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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사령관의 일상 (17)

 

 

 

 

 

저희 대장님과 사령관은 닮은 점이 꽤 많습니다.

 

예를 들면……겉과 속이 다른 부분 같은 것 말이죠.

 

T-8W 발키리

 

 

 

 

 

 

52.

 

나는 눈보라 속에 갇혀있었다.

 

그들은, 우리는 거기 있었고 갈 곳을 잃은 채 무작정 떠돌았다.

 

언제였지? 너무 오래된 일이다. 이미 잊어버려야 했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다.

 

하나, 둘씩 쓰러졌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나 혼자였다. 

 

네가 건네준 그 초코바의 맛을 아직도 기억해.

 

그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한 거야.

 

누가 했던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내 기준이 되었다.

 

기준, 신념. 뭐가 됐든 그것은 진리였다. 절대 변하지 않는 진실.

 

얻고자 한다면. 승리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다.

 

그게 설령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것이라도.

 

“……그래, 난 틀리지 않았어. 다만 어쩔 수 없는 것뿐이야.”


알람 소리와 함께 눈을 뜬다. 오전 6시, 회의에 나가기 전 할 일이 많다.

 

나는 란제리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일을 보고, 세수하면서 눈썹과 잔털 정리를 한다. 화장품은 언제나

 

바르는 걸로. 옷은 늘 입는 것이지만 새 옷을 입는 것처럼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품위란 이런 디테일한 부분에서 나타나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본다. 

 

“……오늘도 완벽하네. 후훗.”


준비를 마치고 나오면 오전 7시 30분 즈음이 된다.

 

문을 열고 나오면 언제나 그렇듯 발키리가 차렷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장님.”


“좋은 아침. 어젯밤에 별 일 없었지?”


“없었습니다. 늘 그렇듯 평온하죠.”


회의실로 가는 길에 오늘 회의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해둔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주제로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대체로 회의에서 이야기하는

 

주제란 보급품의 분배나 시설 증축, 전진 기지의 위치를 어디로 할까 같은 것이다.

 

따분하고 지루한 주제들이지만- 그 모두가 승리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어.”


“철혈의 레오나. 반갑습니다.”


회의실로 가던 도중, 사령관과 마주쳤다.

 

말끔히 제복을 입고 있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해 보이고,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이다. 못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특출 나게 잘 생기지도 않고

 

군인보단 학자 같은 느낌이다. 둥근 안경을 끼면 참 어울릴 텐데.

 

“좋은 아침. 회의실 가는 길이지? 같이 가자.”


“알겠습니다.”


우리는 회의실로 함께 걸어갔다. 하지만 가는 길에 딱히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사령관은 과묵하다. 흥미가 생긴 주제가 아니면 대체로 네, 아니오로 대답하고

 

그 이상의 말은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굳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철혈의 레오나, 질문이 있습니다만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사령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듣고 있어.”

 

“취미 생활에 대해 고민하는 중입니다. 어떤 취미를 가져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취미? 설마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다니. 드문 일이다.

 

“마음에 가는 일을 하면 돼. 책 읽는 거 좋아하지?”


“콘스탄챠 S2가 금지했습니다. 공부로 취급되는 일은 모두 금지라면서.”


“사령관은 또 그걸 군말 없이 받아들였고?”


“네.”


하여간……이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어디 써먹으려나.

 

사령관이면 사령관답게 건방지다고 한 마디 하면 될 일을, 그걸 일일이 받아주다니. 

 

성격 좋은 것도 이 정도면 그냥 호구다.

 

“그러면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어때? 뭘 만들거나……아니면 운동이나

 

격투기를 배워보는 것도 좋아. 군인이니까 그 정돈 해야지.”

 

“좋은 조언인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철혈의 레오나.”


“뭐가 됐든 더 멋진 남자가 되어보라고. 지금의 사령관은 너무 밋밋하잖아.”

