나서, ‘정말 나 주는 거야?’라고 넙죽 받아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게 뜬 붉은 눈도, 왜인지 뻐끔거리는 작은 입도, 고장이 난 듯 새 카드들을 만지며 꼼지락대는 손도…
모든 게 예상 밖, 변수였다.
주홍빛 노을이 너무 붉어서. 눈도, 머리카락도 더 붉게 보였다.
얼굴은 알 수 없었다. 노을이 붉어서 그랬을 것이다.
“…안 받아 갑니까? 팔 떨어지겠습니다.”
“……아!”
정신이 돌아온 듯 감탄사 한번을 내뱉는다.
이제 받아 가겠지 싶었지만, 주시영은 조심스럽게 카일의 손을 밀어낸다.
“…? 싫으면 말…”
“고마워. 그래도! 그건 네가 뽑은 거니까 네 거야. 그러니까 잘 보관해줘~”
“……"
한정 카드란 건 정말 극악의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카드였다.
어쩌면 이젠 그 카드샵에 있는 리미티드 에디션 카드팩을 전부 사도 없을지도 모른다.
부럽고, 갖고 싶을 텐데도. 탐내지 않았다.
그저 바보같이 활짝 웃고만 있었다.
들판에 만개한 꽃들처럼.
“시, 싫으시면 관두시죠.”
“아하하! 그래, 그래~”
괜히 목구멍 안쪽이 뜨겁고, 답답하다.
이상한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황급히 아무렇게나 쥐고 있던 카드들을 바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주시영은 이번만큼은 카일의 묘한 반응을 알아채지 못하고 양손 가득한 카드들을 정리하기 바빴다.
노을도 이젠 완전히 저물어가고, 가게의 간판들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간간이 네온사인들도 자신이 여기 있다며 뽐내는 듯 반짝였다.
“우리 다음에는 안 해본 새로운 덱으로 짜서 게임 하자! 내가 또 좋은 카드 찾아볼게! 약속!”
자기 멋대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언제까지 이럴 건지.
늘 그렇듯 똑같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대체 언제까지 쫓아다니는 겁니까…”
“그럼 카일은 내가 싫어?”
“…….”
싫다고?
갑자기 날아온 직설적인 멘트에 괜히, 주시영이 내민 새끼손가락, 쥐고 있는 카드 뭉치, 땅바닥… 시선이 마구 돌아간다.
목구멍 안쪽이 답답한 느낌. 속이 안 좋은 게 아닌데, 괜히 기침이 나올 것만 같아서 살짝 헛기침했다.
“왜 대답 안 해?”
“됐습니다. 이제 오늘은 이걸로 끝입니다. 해도 다 떨어졌고요.”
“흐음…? 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서 이만 헤어지자. 내일 보는 거야!”
“하아…”
주시영이 어색하게 내밀고 있던 손을 거두고 손 인사를 해 보였다.
그렇게 그대로 끝인 줄 알았는데…
“아!”
“네?”
“이거, 너 닮았어! 아하하!”
“……버려도 됩니까?”
“안돼!”
단호한 목소리로 멋대로 카일의 손가락사이에 고양이 스티커를 끼워 넣는다.
카일의 얼굴이 짜증으로 구겨진다.
“틴케이스에 붙여~ 안녕!”
거의 도망가듯이 빠져나가는 주시영.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서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다가 손가락 사이에 꽂힌 고양이 스티커를 내려다보았다.
아, 역시…
그냥 싫다고 말할 걸 그랬다.
***
“다녀왔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늦게 돌아온 집에서 반겨주는 것은, 잔소리도 걱정도 아닌 차가운 정적뿐이었다.
많이 지친 듯, 발을 직직 끌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방 불을 켬과 동시에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퍽!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카일의 몸뚱아리도 침대 매트릭스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하.”
들리는 건 방금 내쉰 한숨. 시계가 재깍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지쳐서 반쯤 감긴 눈이 깜빡였다.
아직도, 아직도.
꽃밭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에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재잘거리는 말소리 웃음소리가 귓바퀴를 맴도는 것 같아서 머리를 두어번 가로저었다.
싫다. 싫었다.
너무 낯설어서.
“하아…”
그게 너무 싫은 나머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럽다가, 너무 조용해지니까. 늘 조용한 방안이 유달리 더 적막하고, 고요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더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분명 목구멍 아래 깊숙이 뜨거운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구멍이 난 것처럼 괜히 시리게 느껴졌다.
카일은 내가 싫어?
올리브색 눈동자가 반쯤 가려진다.
“……어, 싫어.”
당사자 앞에서는 못 할 말을 툭 내던지며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를 벗어나, 성큼성큼 가방 앞으로 걸어가더니 오늘 얻은 전리품들을 꺼내 펼쳐본다.
그중에서도 제일 거슬리는 것 두 장…
마리아 안토노프 한정 카드, 그리고 웃는 표정의 고양이 스티커.
대체 이 고양이가 어딜 봐서 자길 닮았다는 건지. 카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틴케이스에 붙이라고 주시영은 말했지만… 결국 카드와 스티커는 카일의 책상 서랍에 숨겨진다.
“피곤해…”
머리를 짚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흐릿하게 책상 위에 올려둔 캘린더가 보였다.
피로가 쌓인 탓인지 반쯤 감은 눈은 아직도 동태눈깔이었다.
4월, 4월…
“……어?”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삑사리가 났다. 오른손이 다급한 듯 캘린더를 들어 올렸다.
몇 초 더 들여다봤을까. 상황을 파악한 듯, 피로고 뭐고 카일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중간고사.
시험을 잊고 있었다.
“아니, 하… 그 망할... 걔만 아니었어도…!”
미숙한 손짓이, 얼떨결에 꽃밭의 꽃을 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