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리리리~♪ 삐리리리~♪


우움····.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리~♪ 삐리리···· 찰칵.


 저 멀리서 제멋대로 지저귀던 시골의 새들은 도시로 이주하면서, 더는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고도 평평해진 몸매로 잘 조율된 노래곡조를 머리밭 가까이서 하염없이 울어댔고, 열린 창 안으로 가득 고취시키던 구수한 은행나무 열매의 달갑지 않던 향취는, 닫혀진 창문과 커튼으로 이중으로 쳐진 컴컴한 도시인의 방 안으로 풍겨대는 씁쓸한 라벤더 향의 방향제 만이 옷깃에 스며들 뿐이었다.

 우물쭈물. 해도 빠릿하게 뜨지 않은 이른 시간대에 자랄대로 자라나버린 흔히 볼 법한 잡 식물은 오늘도 새싹일 적 버릇을 아직까지 못 벗어나고, 부스스, 자는 새 하나 더 늘어났을 흰 잡풀대기를 벅벅 긁고서 푹신한 침대 결에 신음 소리를 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켜 본다.


띠잉!


치키치카치카.


「다음 아침 속보를 보내드리겠....」


 조명의 눈부신 빛을 한껏 머리카락에 감아적시며 굼뜬 몸을 곧세워 오늘도 움직여본다. 입에는 칫솔을 꽂고, 한 귀로 TV 잡음을 흘려들으며, 손으로는 갓 구운 식빵을 능숙하게 집어들며 접시에 놓는, 그럭저럭 3중 플레이를 동시에 행하면서 이른 아침의 시작을 알린다. 굳은 목을 옆으로 힘차게 꺾어본다. 뿌걱. 어이구야, 살아있구나.

 습관은 습관대로, 물고있던 칫솔을 빼고 컵에 물을 담아 싱크대에 놓는다. 동시에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주스를 머그컵에 따라, 싱크대에 멀리 떨어진 부엌 탁자 위에다 식빵과 함께 가지런히 올려 놓는다. 사실, 일부러 부엌에 멀리 떨어져 놓는 이유가 조금 황당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칫솔질을 하던 도중, 행굴 물과 음료를 따라놓은 컵을 동시에 싱크대 위에 올려놓다가, 그만 착각해서 행굴 물 대신 주스로 입을 헹궈 버린 웃지못할 경우가 딱 한번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세면대에서 이를 닦겠지만, 세월이 흘러 습관이 일상이 되면서부터 싱크대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순차가 돼버렸고, 아내가 보면 큰 야단을 치겠지만 혼자인 지금, 그냥 머그컵을 따로 놓아두는 것으로 나 자신과 합의 봤다. 집사람이 알면 엄청 혼나겠지. 만날 때만큼은 습관을 조금씩 고쳐나가야 겠다. 하며 무사히 머금은 물을 배수구 안으로 뱉어낸다.


달그락


 찾았다. 시린 이빨을 다 닦고 칫솔 용품을 싱크대 한 곳에다 치워둔 후, 살짝 까치발을 들어 부엌 찻잔을 뒤져 간신히 통 한 개를 꺼낼 수 있었다. 흠, 또 이건가.

 그렇게 깊숙한 찻잔 구석에 아무거나 꺼내들은 통의 정체는 다름아닌 꿀. 미리 차린 숟가락 하나를 들어 식빵에다 발라놓고는 어제 문 앞에서 뜯은 전단지를 잠시 흝어보다가 탁자 위에 폼 안 나게 깔아놓고는, 막간의 아침 식사를 즐겨보도록 한다. 맨날 먹어대서 그런가, 입 안에 착착 감돈다. 주스로 꿀꺽꿀꺽 흘려보내니 꿀 맛. 말그대로 꿀 맛.

 이렇게 꿀을 발라놓고 먹는 식빵의 한 입은 처음엔 생소하게 느껴졌었다. 솔직히 꿀을 바르기 전까진 즉석 구입한 베지마이트나, 피넛츠 버터로 버티기 일수였으나 막상 긁을게 없을 정도로 텅텅 빈 잼 통이 하필 잠 들 시간대에 알아챈 난 한밤중, 대체할 만한 잼을 이리저리 뒤지다 발견한 게 이 허니 잼. 그냥 꿀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아카시아 꿀을 사놓은 걸로 기억하지만, 생각해보니 요리한답시고 볶음밥에다 꿀을 왕창 부은 바람에 생애 첫 달아빠진 볶음밥을 시식한 걸 가까스로 기억해냈고

 그리하여 마주한 것이 요 ‘잡화’ 꿀. 하지만 기억해두자. 꿀을 발라놓은 식빵보단 그냥 잼을 발라먹는 것이 낫다는 걸. 꿀차라면 모를까. 매주 이런 기억법으로 저장해놓으려 하지만, 집에 나설 때마다 매번 잊어버리는 이 늙은 두뇌를 두고 누굴 탓할까. 이번만큼은 꼭! 하면서도 이번엔 가죽 지갑에다 작은 메모지를 쑤셔놓는다. 자신이 없으면 일찌감치 포기하자. 그보다 누구한테 말하는 거니, 나.