 

“……멋진 남자……입니까.”


사령관은 거기까지 말한 뒤,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리리스한테는 본심을 이야기했다고 했던가. 

 

왜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안 하는 걸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53.

 

일과 시간이 끝나고, 나는 체력 단련실을 청소할 준비를 했다.

 

사실 일이라고 해봤자 백병전 훈련을 받으려고 온 애들을 상대해주는 정도지만

 

어쨌든 일은 일이다. 자! 팍팍 해치우고 얼른 PX나 가볼까!

 

그 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체단실은 오늘 종료야! 내일 다시 오도록!”
 
“그렇습니까.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티에치엔.”


엥? 주인이잖아? 주인이 어쩐 일로 체단실에 온 거지……?

 

아, 설마 저번에 체단실에 더 투자해달라고 한 걸 혼내려고 왔나……!?

 

“미, 미안! 주인, 하지만 체단실을 증축해야-”


“그 문제로 온 게 아닙니다. 저는 멋진 남자가 되기 위해 왔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멋진 남자? 주인이 원래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었나?

 

“멋진 남자가 되라는 조언을 듣고 생각해봤습니다. 통념상 운동 능력이 뛰어난

 

남성은 고대부터 이상적이란 인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체를 개조 받아

 

신체 능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그 외의 운동 능력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자기개발을 겸해 무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어어……뭐, 못 도와줄 거야 없지만……뭔가 이유가 좀 이상한데.”


뭐, 상관없나. 주인이 무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거기에 응해야겠지!


“자, 와바랏! 쿠이쿠이!”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결국 무술이란 무엇입니까?”


“응? 무술은……무술이지. 그 외에 뭐가 더 있나?”


“본질적으로 무술의 근본이 무엇이냐는 뜻입니다. 무술, 즉 무도의 기술이란

 

단순히 몸을 움직여 적을 파괴하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통상적으로 병기를

 

사용하는 게 효율적입니다. 어째서 무술을 배워야 하는지 납득이 잘 안 됩니다.”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봐도……주인이 배우고 싶다고 왔잖아?”


“단지 의문이 생긴 것뿐입니다. 저는 궁금한 게 생기면 성질이 안 풀리는 터라.”


아- 그렇게 어려운 문제 나는 몰라! 생각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문제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덤벼,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봐줄게.”


“네.”


그렇게 말한 뒤, 사령관이 내게 달려들었다.

 

“하아앗!”


“아.”


그리고 한 방에 다운. 팔을 붙잡고 업어 치니 주인은 일어나질 못했다.

 

“어……괜찮아? 너무 세게 했나?”
 
“끄……끄덕……도……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얼굴이 사색이 됐는데.

 

아니, 이건 너무 약하잖아. 갓 만들어진 브라우니가 한 손으로 싸워도 이길 정도다.

 

“이제 좀 멋져졌습니까?”


“업어치기 당한 것만으로 멋져지면 세상에 고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애초에 인간은 절 제외하고 남지 않았다고 추측됩니다만.”


“그 뜻이 아니잖아……에이, 얼른 일어나! 다시 해보자!”

 

그리고 다시 또 다시. 결국 사령관은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한 대도 때리질 못했다.

 

일부러 봐주는데도 너무 약해서 맞아주는 것조차 힘들다.

 

“헉……헉……이, 이제 좀……멋있습니까?”


“음! 주인, 여러 사람을 가르쳐온 교육자로서 말할게. 주인에겐 무술의 재능이

 

정말 아예 없어! 차라리 LRL을 가르치는 게 나을 정도야!”

 

“그 정도입니까, 저는.”


너무 심하게 말했나?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차라리 현실을 빨리 깨닫게 해주는 게 자비로운 처사다. 

 

“그……주인의 문제점은 말이지. 투쟁심이 없다는 거야. 뭔가 파밧! 하고

 

불타오르는 게 있어야 하는데 주인에겐 그게 아예 없어. 뭔지 알겠어?”

