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편
[카챈창작대회] 첫사랑의 법칙 (12)
― 눈앞에 너의 모습을 도망치려 애써도...
또 도망친다.
이번엔 손에 잡히지 않는 진실이 아니라.
정말로 학교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평소라면 엄두도 안 냈을 조퇴.
거의 통보에 가까운 수준으로 담임선생님께 내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하지만,
분명 도망치고 있는데, 도망치려고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부서져! 부서지라고! 아악⋯!”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교복 차림으로 가방도 그대로 메고,
집 뒷마당에 숨어, 꽤 묵직해 보이는 바위를 들어 바닥을 내려찍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어서.
손목을 옥죄는 차가운 감촉에서 도망치려고.
손목의 워치를 풀어 놓고, 부수려 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내리는 비에 온몸이 젖고, 워치도 고여있는 물웅덩이에 빠져서 바위의 충격을 받아내지만.
워치는 절대 부서지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학⋯ 윽!”
빨라지는 호흡은 이미 직감하고 있지만, 멈추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워치를 있는 힘껏 밟는다.
마구잡이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엉망진창으로 밟아대지만.
이미 시곗바늘은 돌고 있었다.
“아으아⋯ 하아⋯ 아아아악―――!!”
절규와 함께,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버렸다.
부릅뜬 두 눈에 비치는 워치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너무도 멀쩡했다.
막연히 아닐 거라며 피해왔던 진실.
외면하고 싶었던 결과.
조금의 여지조차 새하얗게 타들어 가 사라졌을 때.
얼얼할 정도로 세게 잡혔었던 그 손목엔 차가운 한기만이 남았다.
잔인할 정도로, 그 차가운 감촉이.
더 이상의 온기도 없다고, 선명한 진실이라고 조롱하고.
도망치고 싶어도.
이젠 핑계가 되어버린 약속을 피할 수 없다는 듯.
워치는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계속 천천히 시곗바늘을 돌리고 있었다.
정말 웃긴 일이다.
평범하고, 사회성은 조금도 없는, 이딴 부스러기 같은 놈이 카운터라니.
“하하⋯ 아하하하⋯”
주시영은 카운터였으니까, 카운터니 제 몸 어떻게든 간수해서 살아있을 거라며, 새빨간 진실에서 도망쳤지만.
살아있을 거라는 여지조차 태워버린 하얀 국화꽃들을 본 순간.
워치는 마치 주박처럼⋯
카일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하하⋯ 하하⋯ 흐윽⋯ 어쩌라는 거야⋯ 나보고⋯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데⋯!”
그게 너무 웃겨서. 우스워서 헛웃음이 계속 터져 나왔다.
목 안을 긁어내며 지르는 악에 받친 절규 소리가 헛웃음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그러나 울음 섞인 비명에도,
쨰깍거리며 시곗바늘을 돌리는 워치는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체 왜 나한테! 어째서! 이딴 걸⋯!”
이런 거 필요 없다며, 다시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돌아가고 싶다고.
비겁한 변명으로 변해버린,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주먹을 쥐어, 워치를 힘껏 내려쳤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지우고 싶어도, 지나간 기억을 잊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낙인이 눈앞에 있다.
“하아⋯ 아하하⋯ 하하⋯”
결국 손을 뻗어 반짝거리는 워치를 잡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차가운 비에 젖어버린 몸을 이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에 푹 젖은 탓에 온몸이 불쾌한 감촉으로 가득했다.
“다녀⋯ 왔습니다⋯”
현관 앞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언제 돌아오든지 간에, 항상 적막하고 고요한 집안.
넋이 나간 것처럼, 초점을 잃어버린 두 눈은 멍하니 바닥을 응시했다.
여전히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조심스럽게 워치를 쥐고 있던 손을 폈다.
“하⋯”
체념 섞인 한숨과 함께, 빗물이 떨어진다.
이미 푹 젖은 머리카락과 얼굴을 타고, 힘없이 내려놓은 워치를 쥔 손 주위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새것처럼 반짝이는 워치를 텅비어버린 눈동자가 내려다보았다.
