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챈창작대회] 첫사랑의 법칙 (9)
―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았어야지
문이 열린 냉장고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냉기.
여름이 찾아와 후덥지근한 집안. 카일은 이 문을 계속 열어둘까 잠깐 고민하다, 곧 우유를 꺼내 들어 문을 닫았다.
“요즘은 안 남겨 놓으시네…”
항상 냉장고엔 어머니가 쓰신 메모지 한장이 붙어 있곤 했다.
무슨 반찬이 있으니 챙겨 먹으라던가, 그마저도 힘들 땐 사다 먹으라며 지폐 몇장을 식탁에 올려놓고 출근하셨지만.
요즘은 그것마저도 하기엔 바쁜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리얼이 그릇에 부딪혀 나는 소리. 그 위로 쏟아지는 흰 우유.
바삭―
와그작.
식탁에는 시리얼을 씹는 소리와 가끔 그릇에 숟가락이 부딪쳐서 나는 맑은소리만이 들렸다.
평소대로라면 한쪽엔 노트를 펼쳐놓고 식사와 공부를 겸했지만.
오늘은 유달리 몸도 두뇌도 원하는 대로 돌아가질 않아서, 그저 멍하니 벽만 보며 아침을 때우고 있었다.
부어놓은 시리얼이 눅눅해져서 더 이상 바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오늘 할 일을 곱씹었다.
물리, 화학 2챕터…
문학 백 칠십 페이지까지…
“아.”
황급히 눅눅해진 남은 시리얼을 입에 욱여넣더니, 우물거리며 자기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피곤해 보이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캘린더를 집어 들어 살펴보는 올리브색 눈에 초점이 조금 또렷해졌다.
오늘 날짜에는 파란색 동그라미가. 그 옆으로 작게 쓴 글씨.
‘ 신상 카드 출시 - 온라인 구매 불가능’
원래대로라면 노트북으로 온라인 구매를 했을 테지만, 이번 카운터즈 카드는 이례적으로 오프라인 매장에 먼저 카드팩 물량을 풀었다.
마리아 안토노프 리미티드 에디션처럼 극악의 확률을 지닌 한정 카드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성능이 좋다고 평가받은 카드가 꽤 들어있는 편이라는 소식에 경쟁이 심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거기다 온라인 판매는 언제 될지 미지수.
이는 극악무도한 성능지향형 플레이어인 카일에게 있어서 수집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카일이 시내에 아는 카드샵이라곤, 예전에 주시영에게 끌려가다시피 방문한 그 카드샵이 전부였다.
어차피 오래전에 주시영과 한 번 간 게 전부였으니 카드샵사장이 카일을 알아볼 확률은 낮았지만, 떨떠름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곳 찾아서 가야 하나… 멍하니, 들고 있는 캘린더를 내려다보았다.
“2학기에, 네가 괜찮은 날에… 놀지 않을래?”
“…아으!”
이러다 목뼈 부러지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로 세차게 젓는 고개.
마치 꼭, 잊고 싶은 아련한 옛 추억을 꺼내 본 것만 같은 기분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캘린더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책상 서랍을 여니, 여전히 그 안엔 마리아 안토노프 한정 카드와 얄밉게 웃고 있는 고양이 스티커가 있었다.
그 스티커랑 눈이 마주치니 괜히 또 기분이 이상해져서, 몸속이 간지러운 듯한 느낌에
쾅!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서랍을 세게 닫아버린다.
“약속에 대한 답은 그때 말해줘.”
“…안녕!”
그놈의 ‘약속’…
가벼운 듯하면서도 무거운 의미.
그 말을 듣고, 방학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여전히 약속에 대한 답은 정하지 못했다.
싫다―라고 생각하면서 우습게도…
이따금 가지고 있는 카드들을 꺼내서 새로운 덱을 만들어보기도 하는 모순적인 행동 때문에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진다.
그런 식으로 계속 답을 내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냥 아주 물러터졌다.
공부할 때처럼, 시험지에 답을 적는 것처럼.
딱 정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멍하니 서 있기를 잠시…
“……그냥 빨리 갔다 오자.”
또 그렇게 선택을 유예한다.
어차피 2학기는, 개학은… 멀었으니까.
***

방학식 이후로 나간 적이 없었으니, 일주일만의 외출이었다.
하늘을 드문드문 가리는 구름이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고, 여름치곤 꽤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불쾌하진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수많은 빌딩 숲이. 몇몇 빌딩에 붙어있는 대형 전광판에는 광고영상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역시 너무 실내에 박혀있는 것도 안 좋은가―라고 생각하던 찰나.
“어? 아이씨…!”
얼굴에 툭 하고 떨어지는 물 한 방울.
한 방울, 두방울… 후두둑 쏟아지는 빗줄기.
분명 일기예보엔 비 소식은 없었는데, 빗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급히 근처 아무 건물에 딸린 처마 밑으로 달려가 쏟아지는 빗방울을 피한다.
“해가 떠 있는데…?”
아직 햇볕이 인도에 그대로 내려앉아 있는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가 아닌 흔히 말하는 여우비에 가까운 비였다.
소나기든 여우비든 조금 내리다 그치는 비일 테니, 굳이 일회용 우산을 산다든가 하는 쓸데없는 지출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카드를 사러 가는 시간을 넉넉히 잡고 나왔으니까, 조금 늦게 들어간다고 계획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번에 라파엘라랑 히든 챌린저가 괜찮다던데…
아그네스도 나쁘지 않고…
그렇게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는 카드들을 생각하던 중.