•••



끼이이익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출근 시간 1시간을 남겨둔 채 모든 채비를 끝마친 후, 그런 낯부끄러운 말 한마디를 속으로 되뇌이며 실상은 오래된 건지, 아님 원래 이런 건지 기이한 소리를 내는 문짝을 열어젖히고 나와, 공포 영화 효과음을 연상케하는 제 문을 다시 닫고나서야 문을 걸어 잠글 열쇠를 꺼내든다. 그러다 잠시, 문고리에 살짝 녹슨 은색 열쇠를 꽂고 돌리려던 순간, 나도 모르게 순간 정지하고 문 앞을 바라봤다. 호오, 처음보는 건데.

 슈퍼 전단지. 배달음식 전단지. 기타등등. 이 근처 가깝진 않지만 조금 멀리있는 내가 이 동네로 오면서 자주 들리는 슈퍼에 전단지가 오늘도 딱 맞춰서 붙여져 있었다. 오늘도 소리소문없이 오셨구나. 한번도 직접 만나뵌 적은 없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열일하시는 분들께 괜스레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일찍 일어나는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열일 하시는 분들께, 속으로라도 합장하며 그에 부응하고자 새로운 세일 상품을 눈으로 감상해본다. 오늘도 식빵은 세일 안 하나. 아까 난생 처음보는 그 상품은 뭘까, 직수입해 온 건가. 비싼가? 비싸네. 등등. 

 잠시동안 감평한 전단지에 만족을 표하는 의미로 손으로 탁탁치며, 마저 열쇠로 문을 잠그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제아무리 나홀로 생활에 익숙해져 생전 안 보던 전단지를 보며 가정주부를 흉내내도 본분을 잊을 순 없다. 그렇기에 오늘도 빠르게 나서본다. 그렇게는 말해도 본성을 숨길수 없었나 보다. 무의식적으로 피식, 나는 이런 말을 흘러보냈다.


아줌마가 다 됐네.



•••



덜컹덜컹


 익숙해지는가 싶더니 또 시작인가, 웁.

 오늘도 평소대로, 적당히 목에 맨 넥타이에 오래된 정장과 반대로 닳지않은 새 구두, 그리고 노트북과 서류가 가득 든 서류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올라타, 햇빛이 잘 드는 좌석에 앉아 흔들거리는 버스 손잡이를 바라보며 회사로 향해간다. 예전에는 전철을 타고 이동했는데, 이렇게 버스를 타고 이동하니······ 울렁거린다. 분명 입사한 새 기업에 오래 다니면서 자연스레 사라질 줄 알았건만 아니다 다를까, 멀미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선로 위 지하철은 참을만 했건만, 비포장도로 위 버스는 도저히 안되는 것인가. 아무튼 예정대로 짜먹는 쓴 멀미약을 쭉 들이킨다. 효력은 별로인 것 같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아마?

 그러고는 창턱을 팔꿈치로 기대고 이번엔 창밖을 바라봤다. 이내 눈에 들어온 건 역시나 내가 방금 나온 빌라가 단번에 눈에 비쳤다. 솔직히 난, 이 동네가 익숙지 않다. 원래 다니던 지사에서 8년 다니다 예기치 않게 수도권에 위치한 본사로 발령 받아, 그로인해 본가에서 출퇴근이 어려워지게 되면서 하는 수 없이 본사 인근에 집을 알아보게 됐다. 이후 지인의 추천으로 겨우 정착하게 된 게 저 곳. 나중엔 어떻게 될 지 모른다긴 보다, 집을 살 형편은 못 돼 예상보다 싸게 먹힌 전세로 현재 거주 중이다.

 신식 빌라······ 라고 부동산 직원 분이 설명해주긴 했지만 아직까진 의문이다. 요즘 신식 빌라는 문에서 소리가 나나? 평생 아파트에서 살았던 내가 알기엔 항상 드는 궁금증이다. 기름칠이라도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어찌됐든 간에, 이로써 기러기 아빠의 생활이 시작된 것은 다름없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요번 하루도 힘내보자.


아자아자.



•••



 “엇,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금일도 만수무강 하십쇼!”

 “어, 그래. 이대리 자네도 만수무강 하게.”

 “옛! 감사합니다, 과장님! 하하하!”

 운운.

 싹싹한 이대리의 활기찬 아침 인사를 듣고나서야 직장에서의 첫발을 마지못해 직감했다. 곧바로 나는 항상 앉는 지정석으로 가 서류 가방을 간이 책장 옆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아 직장 생활을 준비해본다. 서류 가방에 개인용 노트북과 서류 몇장을 꺼내 올려놓고 자리에 놓인 사무용 노트북의 전원을 켜놓고 나서야 이제야 안심하듯 마지막으로 크래커 한봉지를 슬쩍 꺼내 마우스 대각선 아래에 장식해둔다. 장식이라, 그거 웃긴다.

 평소 간식을 즐겨먹는 편이 아니었지만 따님의 영향인가, 아님 늙어서 입맛이 달라진 건가. 뭐가됐든 내 나름의 소소한 즐길거리다. 이때, 켜진 모니터 화면에 웃고있는 말괄량이 아가씨와 아내의 얼굴이 마침 눈에 비췄다. 이거야 원, 정말 늙긴 했나보다. 오늘따라 가족 사진이 찡하게 느껴지면서 과거사가 TV에서 본 영화 요약본처럼 차르르 스쳐 지나갔다. 