 

“모르겠습니다.”


“결론은! 주인은 무술을 배우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거야. 너무 약해서

 

도저히 단련시킬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아. 분명 카피바라가 사령관보다 강할 거야.”

 

어쩌면 동네 도둑고양이가 더 강할지도……사령관이라면 고양이한테 질지도 모르겠다.

 

“그렇군요. 아무튼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이해했습니다.”


사령관이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음, 주인?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어. 누구나 잘 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으니까!

 

주인은 주인이 잘하는 일을 하면 돼. 굳이 못하는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으니까.”

 

“전 멋진 남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비효율적이라면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겠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티에치엔.”

 

“그래도 운동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찾아와! 무술은 안 되더라도 운동은

 

할 수 있을 테니까.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좋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그리고 주인은 가버렸다. 대체 여긴 왜 왔던 걸까,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음! 역시 모르는 걸 생각해봤자 무의미하지! 청소나 하자!”

 

어쨌거나 주인이 멋져지면 좋겠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청소기를 들었다.

 

 

 

 

 

 

 

54.

 

“……그래서 절 찾아오셨나요?”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멋진 남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드리 드림위버.”


오……설마 이런 날이 오다니. 맨날 웬 이상한 인민복이나 만들라고 시키더니

 

이젠 빼숀에 대해 배우기 위해 찾아왔군요. 이 얼마나 그레-윗한 발전인지!

 

“흠, 제 의상실엔 남자용 의상도 있죠……한 번도 쓰인 적은 없지만요.”


“어째서입니까?”
 
“그거야 사령관이 ‘저는 제복과 잠옷을 제외한 옷이 필요치 않습니다.’라고 말해서

 

기껏 열심히 만든 게 모두 쓸모없어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돈-워리. 사령관을 위해

 

구상한 아이템들은 여전히 남아있답니다. 자, 뭐부터 입혀볼까요?”

 

흠……사령관은 딱히 모난데 없이 무난해서 뭘 입혀도 잘 어울릴 것 같군요.

 

맨날 제복만 입고 다니니 이미지가 너무 딱딱해서 다른 아이들도 사령관을

 

어려워하고……모처럼의 기회이니 과감하게 챌린지하는 것도 좋겠죠.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어요. 왜 갑자기 빼숀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서적을 찾아보니 유행에 맞는 의상을 입는 남자는 이성에게 호감을 쉽게

 

산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멋진 남자란 즉 이성적으로 호감이 가는 남자, 다시

 

말해 적절한 의상을 입은 남자라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옷이야

 

몸을 가릴 수 있고 제 기능만 다 하면 문제없다고 봅니다만, 멋진 남자가

 

되기 위해선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결론은 옷을 멋지게 입으면 멋진 남자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 거죠?”


“네.”


뭐……틀린 생각은 아니죠. 근데 옷은 몸만 가리면 그만이라니, 저라서 참았지

 

다른 디자이너들이 들었으면 눈알을 뒤집고 물어뜯어버렸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면……기회가 왔으니 이것저것 해보죠! 자, 전부 벗으세요.”


“겉옷만 벗으면…….”


“무슨 소리를! 빼숀은 보이지 않는 곳도 완벽해야 한답니다. 말하자면

 

속옷까지 완벽하게 콘셉트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죠. 자, 얼른!”

 

“으, 으어어…….”

 

우리 아기 고추 좀 볼……흠흠, 그냥 농담이에요.

 

저는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옷들을 모조리 꺼내 하나씩 입혀보았습니다.

 

“흠, 이건 너무 튀고. 이건 너무 커, 이건……흠, 나쁘진 않지만 뭔가 그

 

섹시함이 부족하군요. 오, 이건 어떨까요? 아니면 이건? 모던한 이미지보단

 

조금 더 신시대적인 콘셉트로 갈까요? 사령관, 어떻게 생각해요?”

