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그 잿빛 하늘이 이토록 사무치도록 그리울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오늘 내 머리 위에 펼쳐진 이 하늘은 야속하게도 푸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볼 하늘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만은, 나는 무신론자라 누가 나를 위해 하늘을 저토록 아름답게 만들어줬는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머리를 살짝 흔들자 옆에 서 있는 하나가 나를 살짝 째려봅니다. 검정 단발머리에 예법을 갖춰 입은 기모노는 그닥 화려한 편이 아니지만 하나한테는 저 옷이 제일 잘 어울립니다. 땡볕 아래에서 조선 총독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지만 일생동안 써온 일본말은 귀 언저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귓속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너무 긴장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갰습니다. 심장은 두근대기를 포기한 듯 천천히 뛰고 있고 손은 식은땀으로 가득 찼습니다. 내 옆구리에 있는 이 물건이 만약 저 총독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부끄럽습니다, 무슨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퍽이나 답지 않다고 생각해 그만두고 싶다고 원해도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습니다. 이럴 바에야 역사 선생님이 아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활기록부에 적는 것이 나을 뻔 했습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되지 못할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튼 주제로 돌아가서,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지는 불과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역사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은 교육직 관련 공무원들 중에서도 가장 봉급이 높은 과목의 선생들입니다. 그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은, 대부분의 공부를 잘 하는 중상위계층의 아이들은 다들 그런 선생님을 진로로 잡습니다. 우리 집 또한 중상위계층이지요. 아버지는 경찰입니다. 중급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중급으로, 경찰이 되기는 했으나 불령선인이기에 진급을 거의 하지 못한 탓에 불혹을 훨씬 넘은 나이에도 새파랗게 젊은 일본인 경찰청년들과 비슷한 돈을 받을 겁니다. 하나의 아빠는 똑같은 경찰서에서 일하는 경찰이지만 훨씬 더 직급이 높습니다. 하나네 가족은 이곳에 건너와 사는 일본인이기에 더 잘 살고 더 좋은 대접을 받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보다 일본어를 잘하고 풍습들을 줄줄이 외우고 다녀도 핏줄은 조선인이기에 하나만큼은 무슨, 반에서 제일 공부를 못하는 그 까까머리와 똑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그 녀석은 아마 이름이 없을 겁니다. 창씨개명을 안 한 집안에는 성이 없으니 이름 또한 없는 게 당연한 도리입니다. 참고로 내 이름은 카이토(海人)입니다. 바다처럼 넓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겠지요. 아무튼 내가 출세할 길은 역사 선생님이 되어, 훌륭한 집안의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는 것뿐입니다.

한 달 전, 학교 기숙사에 있던 나를 역사 선생님이 부르셨습니다. 불이 켜진 역사 교실로 들어가니 선생님은 지구본을 돌리며 멍한 표정으로 계셨습니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오, 카이토. 아무데나 앉아라." 가운데 분단의 둘째줄에 앉은 나는 그 자리가 하나의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카이토,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댔지?" 나는 특별 상담인가 싶어 무척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지구본을 다시 돌리시면서 나한테 물었습니다.
 "왜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은 거니?" 나는 가슴을 펴고 목을 가다듬은 다음에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불령선인이기에 어디를 가나 차별을 받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경찰이지만 승진을 해본 적이 거의 없고 어머니 또한 물건을 살 때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내거나 세금을 일본인들보다 몇 배는 더 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 제가 역사 선생님이 된다면 자랑스러운 일본의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써 차별을 받아도 당당할 수 있고, 또한 누구에게나 자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역사 선생님의 표정은 굳어졌습니다. 창밖을 보며 턱을 긁으시더니 사물함으로 가서 한참을 뒤적였습니다. 다시 나를 향해 서신 선생님의 손에는 오래된 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너 혼자 읽고 내일 저녁 다시 나에게로 오거라. 그리고 다시 너의 생각을 들어보자꾸나."

