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카챈창작대회] 첫사랑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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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챈창작대회] 첫사랑의 법칙 (17)

―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어떻게 이런 애늙은이 같은 놈이 있지?


마리아 대장의 스카우트 제안을 수락하고 델타세븐으로 온 실비아는 분명 똑똑히 들었었다.

실비아와 비슷한 나이대의 대원이 실비아와 같은 시기에 새로 올 것이라고. 

물론 일단은 일하는 직장에서의 만남이니 다른 사적인 감정은 없었으나, 해커로서의 삶을 사느라 자기 또래 친구와의 교류가 적었던 실비아에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신경을 쓰게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일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그리 좋지 않았다.

뚱한 표정에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데다가, 자기에겐 매번 지적이나 잔소리만이 날아오곤 했다.

아무리 너드의 삶을 사느라 사람을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었지만, 실비아에게 있어선 그저 싸가지 없는 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자기가 사관학교도 안 나온 평범한 민간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싶어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그저 숫기가 없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카일의 상관이 없는 지금, 이 순간에 잡담은커녕 단 한마디 없는 것도 그렇고, 

군인이라 하기엔 다소 껄렁해 보이는 제이크 대령에게도 가차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 태생이 꽉 막힌 인간상인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에휴, 꽉 막힌 새끼.”

“그렇게 불만이시면 당장 민간 고문직을 그만두고 돌아가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실비아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행정업무를 위해 배치된 책상에 앉아 서류 파일을 정리하던 카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상관이 자리를 비운 공간. 단둘만 있어서 할 수 있는 날 선 말투들이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친다.




“됐어! 마리아 아줌마 얼굴 봐서라도 내가 참는 거니까, 착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

“쯧⋯.”



몇번이나 지적했는데 도저히 고칠 생각이 없는 건가⋯


아무리 고문직이라지만, 군대는 군대. 최소한의 예의나 원리원칙은 개나 줘버린 태도에 카일은 짜증이 나는 듯 혀를 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비아가 무조건 적으로 싫은 건 아니었다. 

비즈니스. 이건 비즈니스 관계니까 군인이라는 직종에서 고운 정, 미운 정 따위 잴 필요도 없고, 주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저 흘러가듯 이야기하고, 지적하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꽉 막힌 새끼라고 욕을 먹었는데, 이 정도면 정중한 반응 아닌가?


마지막 서류를 서류철에 꽂을 때쯤, 실비아가 경쾌하게 엔터 버튼을 툭 하고 누르며 기지개를 켰다.




“아으⋯. 너는 말이야. 인간미라던가 감수성도 너무 없어.”

“군인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소양은 아닙니다.”

“예, 예. 그러시겠죠~ 근데 찾아보니까, 너 생각보다 카운터 된 지는 얼마 안 됐더라? 2년 좀 넘었나? 대체 그런 성격으로 학교는 어떻게 다닌 거야?”




카일의 손동작이 멈춘다.

분명 따로 자기 얘길 흘리고 다닌 적은 없었다. 존경하는 사령관이 그런 개인적인 일까지 무심코 이야기했을 리는 없을 테고, 분명 멋대로 합중국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해 뒤져본 것이 분명했다.


불쾌한 듯, 시선을 책상 위가 아닌 실비아의 자리로 돌렸다.

카일이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실비아는 손에든 전자기기를 만지작거리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뭐, 그 성격이면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랑 놀던 낭만 같은 것도 없을 것 같긴 하네. 그래도 이렇게 까칠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그냥 서로 좋게 좋게 대하⋯”

“⋯⋯.”




말로 후드려 맞는다는 게 이런 건가.

왠지 모르게 몸이 쿡쿡 쑤시면서 아픈 느낌에, 카일은 괜히 어깨를 매만지며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카일과 눈이 마주치자 실비아는 당황스러운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냥 별생각 없이 이랬을 것 같다며 늘어놓은 것뿐인데⋯ 저렇게까지 매섭게 노려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 알았어. 그렇게 째려보지 마. 내 말은 좋든 싫든 같이 일하는데 좋게 좋게 가자는 거지. 매일 매일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다른 대원들에게도 벽치고 까칠하게 굴면 마리아 아줌⋯ 대장님도 네 걱정하지 않겠어?”




이럴 땐 또 따박따박 말 잘한다.


⋯⋯.


하긴, 쓸데없이 내부에 적을 만들 필욘 없겠지.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카일은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정리하던 파일을 마저 가지런히 정돈하며 실비아의 주장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니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래?”




생각보다 온순한 반응에 실비아가 머쓱하게 손에 있는 전자기기를 만지작거렸다.


카일의 손에서 정돈된 마지막 서류가 파일 더미 위에 올려지고, 제대로 다 되었는지 검토를 하던 중 불현듯 생각에 잠겼다.


델타세븐 내부의 분위기도 그렇고, 존경하는 사령관님의 부대 방침을 생각해보면⋯

훈련생 시절과는 다르게 위계질서가 아주 엄격하게 굴러가는 곳은 아니었다.

당장 카일의 맞선임인 제이크 대령은 정석적인 군인이랑은 꽤 거리가 먼 인간상이며, 사령관과 부사령관도 그의 태도에 대해 진지하게 지적한 적은 없었다.

물론 지적받지 않는다는 건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선은 반드시 지키는 선에서 행동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다르게 말하면 기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임무만 잘 수행하면 상관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기조를 가진 델타세븐임에도, 카일은 유달리 경직되어있는 모습이었다.