 한 딸아이가 5살 때 무렵, 나는 이 회사 영업부 인턴으로 들어갔다. 대기업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신문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 할 정도에 명분은 갖고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앳된 중소기업이었다. 뭐, 내 회사를 평가할 정도로 잘난 놈도 아니지만. 첫 입사 당시만 해도 꽤나 애먹을 정도였는데···· 그때가 어렴풋이 기억나는군.


 ‘결산 자료 정리, 아직도 멀었나? 하···· 요즘 것들은 물러터져가지고···’

 ‘누가 보고서를 이따위로 써오랬나! 워드 칠 줄 몰라! 다시 해와!’

 ‘회사 입사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업계용어 제대로 숙지못하나, 쯧.’

 ‘이봐 자네, 평소에도 암산으로 처리하나? 제대로 못할 거면 계산기를 두드려! 어!!’

 ‘거래처하고 딜레이 벌이면 어쩌자는 건가! 잘못되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지나면 다 추억이라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나 싶다. 작은 오해로 상사와 투닥거리던 나날도, 서류를 착각해 회의 진행을 느리게 만든 일도, 갓 입사한 부하직원에게 중요 업무를 홀라당 맡기던 아무개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실수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안보여, 해고 당할까 안절부절 못한 몹쓸 흑역사조차 전부 추억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도 그때마다 내 유일한 버팀목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든든한 친구······ 가 아닌 특출나게도 이런 간식들이 생각이 난다. 힘들때마다 크래커 한봉지 뜯어 와그작와그작 게걸스럽게 씹어먹거나, 믹스커피 5잔을 한꺼번에 들이킨다 거나, 흐음, 과장이 심했나. 그냥 주머니에 넣은 과자 한봉지에 약간에 위로를 삼는 정도다. 식탐 많은 먹보는 아닌, 세월의 뱃살(?)이 조금 나온 평균 체중의 아저씨정도니까. OJT때 담당 신입사원에게 격려의 의미로 건네줄 때도 안성맞춤이고 또, 맞다.

 회의 참석 때도 약간의 입가심으로 때마다 올려놓는 과자 한 봉지와 음료 한 병을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오늘은 어떤 간식을 준비해줬을까~ 저런 건 신입사원의 주된 업무지만 나도 가끔 옆에서 도와줄 때도 있다. 따스한 동행보단 야속하게도, 새로운 상자를 뜯는 즐거움이랄까. 요즘 언박싱이라 부르는 그거. 하여튼 내 취미를 아는 직원은 그리 많지 않다. 안다해도 가끔, “자네, 간식을 좋아하나 보구만. 딸이 싸준 건가?” 하는 농담조 정도니까. 알아도 별로 믿어주지 않을지 모르지. 음? 아, 알겠네. 방금 열혈 후임 이대리가 내게 아침 회의를 한다는 멘트를 보내왔다. 으차, 이번에는 어떤 간식이 기다리고 있으려나. 아니아니, 회의에 집중해야지. 그래도.


내심 기대된다.



(이후, 점심시간)



 “신부장님, 이번 점심은 화끈하게 갈비집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다가 싼 집을 발견했거든요~”

 “호, 그거 좋지. 모두들 일 열심히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한턱 쏘도록 할까.”

 “오오! 그러실 필요까진 없으신~”

 “어이, 자네도 같이 먹으러 가지 않을 텐가. 특별히 오늘은 내가 쏘도록 할 테니.”

 “····네? 저 말씀인가요?”

 경력 12년차 만년 과장, 영업부에 소속된 난 어김없이 신상 아이템 기획서 정리에 몰두하던 와중, 부장님의 걸걸한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아, 벌써 점심시간이구나. 간간이 먹는 간식 맛에 길들여진 후로 배꼽시계가 정확히 울릴 일이 없어졌다. 워커홀릭까진 아니래도 한창 일거리에 즐기고 있었는데, 신세 지기도 그렇고···· 그렇다면 답변은 역시.

 “식사 먼저들 하고 계세요. 전 여기 사무실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일도 마저 처리할 겸, 식사도 미리 하고와서, 하하.”

 “에이~ 과장님 또 겸손하시긴. 수백번을 그런 대답하셨잖아요. 이젠 같이 먹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식구끼리 섭섭합니다~”

 쩝, 벌써 그렇게 많이 써먹었나. 미처 몰랐네.

 “허허, 알겠네. 그럼 우리 먼저 식사하러 갈테니, 사무실 좀 부탁하네. 그래도 점심은 거르지 말게나.”

 “넷.”

 “또또, 과장님 때어놓고 가시는 겁니까? 부장님은 과장님한테 너무 약하세요!”

 왁자지껄. 남들이 보기엔 미안한 상황이지만, 어쩔수 없다. 내가 사회성이 결렬된 정도는 아니지만, 혼자 있는 편이 내게는 훨씬 편하다는 걸 애써 부정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이것도 습관이 돼서 쉽사리 고쳐지지도 않으니. 아무튼 모두가 신부장님을 선두로 서서히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음음, 나도 이것만 빨리 마무리하고 바깥공기 좀 마셔야 겠····

 “저, 과장님.”

