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


덜컹—.


광야를 덮고 있던 눈만큼이나 하얀 증기를 내뿜는 열차는 광활한 동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열차 안은 유형을 선고받은 죄수들로 북적였다.


‘씨발, 씨발, 씨바알!’


울리야노프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영문도 모르고 억울하게 생 눈밭에 사실상 버려진 것이 이유에서였다.


불과 3일 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평범한  공장 노동자였던 울리야노프는 모스크바 시내에서 그의 친구 미하일과 함께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세 번째 병을 비우고 난 울리야노프가 말했다.



“에이씨! 이 뭣같은 세상. 할당량 조금 못 채웠다고 월급의 2할을 까다니.”

“진정하게, 울리야노프. 그래도 자네 정도면 포돌스크에서는 꽤 버는 축에 속하지 않은가.”

“이게 다 저 망할 스탈린 때문이지, 안 그래 미하일?”

“이봐, 말조심해. 여기서 루뱐카까지는 지척이라고. 언제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지 몰라.”



그러던 울리야노프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울리야노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순간, 울리야노프는 등골이 서늘함을 넘어 얼어붙기 시작했다.


“잠깐 홍차 한 잔 하시게.”


중후한 낮은 목소리의 남자는 울리야노프에게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공포를 선사해주었다.


..그길로 울리야노프는 영영 사라졌다. 


그의 고향 보로네시에서도, 모스크바에서도, 포돌스크에서도 울리야노프는 절대찾아볼 수 없었다.


댱연히 연락도 끊기게 되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12월 초의 야로슬라브스키 역은 억울하게 끌려온 죄수들로 붐볐다. 


물론 그 중에는 절망에 빠진  알렉세이 울리야노프도 있었다.


조잡한 스피커 너머로 기계음이 섞인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블라디보스토크 행 제 1열차, 잠시 후 12시 정각에 출발하겠습니다. 미리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아아.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 유형을 오늘 내가 당하는 것이로구나.


울리야노프는 선로 건너편의 승강장을 바라보았다. 자유롭게 역 안을 걸어다니는 승객들. 


길고 긴 운행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기관사.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울리야노프는 저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빨리 움직여 이 반동분자 새끼들아!”


새장 안에 갇힌 백문조마냥 멍하니 바깥 세상을 바라보던 찰나, 멀리 뒤에서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지 한 톨 없는 하얀 옷을 입은 죄수들은 하나 둘 열차 마지막 칸에 올라탔다.



당연하겠지만 안에 좌석 따윈 없었다. 


반동분자라 낙인 찍힌 자들에겐 그저 널찍한 마룻바닥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열 맞춰 앉으라!”


이윽고 또 다시 호통이 떨어졌다.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열을 맞춰 앉자 울리야노프는 운 좋게도 창가 쪽에 쪼그리고 앉을수 있게 되었다.


바로 옆 엔진 방열판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덤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행, 곧 출발하겠습니다.”


머나먼 시베리아로의 유형을 당한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기관사는 다시 한 번 또렷하게 목적지를 알렸다.


눈이 내려앉은 선로를 따라 열차가 하염없이 달리기 시작한 것은 군관이 문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떠난 뒤의 일이었다. 


오로지 80여명의 죄수들만이 43호차에 남게 되었다.



한 10분 정도 지나자 열차 안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최소 일주일에서 길면 수십 년을 함께할 수도있으니 서로 말동무 먹고서 나쁠 건 없을 것이었다.


 역시 울리야노프도 바로 옆에 앉아있던 한 청년에게서 말이 걸려왔다.



“저기.. 울리야노프 씨 되십니까?”


“그렇소. 자네는..”


초록색 명찰이 울리야노프의 눈에 띄었다.


“페시코프.. 인가?”


“그렇습니다.”



“무슨 죄목으로 끌려왔나?”


“상습절도로 로동교화 8년을 선고받았지요.”


“8년이라.. 그리 짧진 않은 시간이지. 24년보단 덜하겠지만.”


울리야노프는 페시코프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의 눈에는 앞으로 24년동안 고생할 모습, 그 동안 쌓을 추억과 그 모든것을 체념한 지금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보로네시라고 아십니까? 제가 그 동네 출신입니다.”


“동향이군. 보로네시 호반의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가 되어도 잊혀지지가 않지.”


“아, 그렇습니까? 나중에 꼭 한번 그리로 돌아오십시오. 한턱 대접하겠습니다.”


“하하, 그러지. 그런데, 자네는 나이가 몇인가?”


“올해로 스물 넷입니다.”


“스물 넷? 나도 스물 넷인데.”


그랬다. 두 사람은 나이도 같고, 고향도 같은 친구먹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페시코프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정말 우연이군. 내가 그 정도로 노안이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아. 자네 콧수염은 꽤 멋진데.”


둘이서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그 때였다. 


객차 뒤쪽의 문이 열리며, 군관 네 명이 연이어 들어왔다. 



“조용히 하라!”


열차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윽고 한 군관이 죄수의 이름을 호명했다.


“세르게이!”


한 대머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자, 군관은 세르게이에게 종이쪼가리 하나를 건넸다.


세르게이는 종이를 받들고는 다시 자리로 가 앉았다.



“울리야노프!”


울리야노프의 차례는 비로 다음이었다.


그가 받아든 종이에는 그의 유형지가 써져 있었다.



아나디리.



모스크바에서 대략 6200km 거리의, 소련 최동단의 굴라크.


그곳이 바로 그의 유형지였다.


당연히 소련 내 최고 깡촌이었으니만큼, 모스크바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울리야노프는 절망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종이를 받고 돌아온 페시코프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울리야노프.”


“잔인한 놈들.. 유형지가 형편 없는 곳이라네.”


“혹시 아나디리인가?”


“어떻게 알았지?”


“나도 그 곳으로 당첨되었으니까.”


페시코프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