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그로부터 2달 뒤의 나의 집이었다.
"'세기의 신동 세로프 누츠누트 실종 6개월, 행방 오리무중', '심리전문가가 분석한 세로프 누츠누트의 행적'. 캬하하! 이거 완전 헛다리잖아! 그치 운전기사?"
"그렇네요."
"그렇지. 제니스 카파블도 나를 순순히 인정한 판에 내가 안 보이니까 나라가 혼란이잖아. 그치 운전기사?"
"그렇네요."
"이 사람들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뭐라고 할까? ㅋㅋㅋ 이거 진짜 재밌지 않냐?"
"아 그래 퍽이나 재밌다 새꺄."
운전기사의 표정과 말투가 돌변했다. 눈빛도 혐오와 경멸과 분노로 가득차있었다. 운전기사가 이런 적이 없었다. 운전기사는 분명 나의 편리한 샌드백이었어야 할 터였다.
"여기서 이러고 사니까 재밌냐? 운전기사 불러서 도끼로 책상 찍고 폭탄 만드는 거 보여주면서 나한테 던지는 시늉하고 맨날 나 폭행하며 히죽거리고. 넌 이게 정상으로 보이냐?"
"이 녀석이 날 뭘로 보고!"
운전기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주먹을 한 손으로 거뜬히 막아냈다.
"이게 아주 그냥 보자보자하니까 좋까네. 셀로판테이프보다 쓸모없는 새끼가 아주 주먹이 먼저 나와 그냥."
"뭐야? 운전기사 네가 어떻게?"
"생각해봐라. 일개 고딩이랑 건장한 성인이랑 붙으면 누가 이기겠냐?"
"이 놈이 감히!"
"처음엔 자뻑만 가득하고 갑질 안 해서 경외심에 좋게 봐서 계속 일 했는데, 가면 갈 수록 도를 넘더라고? 넌 마약한 급식충 새끼한테 매일같이 집에 불려와서 당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냐?"
운전기사가 주먹을 막은 손을 거칠게 밀쳤다. 순간 중심을 잃었으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운전기사가 그 손을 양복 안으로 가져가 흰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쿵 하고 내리찍었다. 봉투가 맥도 못 추스르고 처참히 구겨졌다.
"사표다 새꺄. 알아서 잘 살아라 새꺄."
"뭐? 네가 이러고 잘 살 것 같아?"
"어, 아주 잘 살 거야. 손해배상 소송으로 민사 넣어서 의료비, 월급, 재산피해, 정신피해 싹다 네 돈으로 받을 거야. 거기에 마약신고는 덤이다 새꺄."
증오와 살의를 담아 조근조근 말하는 게 무서웠다. 운전기사의 눈빛이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야 운전기사!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널 어떻게 생각했는데!"
"뭐, 어떻게 생각했는데? 내 이름이나 알아?"
"그건..."
"파티엔 샤우퍼. 대대로 높으신 분 운전기사하는 가문이다 새꺄."
이성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만나서 좋같았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아, 만나야긴 해야겠네. 법정에서. ㅋㅋㅋㅋㅋㅋ"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최강인 내가 이렇게까지 추락한다고? 미친. 있을 수 없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시계를 보았다. 오후 8시 30분. 바로 대충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무작정 뛰어갔다. 오늘은 기말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바로 대문을 열고 나왔다. 리무진은 있었으나 운전할 수 없었다. 어쩌지? 버스를 탈까? 아니 애초에 버스는 어떻게 타는 거지? 또 택시는? 아니 애초에 학교가 어디지?
모르겠었다. 그냥 무작정 핸드폰으로 네비게이션을 켜 미친 듯이 뛰었다. 숨가빴다. 다리가 저려오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학교까지 대체 얼마나 먼 거지? 대체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거지?
헉헉거리며 학교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았다. 8시 57분. 다행이었다. 지각은 면했다.
바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이미 사람들이 한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실의 모두가 시험장으로 텔레포트되었다.
