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카챈창작대회] 첫사랑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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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챈창작대회] 첫사랑의 법칙 (16)

― 착한사람이였음 안 그랬겠지














문학이나 세계사 같은 것 보단 전술, 훈련, 군사학.

꽃과 나무가 가득한 교정에서 풍겨오는 꽃향기나 풀냄새가 아닌, 탄약 냄새 가득한 이곳에서 중요한 건,

원리원칙과 최선의 결과, 노력 그리고 출중한 능력이었다.


평범한 학교였다면 이곳 또한 작은 사회이니 친구를 강조했겠지만⋯

이곳에서 타인과의 교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 그 이상의 정서적 교류는 그저 낭비에 불과하다.


필요한 만큼의 감정교류만 하면 되고, 원리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면 되는 곳.

카일이 지금 있는 군사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명령에 따른 최선의 결과만을 볼 뿐, 한명의 인간으로서의 다른 무언가는 강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쳇바퀴 같고, 꽉 막혔으며, 인간적인 모습은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쓸데없는 잡념은 땀과 흙먼지가 덮고, 하루를 끝내는 샤워실에서 그날 훈련 내용을 곱씹으며 씻어낸다.

그렇기에 카일은 군사학교에서의 생활이 평범한 고등학교에 있을 때보다 더 마음에 들었는지, 다른 훈련생들보다 적응이 빨랐고, 훈련에서 두각을 보였다.


물론 카운터 능력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워치만 믿고 설치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린 선택을 한 만큼,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자 했다.


샤레이드의 대재앙 사건 이후로 늘 맹탕이었던 눈은 총명해지고, 평범한 고등학생은 어엿한 한명의 군인으로.

교관에게 융통성 없다는 소리까지 매일 같이 들어가며 달려온 지금, 대표로 프로젝트의 공개 시연에 나갈 만큼 카일은 수많은 훈련생 중에서 제일 주목을 받는 엘리트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노력하는 천재라는 말이 딱 맞는 훈련생인 만큼,

공개 시연에서 어떤 누군가가 특히, 더⋯ 그 특출난 인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델타세븐이라면⋯.”

“마리아 안토노프 사령관님께서 지휘하는 부대다.”




교관이 화려한 근접전투를 시연하라고 보내놨더니 20초 만에 행사를 끝내버려서 한 소리 듣는 줄 알았다⋯ 라며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와 지금까지도 언론의 주목을 받는, 합중국의 영웅.

지금의 카일을 만드는 데 결정적 계기를 한 참된 군인, 사령관.

다른 카드는 전부 불태워 없애버렸어도, 차마 불태워 버리지 못했던 그 카드의 주인공.


그 사령관이 지휘하는 부대에 발령받는다는 것⋯

인간미가 조금도 없어 보이던 얼굴도 동요하는 게 똑똑히 보일 정도로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넌 이제부터 델타세븐 내사과 소속의 카일 웡 대위가 되는 거야.”

“제가 델타세븐 소속⋯”




뒷말을 잇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본인이 훈련생 중에서 제일 뛰어나고, 기대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렇게 쉽게 ‘우상’에 가까운 사람이 사령관으로 있는 부대에 갈 수 있다는 이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불신으로 눈썹이 꿈틀거렸다.




 “⋯⋯결재에 착오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평소보다 목에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주장한다.




“만일을 대비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진위에 대한 사실확인 절차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나 참. 발령서 보여달란 얘기를 뭘 그렇게 어렵게 해?”




실컷 읽어보라며 교관이 퉁명스럽게 건네주는 발령서를 받아 들었다.

두손으로 들고 있는 발령서는 카일이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문서의 양식과 같았고, 국방부의 직인이 찍혀있었다. 

이제야 정말 실감이 나는지 아주 살짝, 정말 웃는 듯 마는 듯,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훈련생 주제에 대위 진급이라는 전례 없는 특혜야. 트집 잡히기 싫으면 우쭐해 하지 말고 처신 잘해.”

“⋯⋯.”

“뭐, 계급은 고사하고 델타세븐에 발령된다는 것 자체가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만⋯” 




세상모르고 발령서에 눈을 떼지 못하는 엘리트 훈련생을 보며 혀를 찼다.