 “음? 아, 이대리. 자네 아직 안 나갔나. 그보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저도 남아서 과장님의 업무를 도와드려도 될까요?”

 “······에? 자네가?”

 매일같이 부장님 뒤를 살살 따라다니던 나보다 사회생활 제대로인 이대리가 어째선지 나와 같이 남아 도우려 하다니. 좀 전에 부장님 의사를 정중히 거절했을 때도 한껏 심술을 부리더니. 그보다 무례한 행동을 한 듯하다.

 “뭐예요! 절 못 믿으시는 건가요? 같이 일한 세월이 몇 년인데! 정말 섭섭합니다?!”

 “미안하네. 그래, 도와준다면 나야 고—”

 “그리고 업무 처리가 완료되면“


같이 식사 한번 하시는 건 어떨까요?



•••



 “과장님! 어떤 음료를 뽑아드릴까요. 콜라, 사이다?”

 “아무거나 좋네. 맘대로 하게나.”

 “옛! 하하하!”

 으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네. 자판기 앞에 서서 활기차게 마실 거리를 뽑으려는 후임 이대리는, 그 질문을 이후로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주로 어디서 먹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대략 짐작은 가지만, 굳이 왜 나를?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묶은 이대리의 여성성이 밖에서 빛을 발하는지, 밖에 지나가는 오피스 남성들이 힐끗 눈으로 흝어본다. 그렇다. 이대리는 사회성 뿐만 아니라 인지도도 탑인 여직원이었던 것이다. 자세한 건 각설하고.

 이렇게 같이 (뭐 늙은 아비와 다 큰 따님을 데리고 다니는 느낌 같지만) 있는 경우, 내 추측대로라면 아마 내 뒷조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야 뻔하다. 맨날 점심시간에 홀로 빠져나와 은둔자처럼 뭘하고 다니는지, 궁금하다면 궁금할 것이다. 언제나 개입을 금방금방 잘하는 이대리라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래도 마음이 걸린다.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캐낼 필요까진 없지 않나? 모르겠다. 우선은 내가 자주 있는 조금 구석진 모퉁이에 놓인 벤치에 앉아 평소대로 해볼까 한다. 잘못한 짓은 아니니까. 그래도 구석지니 괜한 오해를 살까나.

 “아하, 평소에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 구나. 의외네요.”

 “의외라, 뭐 그렇지.”

 “그래도 혼자 이러고 계시면 심심하지 않으세요?”

 “심심하진 않아. 그저 꽉 찬 사무실에서 벗어나 탁트인 곳에 있고 싶은 것 뿐이지.”

 “아···· 혼자 있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그냥 취향이라네. 사람이 많다고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이제 풀렸나, 그 궁금증은?”

 “엣!? 아아······ 아니요.”

 “이런, 유감이구만.”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근처 따뜻한 오··· 아니 어묵이라도 사갖고 오겠습니다. 잠시 실례!”

 후다닥. 아마 어딘지 맹한 구석이 있는 상사한테 예리하게 본심을 간파 당해 부끄러워 도망치는 걸까. 설마, 그러면 뭔가 이쪽이 잘못한 것 같잖나. 그냥 편하게 얘기를 나누려고 한 것 뿐인데···· 어? 잠깐.

 나는 벤치에 일어나 이대리처럼 빠른 걸음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리고 내가 향한 저편에는 한구석에 쌓인 박스를 주서가려는 할아버지 한 분이 위태롭게 서 계셨다.



•••



 “에이구,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크흥!”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쳤는데 어찌 인사를 안 드리고 갈 수 있겠어요. 이럴때, 겸사겸사 도와드리는 거죠. 하하.”

 나도 참, 부담스럽게 구는 건 상대도 어쩔수 없단 걸 알면서도 또. 그렇게 손주를 끔찍이 아낀다신 폐지 줍는 할아버지와 이번에도 재회해 덕담을 나누며, 조심히 건물 모퉁이에 쌓인 박스 더미와 기타 재활용 물품들을 하나둘씩 리어카에 옮겨드렸다.

 어르신의 그 낡은 리어카에는 어김없이 평평하게 편 박스 더미와 봉지에 따로 모은 캔과 기타 쓰레기가 한가득이다. 이런 야박한 도심속에서 모아놓은 쓰레기를 바라볼 때면 환경 문제도 떠오르지만, 뭣보다 전단지 붙이는 분들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열심히 모으신 결과물의 존경을 아니 표할 수 없다. 작년, 이 벤치에서 낑낑 박스들을 옮기시는 모습을 자주 보다가 그만 길가에 누워버리신 어르신께 급히 달려가 부축해드린 후로, 본인은 멀쩡하다며 몇마디 나누다 보니까 이런 사이가 돼버렸다. 사실, 매번 회사에 빠져나오는 이유도 이와 관련돼 있다. 이번엔 상황이 살짝 다르지만.

 “이번에도 많이 모아 오셨네요. 리어카에 이런 무거운 걸 끌고가시려면 힘드시겠····”

 “뭐? 자네 방금 이거 보고 뭐라 그랬나, 으응?”