경쟁을 알리는 종소리가 고요히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주변 일대는 시험의 시작을 적막하게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서로가 서로의 적인 이곳. 이번에도 적어도 끝에서 3등은 하기를 바랐다.
준비를 위한 시간이 구르고 이름모를 교향곡의 물살이 시험장을 갈랐다. 악장의 첫 음계가 반고리관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경쟁자를 배제시키기 위한 여러 무리의 맹수와도 같은 기세가 시험장을 휘저었다. 
그 결과 사방에서 마법이 폭발했다. 바로 앞에 끝에서 2등인 놈이 보였다. 그리고...


뭐야 여긴 대기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끝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바로 등수를 확인하러 들어갔다. 끝에서 몇 번인지 세었다. 그리고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끝에서 1등. 꼴찌.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격노했다. 최강이 최약으로 한순간에 추락하다니 세상에 이런 변이 없을 것 같았다. 나의 힘이 이제막 현관을 나선 게 아니라 현관 청소만 하고 들어간 거였단 말인가.
대기실에서 바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정문에 몸을 기대며 기다렸다. 무슨 심정이었는지 모르겠었다. 이미 이성이 날아가고 감정이 몸을 지배했다.
조금 기다리니 끝에서 2등이 정문으로 왔다. 나는 끝에서 2등을 보자마자 바로 멱살을 잡았다.
"따라와 끝에서 2등."
"끝에서 2등 아니다... 끝에서 17등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봤어... 너... 끝에서... 1등이라며?"
잡은 멱살을 한 층 더 당겨올렸다.
"그래서 뭐?"
멱살을 잡지 않은 손으로 끝에서 2등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끝에서 2등은 오히려 내 배를 걷어찼다.
"끝에서... 2등... 아니다... 내 이름은... 드시에 라핀... 이다..."
알 수 있었다. 지금 끝에서 2등, 아니, 드시에 라핀은 복수심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 때 깨달았다. 탈락 직전 정면으로 보였던 드시에의 모습은 분명 나에게 공격을 날리는 모습이었다.
"이게!"
그 때 뒤에서 누가 내 양팔을 뒤로 잡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굴욕적이었다.
"작작해라."
"넌 또 누구야?"
"체스터 샤우퍼. 네 운전기사 아들래미다. 아, 지금은 전직이겠네ㅋㅋㅋㅋㅋㅋ"
"이게 무슨!"
"감히 내 아버지랑 친구를 건드렸겠다. 깜빵 쾌속으로 보내줄게. ㅋㅋㅋㅋㅋㅋ"
"이거 놔! 놓으라고!"
"그렇게 자기보다 밑에 있는 사람 괴롭히면서 자기만족하니까 좋은가봐? 자 축하해 이제 네가 맨 밑이란다. ㅋㅋㅋㅋㅋㅋ"
"안 꺼져?"
"자, 그럼 문제. 내가 방금 신고를 했으니 경찰이 여기까지 현행범에 마약사범을 잡으러 오는데 얼마나 걸릴까?"
그 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제 곧 좋된다는 의미였다.
"자, 그럼 이걸 놔줄테니 열심히 도망쳐봐. 참고로 나 운동부라 네가 여기서 허튼 짓 하면 알지? 그럼 어디 열심히 도망쳐보셔.ㅋㅋㅋㅋㅋㅋ"
체스터가 내 양팔을 풀어주었다. 무섭고 두렵고 끔찍했다. 전국 1등이 학내 꼴찌로 간 것도 나락인데 감옥까지 간다면 그건 지옥이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쳤다. 바로 우리 집으로 뛰어갔다. 뛰어서 25분쯤 걸렸다. 힘들었다. 다리가 겨우 움직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랍에 있는 마약이 생각났다. 바로 하나 꺼내 팔에 주사했다. 이게 마지막 투약이라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그리고 주변에 뭐가 있는지 보았다.
