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서 순간 익숙함을 느꼈으니까. 나만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런 익숙함은 반가운게 아님. 오히려 불쾌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함. 


종종 익숙함을 계기로 나 자신의 글을 되돌아본다면 유사하게 생긴 과거의 것들이 현재의 글에서도 꿈틀거리며 그 안을 파먹는걸 볼 수 있었기에.


비슷한 표현방식. 유사한 어휘들로 가득 찬 글을 볼 때면 내가 창작을 하는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함.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나 자신의 기준에서.


원래 창작이라는 건 궁극적으로 삶을 재현하는 거임.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며 과거의 비극을 회상하며.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지금의 겨울을 느끼고.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으며 오지 말아야할 미래를 엿보는 일련의 행위는 모두 창작물 안에 삶을 녹여냈기에 가능한거임.


변화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삶이라면. 그것을 녹여내려는 창작이라면. 적어도 알콜 냄새 풀풀 풍겨 머릿속에 박제된 것만을 사용하는 내 글은 아니라고 생각이 듦.


죽어 쉰 냄새 풍기는 걸 맡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래서 내 글은 죽었고 보이는 악취가 나에게 익숙함으로 다가온 거임.


그렇다 해서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겠다고 계속 글만을 쓴다는 건 깊은 호수에 빠진 이가 육지로 나아가는 대신 닫지도 않을 발을 허우적거리며 천천히 가라 앉는것과 동일하다고 생각이 됨. 잘못된 노력에 힘을 쏟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을까.


빠진 이가 튜브가 필요하듯 나 또한 모방의 바다에서 나를 구해줄 무언가가 필요함. 책. 더 많은 책. 나에게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은 내게 낯설게 다가오고. 그래서 난 그게 좋음. 변화를 부여해 생기를 가져다 주는 삶의 향기는 낯선이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기에.


나는 단지 꽃 한 송이 들고서 그 낯선 이를 좀 오랫동안 기다리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