 헉. 이런. 이야기하다 보니 그만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우선 고개를 숙여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안 그럼, 대통 분위기만 험악하게 만들 뿐이니까. 그렇게 따가운 말씀들이 한참을 고개숙여 들은 후에야 화가 풀리셨는지 목소리를 줄이시고 본 음역대로 돌아오셨고, 죄인은 고개를 들고 마주봤다.

 “다신 그딴 놈팽이 어엉? 쪽빠리 말투 쓰지말어! 다 아는 총각이, 쯔쯔쯧!”

 “죄송합니다, 어르신. 또 말실수를 범했네요.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앗, 나도 모르게 또 호통을 쳐부렀네. 미안허네. 쪽빠리들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선··· 에이구야, 괜히 총각 챙피만 다 주부렸구만.”

 “아니예요, 잘못한 건 전 데요. 그 의미로 여기 몽땅 제가 치울 테니 가만히 쉬고 계세요! 예?”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다신 안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늙은 두뇌 때문에 기어코 실수를 번복하고야 말았다. 사죄합니다. 푹 쉬고 계세요. 일부러 어르신 앞을 막아서며 후다닥 박스와 쓰레기를 바로 옮겼다. 한두번 하는 일이 아닌 걸 증명하듯 능숙하게 분류해서 넣어드렸다. 어르신도 기특하신지, 천천히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어르신은 일본 사람을 싫어하셨다. 현재도 일본 관계가 썩 좋지 않단 걸 알지만, 그럼에도 유달리 싫어하신 이유는 아마 과거사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묻진 않았다. 굳이 이유를 알려들면 힘들 거다. 상대나 나나. 일단 묵묵히 도와드리자. 솔직히 말하자면, 리어카라는 단어가 일본어일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앞으론 수레, 꼭 숙지하자.

 “이야, 정말 끝도 없네요. 아하하····”

 어느 틈에 난 쓰레기 더미를 전부 해집고 임무를 완수했다. 그에 표식으로 비뚤어진 넥타이 더 후즐근해진 정장은 덤. 나중에 어차피 새로 살 예정이니까, 그정도야 뭐. 하지만 나이 때문인지 힘은 드는 구나, 후와.

 이때, 어르신은 연신 미소를 지으시며 천천히 입고 계신 조끼 호주머니에서 작은 봉따리를 건네셨다. 이게 뭐지? 어서 열어보라는 말씀을 재차 하시길래 차차 봉지 매듭을 풀고 곧장 안을 들여다 봤다. ······어, 이건?

 “뭔지 알겄지? 히히.”

 “아···· 경단이네요. 경단.”

 “그래, 맞어. 자주 다니는 쩌기 쪼꼬만 미장원에서 어느 이쁘장한 처자가 고생헌다고 내게 싸준 거여. 대충 알지?”

 어르신의 가르키는 손가락에 4년이나 다녔으면서 지리가 어두운 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어설픈 의사를 보냈다. 에구, 민망해라. 떨군 고개로 누런 색의 경단을 보며 곧 ‘황금 경단’이라 내게 구차 설명하셨고, 그리곤.

 “그거, 자네에게 줄 게.”

 “예? 이건 어르신께 준 거잖아요?”

 “황금 경단이잖나! 황금 경단! 고생의 보답이여! 나같은 천한 늙은이가 주는 건 받기 싫다 이건가? 그냥 가지라면 가져! 여태껏 받은 정을 생각해서!”

 그런가요. 그러니 차마 거절하기가 뭐했다. 뭣보다 어르신이 냉큼 내게 주시고는 설교를 늘어놓시길래, 엄둘 바를 몰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맘 속 한구석에 할아버지가 내주시는 의미를 해석하려 노력했다. 그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단 하나.

 왜냐면······ 다름아닌 당고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미장원 처자는 어르신이 일본을 싫어하시는 걸 몰랐고, 어르신도 이를 모르셨기에 받으신 모양이다. 아님 애초에 당고에 대해 아시는데 일부러 기특해서 받아주신 건거나. 이내 난 아직까지 마시지 않아 따뜻해진 사이다 캔이라도 드릴까 했지만, 아무래도 아닌가 싶어 접었다. 어찌됐든 전자면 부디 그 처자가 무사하기를. 손목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끝나간다. 이만 가볼까.

 “이만 시간이 다 돼 가서 돌아가야 겠네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세—”

 그때였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네려던 내 계획과 달리, 점잖던 어르신의 얼굴에서 단 한번도 보지못한 진심 어린 미소를 보고 말을 끊고말았다. 허나 시선은 내 쪽에 두지 않으셨다. 곧이어 어르신은 웃음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어이구, 우리 손주! 또 일하러 가는구나! 이 할애비는 네가 자랑스럽다!”

 우렁찬 어른신의 목청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살펴봤다. 고층건물 아래로 생긴 그림자 속 할아버지의 시선 너머에는, 밝은 햇빛 아래 한 오피스 여성.


오뎅을 든 이대리가 말없이 서있었다.