“흐윽⋯”
워치를 부숴보겠다는, 의미없는 짓을 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워치 따위가 사용자의 힘으로 부서진다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워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카운터가 되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다시는 볼 수 없는 누군가처럼.
이젠 더 이상 혼자 남아 있는 교실에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테니,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절대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었다.
“하하⋯ 기분 나빠⋯⋯.”
막상 이런 식으로 카운터가 되어보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왜 하필 난지. 그것도 주시영이 죽었다고 인정해버린 순간이었는지.
그 모든 게, 빗물이 온몸을 덮어서 질척하게 붙어버리는 감촉처럼.
불쾌한 것들 투성이었다.
왜, 나에게?
어째서 나한테?
카운터 한명이 죽었으니 나보고 대신하라는 건가?
아니면, 도망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기억하라고?
웃기는 소리⋯!
“나도 카운터즈 카드에 실존 인물로 실리는 베테랑 카운터 할거야.”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그 반동으로 빗물이 사방으로 튄다.
평소라면 기겁하며 튄 물기들을 닦았을 테지만,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그럴 여유가 없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난⋯ 그딴 거⋯ 죽어도, 안 할 거라고⋯”
빗물에 젖어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고, 푹 젖어 무거워진 가방을 대충 내던졌다.
묘하게 독기가 가득 차 보이는 눈을 치켜뜬다.
이 워치가 그 애를 대신하라는 뜻이라면,
죽어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
“콜록⋯”
카운터가 되면 거의 금강불괴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인듯했다.
너무 오랫동안 차가운 비를 맞은 탓에 감기 기운이 도는지, 잊을만하면 기침이 나왔다.
“켁⋯ 콜록⋯ 아⋯”
벌써 자정을 넘긴 시간. 낮과는 달리 꽤 차분해진 표정으로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듯했지만⋯
묘하게 뜨거운 듯한 목 안. 기침할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혹시나 해서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지만, 혼자서 그래봤자 열이 나는지 안 나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숨과 함께 의자에 거의 눕듯이 기대던 찰나, 도어락 비밀번호 소리가 들려왔다.
끼기긱-거리며 열리는 현관문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카일⋯! 너! 무단 조퇴했다고⋯!”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들려오는 예상하지 못한 높은 언성에 잠깐 카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알아서 잘하다가 갑자기 왜 그러니. 응?”
“어머니⋯”
“어머, 목이 다 쉬었네. 아파서 조퇴한 거야? 아빠한테 오는 길에 약 좀 사 오라고⋯⋯”
오늘따라 과하게 쏟아지는 관심에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서는 말을 할 일이 없으니, 목이 이 정도로 부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카일은 몸과 의자를 어머니가 있는 쪽으로 돌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너희 아빠한테 사 오라고 말⋯”
“저, 카운터가 됐어요⋯”
전화를 걸려던 어머니가 놀란 듯, 크게 뜬 눈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카일을 내려다보았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워치가 돌아가는 소리인지, 탁상시계 소리인지⋯
귓바퀴에 크게 울리는 시계 침 소리가 거슬릴 때쯤.
“그거 별로 안 좋은 거 아니니?”
그래. 보통 이런 반응이셨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목덜미를 긁적이더니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딱히요. 관리국에 정식라이선스 등록하면 큰 문제는 없을걸요. 콜록⋯”
“흐음⋯ 그렇구나. 한번 알아보렴. 등록비는 내줄 수 있으니.”
“⋯⋯네.”
묘하게 느껴지는 무심함.
하지만 괜히 깊게 물어보는 것보단 나을 수도⋯
새삼스럽게 뭘.
조금 뒤, 어머니는 아직 집에 남아있는 상비약 중에 감기약이 있다며, 카일의 손에 올려주었지만⋯
붉은색의 알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불쾌한 느낌이 들어서.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곤, 먹지 않았다.
꽤 차분해진 듯했지만, 완전히 부어 타들어 가는 통증으로 가득한 목구멍처럼.
마음도 타들어 가고 있었다.
늦은 새벽에 침대에 눕는 누울 때.
그냥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