 

“그……제 속옷이나 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안 돼요. 그런 뷰-티풀하지 못한 속옷 따윌 입으니 일이 잘 안 풀리는 거예요.

 

그렇지, 호피로 된 건 어떤가요? 와일드하고 스트롱한 이미지도 좋을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랍니다.”


앗, 도망친다! 저는 얼른 사령관의 팬티 뒷부분을 잡아당겼습니다.

 

“으, 으아아아……왜 잡으시는 겁니까?”


“어머, 귀여운 엉덩이네요. 그게 아니라……순순히 데스티니를 받아들이세요!”


도망치려고 하는 사령관과 그걸 붙잡는 저, 순식간에 의상실이 엉망이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 놓치면 영영 사령관한테 옷을 입힐 기회가 사라지고 맙니다.

 

“뭐, 뭔가 잘못됐습니다. 저는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어……왜 문이 안 열립니까? 문이 잠겼습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잠갔어요. 자, 이번엔 수영복 콘셉트로…….”


쨍그랑! 사령관이 창문을 깨고 거기로 나갔습니다.

 

“창문은 나중에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탈출하겠습니다.”

 

“앗! 사, 사령관! 그 꼴로 어딜 런하는 거예요!?”


도망쳤다……! 크윽,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아깝게 됐군요.

 

“……그나저나 진짜 그 꼴로 돌아다니면 변태로 오인 받을 텐데요.”


으음……도망친 건 제 잘못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아무튼 다음에 붙잡으면 팔다리를 묶어야겠네요. 우후후…….

 

 

 


 

 

 

55.

 

똑똑.

 

한참 홍차를 마시면서 쉬려던 찰나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발키리인가……? 내가 분명 일과 끝나면 쉬라고 했을 텐데.”


애초에 이 시간에 올 리도 없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좋은 저녁입니다.”
 
“푸웁!! 콜록, 콜록! 사……사령관!? 그게 대체 무슨 꼴이야!?”


“사정이 있습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대체 무슨 사정이기에 반라로 찾아온 거야……? 강도라도 당했나?

 

“일단 들어와. 나 원, 모처럼 마신 홍차를 뿜어버렸잖아.”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적응 안 되네. 뭐 저리 탐스러운 엉덩이…….

 

아니, 보지 말자. 눈 돌려 레오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나는 사령관의 몸을 가릴만한 옷을 꺼내 던져줬다.

 

“사이즈는 안 맞겠지만 일단 걸치고 있어. 보기 흉하니까.”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좋은 향이군요, 홍차입니까?”


“마실래?”


“마침 몸이 차가워진 참입니다.”


못 줄 거야 없지. 나는 홍차를 따라 사령관에게 건네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꼴로 날 찾아온 거야?”


“저는 사과드리려고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철혈의 레오나. 전 실패했습니다.”


그 사령관이 실패를 인정하다니. 드문 일이네.

 

“아침에 해주신 조언대로 멋진 남자가 되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저는 옷을 빼앗기고 엉망진창이 됐습니다.”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어휴, 됐어. 말해서 뭐해.”


그냥 지나가듯 한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들은 거야? 참 사령관답네.

 

“무술을 배우려고 했지만 잘 안 됐습니다. 오드리 드림위버에게 옷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한 결과 이런 꼴이 됐습니다. 제 계획의 어디가 잘못된 걸까요.”

 

“나한테 물어봤자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어. 아무튼 누가 보기 전에

 

그거 마시고 돌아가. 사령관으로서 품위를 지켜야하는 거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지금의 전 품위가 없겠군요.”


사령관이 조신한 자세로 홍차를 홀짝, 홀짝 마시며 말했다.

 

……가끔은 이런 사람이 내 상관이고, 나랑 비교도 못하게 유능하다는 걸

 

자각할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세상일이란 참 이해하지 못할 일투성이다.