•••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답답한 회사에 나와 귀가 길에 들어선다. 이런 게 바로 해방감이란 거다. 으아, 수고하셨습니다! 하듯 기지개를 피며 소극적으로 어깨를 붕붕 돌려본다. 쌀쌀한 밤바람이 얼굴에 스쳐갈 때 담배 생각이 물씬 들어온다. 물론 담배를 끊은진 오래됐다. 딸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자연스레 금연한 이래로. 대신 입이 심심해졌지만. 아, 그래서 간식을 입에 달고 살았던 건가. 이런. 오늘따라 유달리 새로운 사실을 알아간다. 굳이 알고싶지 않았던 사실까지.

 “부장님! 이번 기획 수확도 좋았겠다, 기념삼아 술 한잔 꺾으러 가시죠?”

 터덜터덜 힘없이 걷던 중, 체력이 아직 남은 젊은 직원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 이번엔 이대리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굳이 이대리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신부장님은 금세 긍정의 회답을 내놓으셨다.

 “그거 좋지. 대신 자네들이 쏘는 거겠지?”

 “물론이죠. 점심은 신부장님이 내셨으니 이번엔 저희 차례,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허허, 젊어서 좋구만.”

 “저기······ 일찍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엉? 아, 그러게나. 이대리가 회식에 빠진다니 별일이네. 사정이라도 생겼나?”

 “아니, 조금 피곤해서, 하하하····”

 “꼭 과장님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뜨끔. 갑자기 나는 왜.

 “저런, 무리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서 쉬게나. 그러고보니 자네도.”

 “아, 예. 저도 일찍 들어가겠습니다.”

 “알겠네. 자네도 무리하지 말 게나.”

 옛. 그렇게 부장님의 친절한 배려 아래 무사히 회식 노선을 타지 않고, 곧장 자택으로 귀가할 수 있게 됐다. 감사. 모두에게 인사를 올리고 약간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밤거리를 걷기로 한다. 버스를 타고가야 하지만, 요즘은 퇴근할 땐 일부로 걸어간다. 이유는······

 “과장님. 따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래. 왠지 그럴줄 알았지. 실은 점심시간 이후로 이대리는 부쩍 얌전해졌다. 주변 사람이 의아할 정도로. 꽤나 경이로운 일일 테지만, 그렇다고 좋지만도 않다. 문제되는 건 아닌데, 자꾸 눈치를 보며 내 뒤를 밟더라. 계속 그러길래 의도는 짐작했다. 하고싶은 말이 있어요, 겠지. 평소답지 않지만 본질은 바뀌진 않을 테니, 스스로 용기내어 말하겠지.

 예상대로 그녀는 구구절절 설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도 창피할 일이었나’ 싶다. 후우, 됐다. 격려의 말 몇마디를 건네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손녀는 맞긴 하나보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걸 보면. 자자,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게나. 무심하게 재촉했다.

 어깨를 툭툭치고 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마지막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미처 다 듣지 못했지만 끝에 문장이 귀에 맴돌았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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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고맙습니다라. 어째서?

 무심히 흘려버린 서두 때문에 별의별 걸 매칭을 하려고 애를 써봤지만, 흐음, 그리 중요한 얘기도 아닐테니 그만두도록 할까. 아마 수고하셨습니다! 같은 비유적 의미이리라. 그치? ······나 누구한테 얘기하니.

 어둑어둑한 야밤의 동네 길목은 지친 기색도 없이 간판에 제각기 다른 빛들을 내며 피곤에 절인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술집에 네온 사인은 기본이요, 노래방과 나이트 클럽의 찬란한 전광판도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단, 늙어서 그런지 오히려 눈만 더 피로해질 뿐이다. 현재 17살 드신 따님을 데리고 가면 딱 좋아할 것 같긴 하다만. 물론 어떤 부모가 미성년자를 데리고 가겠나. 이도 비유법이지. 그치? ······요새 혼잣말이 부쩍 는 것 같다. 자중하자.

 “어서오세요.”

 짤랑짤랑.

 출출한 배를 이끌고 한참을 걸어 들어간 곳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휘황찬란한 라이브 카페! ····바로 건너편에 작은 한식 뷔페 안으로 유유히 입장해본다. 그러고보니 하루종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녔다. 기껏해야 먹은 건 점심대에 이대리가 사다준 어묵 몇 꼬치하고, 편의점에서 산 3분 도시락과 크래커 서너봉지로 대충 끼니를 때웠으니 탈이 날 수 밖에. 서둘러 아무 자리에 앉자 카운터에 있던 연분홍 조끼의 할머니는 천천히 다가오셔서 물병과 컵들을 덜렁 가져다 놓시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시니.

 “잘 먹겠습니다!”

 “······”

 끙. 이번엔 가까이서 말했다고 생각했더니 실패인가. 연세가 있으신 할머니는 좀처럼 인사를 받아주신 적이 없다. 됐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자. 자, 그럼 고대하던 식사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얼른 형형색색 반찬들로 구성된 코너로 다가가 밑에 쟁반을 냉큼 집어들고 가까이 있는 집게를 들어 반찬들 앞으로 우뚝 섰다. 나로 말하자면 매일 밤이 찾아오면 홀로 이 집에 찾는 단골손님. 일찍이 회식 부대에 빠지는 것도 이 때문. 회식은 양껏 못 먹거든. 후후, 어디 한번 골라볼까.