도끼와 폭탄. 내가 운전기사를 집으로 데려와서 사방으로 날뛰며 괴롭힐 때 썼던 것들이었다. 혹시 몰라 이것들과 마약을 챙겼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집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럼 어디로 도망가지? 도망갈 곳이 있나?
그래, 거기로 가자. 거기가 좋겠다.

나는 면허도 없이 리무진의 시동을 걸어 엑셀을 밟았다. 아무튼 리무진을 운전했다. 도로를 다닐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다행히 도로가 한적해서 좋았다.
리무진을 끌고 빈민촌 쪽에 있는 언덕 산책로 입구로 돌진했다.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리무진을 세워야하나 방법을 몰라 말을 듣지를 않았다. 결국 근처 가로등에 리무진을 박고야 말았다. 머리에서 피가 났다. 마약하고 운전이라니.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바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갔다. 폭탄에 도끼로 무장한 나를 본 시민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 좋같았다. 그들 중에는 내 능력이 사라진 날 나를 알아봤던 아이들도 있었다. 나를 찬양하는 게 아니가 경멸하다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어렸을 때 나만이 안다고 자부했던 장소. 이곳이라면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것 같았다.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았다. 속에서부터 감정이 솟아올랐다. 분했다.
가짜. 재미없다. 끝에서 3등. 급식충. 일개 고딩. 마약한 급식충. 셀로판테이프보다 쓸모없는 새끼. 현행범. 마약사범. 끝에서 1등. 맨 밑. 피고발인.
예전에 비밀친구 플라타너스가 나에게 힘을 주었다고 좋아라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기술명에도 플라타너스를 넣을 만큼 순수했었지.
그래, 힘이 없어졌을 때가 플라타너스를 만난 후였어. 그래, 이건 다 플라타너스 때문이야. 다 그 빌어먹을 나무 때문이라고! 줬다 뺏는 게 어딨어!
당장 도끼를 집어들었다. 묵직한 도끼를 휘둘러 플라타너스를 찍었다. 한 번. 두 번. 열한 번. 열 번 찍어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거짓말이었다. 플라타너스는 좋같이도 묵묵히 서있었다. 아무리 내가 도끼로 찍어도 나무는 그저 고독히 맞고만 있었다. 나뭇잎이 산바람에 흔들렸다. 산바람이 속으로 정신 차리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그래서 뭐!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잖아!
도끼로 내리찍다보니 산 밑으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빈민촌에서 도시 쪽으로 펼쳐진 경사 밑으로 빨간 불빛을 뿜는 경찰차가 줄지어 집합하는 게 보였다. 경찰인가.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이제 잡히는 건가.
이제 다 좋같았다. 밖에 누군가 여러 명이 일사분란하게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산책로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다 끝이었다.
저 멀리서 파란 실루엣이 보였다. 경찰관이었다. 나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 경찰관들이 단체로 나에게 총을 겨누며 포위했다.
"꼼짝마! 움직이면 쏜다!"
아니야. 아니라고. 이게 내 최후가 될 리가 없다고!
그래, 경찰들도 나쁜 거야. 난 잘못한 게 없어!
미친 듯한 광인의 웃음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폭탄에 불을 붙였다. 폭탄이 경찰 무리에 날아가 펑 하고 터졌다. 속이 시원했다. 마침 주변이 잔디밭이라 붉은 화염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한참을 넋놓고 웃었다. 모든 것이 후련한 기분이었다. 플라타너스 곁 잔디밭에 불똥이 화르륵 튀었다. 내 인생의 종점을 축하하는 캠프파이어였다.
폭탄을 어떻게 피했는지 경찰관 두 명이 나를 제압했다. 나는 팔이 뒤로 묶인 채로 바닥에 밀착되었다.
"귀하를 현 시각으로 형사소송법 제212조에 의거하여 영장 없이 현행범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땅에 처박힌 꼴이 우스웠다. 흙이 온 몸에 다 묻었다.
그 때 돌풍이 불었다. 산바람이 플라타너스의 나뭇잎과 불타오르는 잔디밭을 세차게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산바람이 뚝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