몹시 나쁘게 말한다면 부대 분위기와 맞지 않는 대원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야, 내가 좀 읽을 책이라도 추천해줄까?”

“하⋯?”




뜬금없는 제안에 카일이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실비아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실비아가 스스로 이유를 주절거렸다.




“넌 문학 소설 같은 거 좀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감수성 좀 높이는 게 어때? 몇 개 읽을 만한 거 추천해줄까?”

“방구석에 박혀서 마우스나 깨작거리는 사람도 종이책에 줄줄이 늘어진 활자를 읽는다는 사실은 꽤 신선하군요.”

“그냥 욕을 해라 욕을⋯. 그리고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전자책으로 다 읽을 수 있는 시대라고!”




그랬나?

방구석 너드가 추천하는 책이라⋯ 


생각해보면, 군사학교에 들어온 이후 따로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럴 여유도 없었고.

군사학 관련 책이 아닌 다른 책을 읽을 바엔, 그 시간에 사격 연습이나 더 하는 것이 더 나았다.

지금 와서도 굳이 읽어야 하나 싶긴 하지만.


어깨를 으쓱이곤, 검토를 마친 자료를 옮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보안 메신저로 몇 권 추천해줬으니까 나중에 열어봐.”

“보안 채널을 사적인 용도로 쓰지 마시죠. 그러라고 채널 사용자로 입력해 드린 것이 아닙니다.”

“뭐가 사적이야? 끽해야 책 제목 몇줄 알려준 거 가지고, 넌 좀 이런 거 읽어야 해. 세상 모든 게 FM대로 굴러가진 않는다고. 융통성 좀 기르기엔 이게 딱 맞아~”




대충 적당히 받아주고 말지 뭐― 라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읽어보면 후기나 짧게 말해보라며 유유히 자리를 뜨는 실비아의 뒷모습을 흘겨보다가, 별로면 합중국 정신교육이나 듣게 해야겠다며 서류검토를 재촉했다.














***











학생회장을 구하러 뛰어들었더니 그게 리세마라의 시작이었습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내가 태양을 떨구게 되었습니다.




온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최고 마왕의 목적은 연애였다. ~얼어붙은 시간~

.

.

.








“쯧⋯”




다 영양가 없는 거잖아.


관사 책상에 앉아서 통신채널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문학 소설이 아닌 라노벨에 가까운 제목들이었다. 어지러운 장문의 제목들을 보며 카일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전술 태블릿 화면을 검지손가락으로 살살 내려가며 나쁘지 않은 거라도 있나 제목들을 훝었다.






“음⋯”





한참을 내려가니 그제야 문학 소설다운 제목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마터면 방구석 너드놈들은 이런 거만 읽냐며 편협한 시선에 갇힐뻔했다며 어이없다는 듯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화면을 쓸어올리는 검지의 속도가 느려진다.






금지된 지식의 추종자들




마음의 증명




부서지지 않는 꽃




홀로 남겨진 것




잿더미가 된 꿈




변하지 않는 첫사랑의 법칙







“⋯⋯.”




검지손가락이 멈춘다.


워치의 바늘이 돌아가는 소리인지, 혹은⋯ 관사 책상에 올려둔 탁상시계의 바늘이 돌아가는 소리인지.

째깍거리는 소리가 크레셴도로, 아주 선명하고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하⋯”




뜨거운 한숨이 무의식적으로 깊게 흘러나오는데. 왜 기분이 나쁜지 알 수 없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웹소설, 도서 추천목록인데⋯.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인지 짚어보려고 해도, 몸속 깊은 곳에서 목구멍으로 끓어올라 올 것 같은 불쾌함이 가로막는다.





⋯⋯.



생각해보니, 일반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를 지우려 했던 건데.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서 왼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더니, 눈을 가리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그런 대화를 너무 오랫동안 안 해서, 시간이 오래 지나서, 둔해졌던 모양이지?


필요한 만큼의 감정교류만 하면 되고, 원리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명령에 따른 최선의 결과가 중요하지, 한명의 인간으로서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불필요한 것⋯⋯.


훈련생 시절에 배운 것들과 느낀 것을 다시 곱씹으니,

역시 괜히 받아줬다며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전술 태블릿을 책상 위로 내던져놓으려는 찰나⋯




“아! 아, 씨⋯”




그저 책상에 내려놓으려 했을 뿐인데, 손에서 떨어져 쾅!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나뒹구는 태블릿.

오만상을 쓰며 뒷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거지 같다.





“씨, 깨졌네⋯ 아⋯”




엎어진 태블릿을 들어 올리니, 꽤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태블릿 액정에 꽤 크게 금이 가 있었다.

화면 꼬락서니를 보자, 이유 없이 치밀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더 진정되질 않아서 자기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전술 태블릿이야 제이크 대령도 카운터 능력 때문에 군 보급품을 망가뜨리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이 정도로 카일의 평가에 치명타가 되진 않겠지만⋯


냉철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감정 컨트롤에 실패해 군 보급품을 망가뜨리다니, 이건 군인으로서 실격이나 다름없다며 자신을 자책했다.

지금 합중국 군 정신교육을 들어야 하는 건 실비아뿐만이 아닌 것 같다며 자기 머리를 두어번 손바닥으로 때린다.




“하아⋯”




진한 한숨과 함께 들어 올리는 고개.

여러 갈래로 금이 간 액정화면에는 카일의 얼굴도 깨진 것처럼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서 성인이 된 나이.

분명 마음을 독하게 먹고 변화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액정화면 속의 얼굴은 고등학교 시절의 앳된 모습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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