 첫번째로 미나리 무침을 시작해, 취나물 무침, 열무 김치, 고들빼기로 코를 아찔하게 해주는 기본 잔반을 시작으로 깻잎과 장조림, 무생채에 내가 좋아하는 마늘장아찌까지! 소소해 보이지만 맛만큼은 아내에게 미안할정도로 일품이다. 거기다 오징어와 홍합을 넣은 해물탕을 넘치도록 담은 후, 막바지로 윤기 좔좔 흐르는 간장 불고기···· 대신 깨 솔솔 뿌린 제육볶음을 택한다. 오늘따라 매운 게 땡기더라, 흠흠~♪

 오호, 오곡밥과 다함께 먹으니 술술 잘 넘어간다. 마늘장아찌에 제육볶음 조합도 좋고, 먹다 남은 나물들로 고추장을 갖고와 열무와 쓱쓱 비벼 먹어도 굿. 반찬도 새로 갖다놓은 덕인지 해물탕 맛도 진하지 않고 연하니 딱 좋다. 정말 뷔페란 건 누가 만든 건지, 잘 만든 것 같다. 거기다 먹다남은 건 싸갈 수도 있다면 좋으려만. 그래도 식사를 할 수 있단 건 만으로 감지덕지하자. 사치는 금물.

 “할머니, 계산이요.”

 요번에 조금 일찍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에 졸고계신 할머니께 다가가 돈을 내밀었다.

 “음······ 근데 자네는 누구더라?”

 “밥은 잘 먹었습니다.”

 “아참, 손님이 있었지. 내 정신 좀 보게. 그러니까, 성인 2분 맞지요?”

 “예. 방금 나가버린 친구 몫까지 2인분. 여기요.”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주세요.”

 아니예요, 저야말로요. 그런데 그때, 할머니는 이번에도 덤으로 부랴부랴 옥수수 한 봉지를 손에 쥐어주셨다. 단골손님이 되면 받는 여기만에 특별 서비스. 고작 2개 들은 공짜 옥수수지만 뭐 어떠냐. 덕분에 든든하게 먹은 배를 불쑥 내민 채, 계산대에 놓인 박하사탕을 입에 담고 천천히 택시를 부르도록 한다. 그리고 끄억.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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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익


 다녀왔습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습니다. 아아, 이번 하루도 뻐근하네요. 옆으로 고개를 확 꺾으니 뿌걱. 에구야, 이제야 살겠네. 평소대로 전단지와 기타 공고물을 문에서 뜯어내고, 가방과 옷들을 아무데나 던져놓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청결유지, 그후 건조해진 얼굴에 알로에 미스트를 칙칙 뿌려 촉촉함을 보급해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는 곧장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한밤에 걸레질로 마침표를 찍을 때, 그제서야 식탁에 손바닥을 얹고나서야 하루 일과에 무료함을 멍 때리기로 종지부.


부스럭


 응? 뭐지? 목욕 덕에 약간이나마 맑아진 머리를 이고 서류 가방에 몇가지 처리할 서류들과 밤샘 노트북을 꺼내던 와중, 무언가 손에 잡혔다. 그리고 가방에서 꺼내들었을 때 아하고 깨달음에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 당, 아니 어르신께 받은 ‘황금 경단’이 있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이때, 뭔가 짜놓은 시트콤 마냥 차례차례로 떠오르기에 이르렀다. 이건 이대리에게 받은 ‘사이다 캔’과 저건 아까 할머니께서 주신 ‘옥수수 봉지’. 요건 하나 남은 크래커······ 빈 껍데기. 또 버리는 걸 깜빡했네, 에잇.

 “······”

 이렇게 다 놓고보니 뭔가 되게, 풍족하다? 펼쳐놓으니 한 상에 남부럽지 않게 차려져 있었다. 이거 어쩌나, 그냥 먹어버릴까? 굳이 배를 채우고 왔는데 또 허기져서 먹으려는 건 절대 아니다. 받은 지 얼마나 됐는데 끝끝내 못 마신 캔이 미어지고, 옥수수도 제때 먹어야지 안그럼 또 냉장고에 미라가 되서 출몰하지 모른다. 황금 경단은······ 이거 기한이 언제까지지? 결론은 다 먹어치우고 보는 게 훨씬 깔끔할 터이다. 마침 오늘따라 뷔페에서 조금 밖에 못 먹어서 빈 속이, 저런, 속마음이 나와버렸네. 긁적.


삑 삑 삑


 식어버린 옥수수를 젓가락에 꽂아 30초 타이머 버튼을 연달아 6번 눌러 3분을 맞추고, 돌아가는 전자레인지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무의식에 빠져본다. 이러고 있으니 문뜩 들떴다. 뷔페식처럼 식탁 한가득 늘어놓는 날이 올 줄이야. 뷔페라, 음. 무의식이란 건 뜬금이 없다. 갑자기 돌아가는 옥수수를 보고 과거 회상이 떠오르니 말이다. 노인은 추억에 빠져산다더니, 그치만 시간도 죽일 겸 해서.