그날 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가타카나로 쓰인 것을 봐서 대략 50년은 더 된 공문서임이 분명했습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마구 휘갈겨 쓴 종이쪽지들과 다양한 정보가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잘 남아 있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일본이 만주라는 곳에서 시행한 생체 실험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행위였습니다. 사람을 산 채로 해부하고, 엄마와 아이를 갈라서게 하고, 죽이고 또 죽인 다음 그 과정에서 얻어낸 다양한 사실들이 그대로 적혀있었습니다. 그 날 하루종일 나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나치라는 것에 대해 배운 적이 있겠지. 일제는, 말하자면 동양의 나치이다. 일제는 그것 외에도 남의 자식들을 마음대로 데려와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쓰고, 군인들을 위한 성노예로 쓰고, 간혹은 자살특공대로 사용했지. 네가 읽은 문서는 우리 아버지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많은 조선인들이 미국이나 소련이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둘은 자기네들의 싸움에 급급했고,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줄 알았던 우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저 무지하고 가난한 백성들과 하나의 땅덩어리에 불과한 걸 누가 가지고 싶어했겠니? 아무튼 난 그 혼란한 틈을 타 아버지의 공문서를 훔쳤다. 일본은 다시 한반도로 기어들어왔고 아무도 이에 대한 반박은 하지 않았단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친일파가 아닙니까? 언어도 풍습도 사상도 모두 일본의 것입니다. 저를 구성하는 것 중에서 조선인 것은 핏줄, 이 지독한 차별을 대대손손 계속 이어지게 한 조선인 킨다이치의 핏줄밖에 없습니다. 저는 완벽히 일본인입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습니다. 늙은 총독은 땀을 닦으며 "에-또"라는 말을 반복하기 바빴습니다. 옆구리를 묵직하게 만드는 물통은 아주 고전적인 무기입니다. 하나는 그런 걸 굳이 행사장에 들고 가다니 이상하다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꼿꼿이 들었습니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으로 들어가 앞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손등으로 눈을 슬쩍 훔치자 하나가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봅니다. 나는 손을 살짝 내저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 다시 연설에 집중하려 해봅니다. 역시나 눈으로 들어오는 건 타겟이 아닌 그 뒤로 펼쳐진 푸르고 푸른 하늘입니다. 누가 도대체 야외에서 이런 행사를 하자고 한 것인지, 기상예보를 확인하기라도 해본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난 네가 역사 선생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너같은 인재는 일본이라는 속 좁은 나라에 쓰이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야. 나 또한 돈을 벌기 위해서 역사 선생님이 되었지만 진실을 아는 자가 계속해서 거짓을 말하는 건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너도 이제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이지. 넌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 아니니? 역사적으로 차별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어. 그 중 성공한 사람들은 누구인지 아니? 중을 바꾼 게 아니라 절을 바꾼 사람들이다. 나 자신이 아니라 환경을 바꾼 거야. 차별받기 싫다면 독립운동을 하는 게 진정으로 옳은 일이라곤 생각하지도 않니?"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해 왔으나 오늘은 선생님에게 이 말을 꼭 해야만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불령선인이십니까? 교육자임에도 불구하고 학생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하다뇨, 이 일은 없는 일로 합시다. 저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지, 잘 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향하다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본 나는 선생님이 나한테 피스톨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넌 내 비밀을 알고 있지 않니. 그토록 차별이 싫고 일본의 개가, 앞잡이가, 역사를 조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면야 다음 생에 일본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니?" 다리가 발발 떨리고 숨이 막혀 왔습니다. 피스톨이 장전되어 있을 리는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 밤과 어제의 저녁 시간의 기억을 평생토록 비밀로 간직하다가 무덤까지 가지고 가서 저와 함께 묻겠습니다. 제발요, 저를 살려주세요." 선생님은 픽 웃으시더니 피스톨을 옆으로 던진 후 나에게 책을 몇 권 더 주셨습니다.
 "더 읽고, 나에게로 와라. 그리고 비밀로 간직하여라. 만약 네가 일본에게 일러바친다면, 난 자살할테고 넌 살인자가 되겠지."

더 고통스러운 비밀들과 사실들이 내 마음을 송곳처럼 후벼 파고들었습니다. 뻔뻔함에 치가 떨리고 몸을 부둥켜안아도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는 위선자였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부르짖다가 죽었는데, 나란 인간은 고작 하는 생각이라곤 일본에게 잘 보여 출세라도 해야겠다는 게 다였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었습니다. 공부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나조차 의미가 없는 공허함에 빠져들었습니다.


와아아. 함성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광장을 울렸습니다. 어느새 총독의 연설이 끝났나 봅니다. 하나가 옆구리를 찌르며 나를 째려봅니다. 나도 어서 형식적인 박수를 치기 시작합니다. 사회자가 다음 순서는 학생 대표들과 총독의 악수 시간이 있겠다고 알립니다. 드디어 내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