 

“철혈의 레오나, 멋진 남자란 대체 무엇입니까?”


사령관이 홍차를 마시다 말고 말했다.

 

“내 기준에서 말해줘?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하고

 

언제나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내 기준으론, 사령관은 꽤 멋진 편이야.”

 

“과찬입니다. 저는 늘……이렇게 엉망진창이잖습니까.”


“뭐 그렇지.”


어떨 때는 소름 돋을 정도로 유능하면서, 평소엔 덜 떨어진 백치 같다.

 

모순적인 남자. 하긴 존재 자체가 모순 그 자체다. 그야말로 모순이 사람의

 

모습을 취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모순 덩어리다.

 

……그런 점도 나름 매력적이지만.

 

“저는 일 이외엔 잘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이 어떤지, 제가 뭘 좋아하는지도 이젠

 

잘 모르게 됐습니다. 어째서 당신처럼 뭐든 유능하게 할 수 없는 걸까요.”

 

“어머, 나라고 뭐든 유능한 거 아냐. 단지 요령이 좋은 것뿐이지.”

 

“모두 저보다 뛰어난 것 같습니다. 불굴의 마리는 저보다 강한 정신을 지녔습니다.

 

무적의 용은 항상 올곧고, 멸망의 메이는 저처럼 망설이는 법이 없습니다.

 

신속의 칸은 부하들에게 존경받고, 뭐든 잘 해냅니다. 로열 아스널은 당당하고

 

언제나 굳셉니다. 그런데 저는, 전 언제나 이 모양이군요.”


“약한 소리하지 마. 당신은 사령관이야, 부하 앞에서 약한 소리 하는 건 용서 못해.”


“죄송합니다…….”


……딱하긴. 결국 인간에 불과한데, 그렇게 많은 책임을 짊어지며 살아가야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당신도. 우린 전부 어쩔 수 없을 뿐이니까.

 

“내가 회의에서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


“들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할 말은? 불쾌해? 아니면 분노를 느껴? 건방지다고 생각해?

 

상관없어. 나는 부하로서 진언을 할 뿐이야. 얼음 마녀든 싸가지 없는 개년이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뭐가 됐든 나는 내 의지를 관철할 뿐이니까.”

 

그래,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어찌 생각하든 아무 문제없어.

 

자, 사령관. 화를 내봐. 내게 감정을 보여줘, 뭐가 됐든 진심을 보여줘.

 

……그 여자한테만 보여주지 말고. 내게도 보여 달라고.

 

“당신이 옳습니다, 철혈의 레오나.”


“…….”


그리고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절 희생해서 승리할 수 있다면 그리 해야 마땅합니다. 저는 오르카라는 조직의

 

일부이며, 조직을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권한을 지닌 자는 반대로 말해

 

모든 책임을 지녔다는 겁니다. 저는 책임져야 합니다. 그게 옳습니다.”

 

“화내도 돼. 바이오로이드 주제에 건방진 소리를 했잖아? 고귀한 인간님을

 

희생시키느니 어쩌니 말이야. 때려봐, 고함을 질러도 좋아. 뭐든 해봐.”

 

“어떻게 제가 당신을 때리겠습니까. 저는 당신에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강합니다. 냉정하게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휘관들께 감사하고 있지만, 저는 특히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제 마음이

 

약해질 때 당신은 다그쳐줍니다. 그걸로 저는 제 역할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령관입니다. 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마땅합니다.”

 

이 얼마나 착해빠진 순둥이란 말인가.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화를 안 내? 아니, 오히려 고맙다고 말한다고?

 

이해가 안 된다. 우린 고작 바이오로이드에 불과한데, 인간인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항상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 위화감이 지금 극에 달했다.

 

“철혈의 레오나, 당신이 그런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뭐?”


“당신은 상냥합니다. 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상냥함에 감사합니다.