하필 가도 말이 좀 많은 데를 가네.

이상한 부분에서 꽉 막혔어도, 어쨌든 아까운 인재라며 고개까지 젓는다.


카일은 아는지 모르는지, 묘하게 측은한 얼굴로 보고 있는 교관을 향해 무언가 생각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당히 말했다.




“교관 중위. 말하는 중에 미안하지만, 여긴 군대입니다. 상관인 제게 하대는 지양해주시죠.”

“야, 이 새끼야! 너 아직 진급식도 안 했거든?”
















***











깔끔하게 델타세븐의 정복을 갖춰 입고 서 있는 이곳.

카일의 눈앞에는 다큐멘터리나 뉴스 기사에서나 보았던 델타세븐의 작전사령부가 있었다.

거대한 크기의 사령부, 위압감에 몸이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거대한 입구. 그 입구에 있는 독수리의 문양.

훈련생 때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입대 이후로 늘 침착하고 냉철하던 카일도 긴장이 되는 듯 괜히 주먹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거대한 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천천히 입구가 열리고⋯

그 안에서 선글라스를 낀 금발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계급장, 대령인 듯했다.

한눈에 봐도 계급에 비해 젊어 보이는 외모,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상관이 카일의 앞에 선다.




“여. 네가 신입이구나?”

“예, 오늘부로 델타세븐 내사과로 발령받게 된 카일 웡 대위입니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야,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거수경례와 관등성명에 대령 계급의 남자가 호탕하게 웃는다. 

예상하지 못한 웃음소리에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운 듯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래, 내 이름은 제이크 워커. 대령이고,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아, 아닙니다. 워커 대령님.”

“하하! 자, 어서 가자고. 사령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역시 합중국의 군사기지다운 아주 넓은 복도.

제이크 대령은 사령관실로 가는 길 내내 카일에게 질문들을 던졌다.

앞으로의 각오라던가, 훈련성적과 같은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더니⋯ 술 좋아하냐는 둥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오가니, 카일은 사실 자기가 속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잠시 떠올랐다. 어쩐지 처음부터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더니⋯.



몇번의 커브와 계단⋯ 마침내 도착하고, 그 앞에 서자마자 열리는 사령관실의 문.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제이크 워커 대령보다도 더 큰 덩치의 낯익은 남자였다.

마리아 안토노프 사령관의 다큐멘터리에서 항상 옆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 부사령관, 도미닉 킹 레지날드 중장.

다큐멘터리에서도 줄곧 안토노프 사령관의 오른팔이라며 계속 언급되었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네가 카일 웡 대위인가.”

“네, 오늘부로 델타세븐 내사과로 발령받게 된 카일 웡 대위입니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령관님⋯”




미디어 매체에서나 보았던 합중국의 영웅이, 마리아 안토노프 대장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을 뿐인데, 그 모습에서 나오는 위압감에 거수경례하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역시 괜히 영웅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외형이 모든 걸 좌우하는 것은 아니나, 눈앞의 사령관은 다큐멘터리나 뉴스 기사로 본 것보다도 영웅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온몸의 신경이 긍정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런 사람들과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거란 사실이 기쁜 듯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처음 발령서를 보았던 날처럼⋯ 아주 살짝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정의해준 사람. 이제는 소속 부대의 사령관인 마리아 대장과 도미닉 중장과의 대화를 이어 나가던 중, 사령관실의 문이 열렸다.


투박한 군복을 입은 남자가 각 잡힌 거수경례를 하고, 그 옆으로 사복 차림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령관님. 실비아 레나 쿠퍼 양이 도착했습니다.”

“내가 너무 늦었을까, 아줌마?”

“아니야. 마침 잘 왔어. 마침 새로운 대원도 와있으니 잘됐군.”




이미 안면이 있는 모양인지 마리아 대장과 실비아 사이에 살가운 대화가 오갔다.


아줌마라니⋯?

위계질서가 확실한 군대에서 저런 호칭이 오간다니. 카일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황급히 눈을 돌려 제이크 대령과 도미닉 중장의 반응을 살펴보았지만, 이미 저 여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 크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사령관님, 저분은 누굽니까⋯?”




카일이 조심스럽게 안토노프 대장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방금 들어온 여자가 대신했다.