“…?"
시내에 울려 퍼지는 묘한 멜로디에 고개를 들었다.
마치 뉴스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오프닝 멜로디에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여기저기로 돌리자, 빌딩에 붙은 모든 전광판에서 진짜로 뉴스 앵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 안녕하십니까. 관리국 ADM에서 뉴스 특보를 전해드립니다. ]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기에, 카일은 전광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관리국에서 나온 뉴스 특보라면 보통 일은 아닐 터.
괜히 긴장되는지 전광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을 꼴깍 삼켰다.
[ 협정 시계시 기준 오늘 새벽 5시 샤레이드에 대규모 침식재난이 발생했습니다. ]
[ 샤레이드 직할 도시 및 그로니아등의 외곽 지역에 카운터사이드 이펙트 경보 4단계를 발령했으며, 로터스 직할 도시에는 카운터사이드 이펙트 경보 3단계… ]
시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뉴스특보. 사안이 사안인 만큼 긴급특보로 보도하는 듯했다.
무슨 레벨인지 뭔지 어렴풋이 알고 있던 카일은 4단계라는 단어에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했다.
대규모 침식재난이라니… 좀 무서운데.
괜히 소름이 돋는 팔을 양손으로 쓸어내리며 뉴스특보에 귀를 기울였다.
[ 현재 샤레이드 직할 도시엔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임을 선포했으며, 위성 카메라 관측자료 확인 결과… ]
[ 계속해서 해당 직할 구역 태스크포스들이 대응 중인 것으로 보이나, 샤레이드의 전망은… ]
살면서 이렇게 대형전광판으로 침식재난특보를 보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직접 겪은 게 아니니, 별로 와닿지 않…
……잠깐만.
샤레이드라고…?
[ 현재 샤레이드의 대규모 침식재난 사태를 조사하던 관리국은 아직 사상자와 실종자의 집계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고 밝혔으며… ]
“나 방학에는 샤레이드로 돌아가거든.”
시내를 울리는 앵커의 목소리가 점점 먹먹하게 들린다.
말소리가 뭉개지고, 자꾸만 멀어져갔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의식이 붕 뜨는 것 같아서.
꿈이나 착각이 아닐까. 자기도 모르게 건물 처마를 벗어나 떨어지는 비를 맞는다.
차가운 빗줄기. 꿈 따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거짓말 같아서.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비현실적이라서.
잔뜩 수축한 눈동자가 주위를 훑는다.
두손으로 입을 가리고 겁먹은 듯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여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옆 사람과 수군거리는 남자.
카일과 똑같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사람들.
실제 상황이라며 특보를 이어가는 앵커의 목소리.
자꾸만 들리는 단어.
샤레이드
샤레이드
샤레이드
샤레이드
샤레이드.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야―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기억 속의 주시영은 너무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 고향은 여기가 아니라 샤레이드라는 대도시야.”
아니야. 이런 거… 이런 거 아니…
“ 얼마나 머냐면 음… 비행기 타고 몇시간 정도 슈우웅― 날아가야 해.”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거 잖아…
갑자기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진다고? 이렇게 갑자기?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 현재 관리국은 침식재난 진압을 최우선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발표… ]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헉… 허억…”
당혹감으로 숨이 거칠어진다. 양팔을 붙잡고 파르르 떠는 모습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악몽 같아서, 꿈이라고 하고 싶은데.
차가운 빗방울이 진짜라며 조롱한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살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 상황. 이 모든 게 낯설고, 진짜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일반인은 겪을까 말까 한… 겪어서는 안 되는 일이…
왜 하필 그곳에서…? 아니, 왜 내가 이런 식으로 그 앨 걱정해야 하는 거지…?
지극히 평범한 일도 아니고… 갑자기, 갑자기… 갑자기 이렇게…?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서서히 그쳐가지만, 전광판에서 나오는 앵커의 목소리가, 이건 실제상황이라며 멘트를 멈추지 않았다.
모든 건 실제 상황이라는데. 내가 겪는 게 아니라서 꿈만 같은데. 비현실적인데…!
그 앤 거기에 있잖아. 샤레이드로 돌아갔을 거잖아!
아니야, 혹시 모르잖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하아… 하아…"
학교에서 이따금 하던 침식재난 관련 교육… 그것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관리국이 수습하기에도 벅찬 침식재난 속에서…
고등학생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내가, 내가… 직접…“
내가 직접 확인할 거야…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멀어지길 바랐던 건 아니였다고…!
“허억… 하아…… 흐으…”
빨라지는 숨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이미 앵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현재 샤레이드 직할 도시와 외곽지역을 제외한, 로터스 직할 도시의 카운터사이드 이펙트 경보 단계가 하향 조정되었다는 소식입니다. ]
[ 이례적인 침식 재난 규모에 타 관리국 지부의 태스크포스가 긴급 동원 중이며… ]
[ 합중국에선 재난 수습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동시에 앞으로의 대책을 위한 중대 발표가 있을 예정임을 밝혔습니다. ]
침식재난 지역에서 실종이란 게 무슨 의미인지는 따로 배우지 않아도, 고등학생이면 충분히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
비현실적이지만, 잔혹한 이야기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려운 이야기여서.
부정하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
너무나도 화창한 챔버의 시내는
앵커가 전하는 소식에 더욱 괴리감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