 

절 냉정하게 대하는 것도 상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역할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걸, 저는 압니다. 기회가 왔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할 말이 없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해 둔 모든 게 새하얗게 지워진 기분이었다.

 

사람의 마음 따윈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라고 생각했는데.

 

“……희생시킬 수 있어. 나는 당신도, 나도, 우리 애들도. 승리하기 위해선

 

뭐든 희생시킬 수 있고 어떻게든 나아갈 거야. 그 생각만은 절대 변하지 않아.”

 

“만약 때가 되면, 부디 절 희생시켜주십시오. 망설이지 말고 저를 사용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께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인간이잖아. 사령관, 인간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아. 할 필요조차 없어.”

 

그래, 모순이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도구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남자는 내게 머리를 숙이며 자기 목숨을 써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제 진심입니다. 저는, 저라는 인간은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입니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저는 진작 죽었을 겁니다.

 

저 같은 인간을 주인이라고, 사령관이라고 불러줘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목숨을 빚졌습니다. 그러니 제 목숨은 여러분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


하인을, 아니 도구를 섬기는 주인이라. 

 

만약 너희들에게 이런 주인이 있었다면, 거기서 살아나올 수 있었을까.

 

이미 끝난 일이다. 그러니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죽어버린 너희를.

 

“있지, 사령관. 그거 무겁지 않아?”


“네?”

 

나는 사령관이 쓰고 있던 모자를 빼앗아 침대로 휙 던졌다.

 

“나는 지휘관이야. 그러니 부하들 앞에선 언제나 품위를 지켜야 돼.

 

하지만 의외로 말이지……‘나’라는 여자는 별 볼 일없어. 휴일엔 침대에 누워

 

멸망 전에 하던 드라마를 보거나, 하루 종일 잠을 자. 아니면 맛있는 요리를

 

애들과 함께 먹거나……그런 걸 좋아해. 언제나 ‘사령관’일 필요는 없어.

 

혼자일 때는 ‘나’로 있어도 돼. 그리고 나랑 같이 있을 때에도. 나는 당신이

 

한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응석 정돈 받아줄게.”

 

“하지만 그래선-”


“이 내가 하는 말에 무슨 반박이라고 하시려고?”

 

사령관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런 면모도 있었구나, 흠.

 

“잠깐 이리와.”


나는 사령관을 침대로 데려가, 무릎베개를 해줬다.

 

안드바리가 이걸 참 좋아했다. 그 아이는 늘 내 무릎에서 자고 싶어 했다.

 

……너무 성실한 아이라 말은 못 했지만 알 수 있었다.

 

“저기, 이건……?”


“그냥 가만히 있어.”

 

그리고 나는 사령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홍차 향기가 그윽하게 퍼진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열심히 하는 거 나도 잘 알아. 싫은 소리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해.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가.

 

그래도 힘들 때는 가끔 찾아와도 돼. 그리고 홍차나 마시면서 수다를 떠는 거야.”


“민폐를 끼칠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 그 정도 응석도 못 받아줄 정도로 이 레오나의 배포가 작다고 생각해?”

 

“죄송합니다.”
 
“이제 사과하지 마. 사령관은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사령관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귀가 빨개지는 걸 나는 보았다.

 

진심이란 언제나 말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어머, 귀가 익었는데. 방이 좀 더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어수룩한 남자. 멋진 남자가 되려면 아직 한참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끼리 있을 땐 상관없겠지.

 

나는 그가 잠들 때까지 줄곧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여기 레오나는 멸망 전 생존 개체란 설정. 옛날 부하들은 다 죽고 혼자 살아남았다.

그리고 의외지만 사령관에 대한 호감도가 제일 높은 사람들 중 한 명임

회의 중이나 여기서 화낸 것도 ‘리리스한텐 진심을 보여주면서 감히 나한텐 숨겨?’

라는 자기도 모르는 불만 때문인 것도 있음. 물론 원래 성격이 그런 것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