“음, 스카우트 된 천재 해커라고 할까?”

“하아⋯?”




실속이라곤 하나도 없는 답변에 카일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미닉 중장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보충한다.




“대위와 마찬가지로, 오늘부터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될 민간 전자전 고문 실비아 레나 쿠퍼 양이다.”




정식루트를 밟은 생도가 아니라 그저 민간 고문이었다니⋯

아무리 그래도 군대는 군대이거늘. 너무 자각이 없는 게 아닌가?


카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쿠퍼 양.”

“하하하! 뭐야! 숫기가 하나도 없네!”




박장대소를 하며 카일의 등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카일보다도 더 강한 카운터의 힘 때문에 꽤 아픈지, 앓는 소리를 내며 제이크 대령의 손이 닿지 않는 위치로 몸을 피한다.


생각했던 분위기와는 다른 부대원들은 둘째치더라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 여자를 볼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군사학교에서 그랬듯, 타인과의 교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며 그 이상의 정서적 교류는 그저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왔기에, 굳이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걸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안녕? 잘 지내보자고. 음⋯ 이름이?”

“⋯⋯그냥 대위라고 부르십시오.”




퉁명스러운 대답에 실비아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빨간색의 동그란 뿔테안경을 고쳐 쓰며 카일의 태도에 실망감을 드러낸다.




“뭐야⋯? 나랑 비슷한 나이대가 있다고 해서 나름대로 기대하고 왔는데 말이야. 왜 그렇게 까칠해?”

“하하, 숫기가 없어서 그렇겠지. 뭣하면 내가 대신 놀아줄까, 아가씨?”

“ㅁ, 뭐?”




능글거리는 멘트에 실비아가 기겁하며 제이크 대령에게 무어라 소리치고, 웃음소리나 걱정스러운 말들이 오가지만, 카일의 귀에는 이미 잘 들리지 않았다.


살가운 인사는 아니나, 딱히 경계하지도 않는 목소리. 움직임을 따라 살랑거리는 단발 머리카락, 그리고 빨간색의 뿔테안경⋯


하나 같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순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잊고 있었던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

목구멍에 턱- 걸려서 숨쉬기 답답하고 뜨거운 감각.


그게 너무 불쾌해서, 기억이 날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령관이 이쯤 하자며 자리를 해산시킬 때까지,

심기 불편하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카일의 얼굴은 줄곧, 학교에서 평범하게 공부하던 그때처럼⋯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배정받은 관사의 어느 어두운 방 안.

정갈하게 각이 잡힌 대신, 편안한 활동복을 입은 카일이 부엌으로 나왔다.


다시 또 돌아온 동태눈깔. 그리고 조용히 활동복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가⋯ 

다시 나온 손에 딸려 나온 것은 카운터 양성 프로젝트에 참가하기 전, 유일하게 불태워 없애지 못했던 어떤 흔적, 롤모델의 카드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며 남겨두고 있었던 카운터즈―마리아 안토노프 한정 카드였다.


스스로 선택해 뽑았던 카드팩에 있었던 거니까, 실존 인물 사진을 막 찢는다는 찝찝함이 싫다며, 온갖 핑계와 합리화로 남겼던 어떤 교집합.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자긴 괜찮다며 자기 위로를 해왔지만⋯


새빨갛고 동그란 뿔테안경이, 그 인사가.

스친 페이지들이 세운 날에 여전히 베이고 있다는 사실을 마구잡이로 인식시키는 것 같아서.




“지겹네, 정말⋯”




탁, 탁!

어느새 꺼내 들은 작은 라이터에 불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한정 카드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결국엔 시간이 이렇게나 오래 흘렀는데도, 사소한 상황에 심기가 불편해진다면, 침착하고 냉철해질 수 없다면.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데 분명 문제가 생길 거라고. 그러니 조금의 걸림돌이 되는 모든 건, 전부 지워버리겠노라고.


어차피 이젠 가까운 곳에서 임무를 받아 수행할 수 있으니까. 롤모델이 제일 가까운 곳에 있으니 더는 필요 없어.




그렇게 한정 카드였던 것, 마지막으로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던 흔적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다음편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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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치운다고 다됐으면 처음부터 그 고생을 안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