 3년 전, 이 집에 산지 1년 가까이 됐을 무렵, 난 한가지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다름아닌 집밥, 아내의 밥상이 그리웠다. 일부러 싸준 반찬을 한사코 거절하던 그 날의 내가 밉다. 인스턴트를 믿던 벌이다. 그러던 어느 주말, 분에 못이겨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거리를 뛰쳐나와 배회했다. 누가 해준 밥이 먹고 싶어서, 무작정. 그러고 한 1시간은 걸었을까, 늦은 시간에 열린 가게들 가운데 저멀리 어렴풋이 OO 뷔페, 앞 글자가 흐리게 비춰보였다.

 이 늦은 밤에 아직까지 뷔페가? 따님과 같이 데리고 간 고기뷔페도 아무리 못해도 9시에 닫더니만, 이거 왠 걸. 굶주린 이리떼처럼 한달음에 달려가 근처로 들어서니, 암흑에 가려졌던 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둘이 티격대는 듯 했다. 잠시동안 걸음을 늦춰 관전하니, 그제서야 볼일이 끝났는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알고보니 늙은 할머니셨다. 이거 괜히 칙칙하게 만드는 거 아닌가 하며 걸어가던 그때, 마지막 한 사람이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자네는······.’

 ‘부장님? 여긴 어쩐 일로?’

 깜짝 놀랐다. 1년 동안 같이 지낸 영업부 신부장님이 눈 앞에 계셨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공적인 자리도 아닌 사적인 자리에, 특히 정장도 아닌 사복을 입으신 부장님은 그날 처음 봤다. 또 한 손에는 값비싼 가죽 가방이 아닌, 추레한 검은 봉따리만 달랑 들고 계셨다····.

 이날, 의도치 않게 남의 가정사를 듣게 됐다. 아무 건물 귀퉁이에 걸터앉아 담배 한개비를 꺼내들며 간추려 말씀해주셨다. 방금 같이 있던 분은 부장님의 어머니셨고, 한식 뷔페를 운영하고 계신다. 다만 부장님은 식당 운영을 반대하셨다. 왜냐, 현재 치매를 앓으신 상태셨기 때문에. 허나 정작 운영권 때문에 싸우신 건 아니었다. 들고계신 봉지 때문이었다. 단골 손님에게만 주는 그런 걸, 왜인지 할머니는 손님은 무조건 받는 거라며 투닥거린 끝에 깍듯한 인사를 올리고 홀라당 가버리셨다. 부유한 아들을 전혀 몰라보시고.

 ······이다음, 도저히 못 받겠다며 부장님은 일순간 내게 봉지를 떠넘기시고 일어나셨다. 순간 급작스런 일에 당황했지만, 급히 자리를 뜨시는 부장님의 뒷 모습에 쉽게 때지 못하다 이끝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꼭 먹겠습니다!”

라고. 그 말에 잠시 멈춰있다 곧장 유유히 사라지셨다. 과연 이 이중적인 의미를 알고계실까, 현재진행형이다. 그날 후로 거의 매일 같이 그 뷔페에 찾아가 맛있는 식사를 즐긴다. 또 항상 2인분치 식사비를 지불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배려 차원에서다. 언젠간 부장님이 어머님께 손님 수를 물어보시며 따지실 테니까. 1명 뿐이라면, 날 지목할지도 모른다. 되려 아깝지 않은 지불이다. 그정도 만찬이라면. 혹시, 그동안 부장님이 내게 배려해주신 건 설마.


삐—삐—삐—


 때마침 전자레인지 소리가 울렸다. 이제 드셔볼까나.

 ···

 후와, 잘먹었다. 조금 아쉬웠다면 황금 경단, 당고 맛이 냉장고에 오래 보관했는지 단맛이 살짝 떨어졌다는 그정도? 삶은 옥수수와 사이다를 같이 마시니 궁합이 맞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자, 배도 채워겠다, 밤샘 작업에 돌입해보실까.

 아차차. 잊어버릴 뻔했다. 이번에는 아내에게 안부 문자를 보내기로 했지, 참. 누가보면 잉꼬 부부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정도는 아니고 매주 한번, 서로 꼭 안부 문자를 하자고 본가에 나오기 전에 아내하고 약속한 바있다. 혹시나 딴 여자에게 바람날까봐 그런건가 했지만 내 처지를 뻔히 알 법한 부인이 그럴 용기는 눈꼽만큼 없다고 생각할 거다. 그리 믿고있다.

 자, 뭐라 보낼까. 가끔 하루 일과를 적을 때도 있는데, 흠, 딱히 기억에 남는 소재는 없다. 그래봤자 여직원 한 명의 하소연 밖에 없던 터라, 또 이걸 글로 쓴다면 오해가 생길 조짐이. 그럼 뭘 적지. 간단한 안부만 써보낼까. 최종 느낌을 마음을 담아 보내볼까. 그러자. 한참을 몇번씩 고치고 고치다 실수로 전송 버튼을 눌러버렸다. 으아, 뭔가 잘못된 문자를 보냈는데 음···· 뭐 됐나.

 그를 끝으로 노트북을 열어 타이핑을 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갑자기 문뜩 보낸 문자를 생각하니 풉,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흰 잡풀때기를 박박 긁으며 하루를 마감하는 월급쟁이는, 밤을 지새우며 그 엉터리 문장을 안주 삼아 읊조려본다.



“오늘 하루도 맛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