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마왕을 베었던, 그 날의 꿈을.

"하아..."

 사라져가는 기억 속에서도, 질긴 악몽은 끊이지 않는다. 땀에 젖은 이마를 짚는다. 김이 올라오지 않을까 싶은 열기가 느껴진다.

똑똑.
별안간 문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나야. 들어갈게."
"아, 들어와."

  그녀의 목소리다. 침울한지 낮게 깔려있다.

"안녕... "
"좋은 아침."

 의례적인 인삿말이 오간 뒤, 이유 모를 정적이 흐른다. 실례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3시야. 새벽 3시."
"아."

...눈이 안 보이는 건 생각보다 불편하다.

"더 안 자?"
"자야지. 자야하는데, 좀...그래."

 이마에 가녀린 손이 닿는다. 얼굴이 빨개져있던걸까, 아니면 땀을 흘리던 걸 알아챈걸지도 모른다.

"열이...!"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뭐가,"

발소리가 멀어진다. 이윽고 사라질만큼.

"...진짜 별 거 아닌...허억,"

심장이 조이듯 아파온다. 저주가 날뛴다.

 마왕의 마지막 저주.
눈을 빼앗고, 머리를 좀먹으며, 신체를 부수는, 오로지 나의 파멸만을 바라며 그가 쏟아낸 저주. 
마왕을 벨 때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던 것인데도, 사라져가는 기억은 아련하고 몸이 으스러지는 격통에 몸부림치는 건 왜일까.

"하아...하아...닥쳐, 닥쳐... 닥쳐! 망령... 하아, 윽, 커억, 쿨럭! 쿨럭!"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가 역류한다.

"우욱, 쿨럭!"
피냄새가 난다.

"이불이.. 젖었겠네."
"지금 이불이 중요해!"

 어느새 와있던걸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일단 좀 닦고, 그리고...아, 진짜, 진짜 어떻게 해? 루이, 루이.. 나 어떻게 해야 해? 아파?"

 ....루이?
아, 내 이름인가보구나. 또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일단 진통제 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뛰쳐나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손에 쥐어준 손수건으로 입과 손을 적신 피를 닦아낸다. 그 와중에도 가슴이 쪼그라들 듯 아파온다. 가파지는 숨이 뜨겁고 건조하다.

"여기, 약!"

 입가에 느껴지는 유리병의 차가운 촉감이 호흡을 달랜다. 천천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쓴 약의 맛이 오히려 구원처럼 느껴진다.

"하아...하아..."
"괜찮아?"
"이제...조금."

 지금 이 순간에도 몸은 망가지고 있겠지만, 고통은 덜었다.

"저, 그런데..."
"왜, 뭐 필요해? "
"아니, 그..."

 방금전까지 알고있었는데, 갑자가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버렸다. 물으면 안 되는데, 묻지 않으면 그것또한 안 될 것 같다.
아 여자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이름이...뭐였지?"
"후후. 또 물어보네?"

 또?

"이번이 스물 세번째야. 내 이름 물어본 거."
"아, 미안... 미안해,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언젠가 잊어버렸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기억까지도 날아가버린 것이고. 뭔가...쪽팔린다.

"그래서...이름이, 뭐였지?"
"라이언."
"라이언... 알겠어. 이번엔 진짜 안 까먹을거야."
"그 말도, 스물 세번째야."

 라이언은 지금까지 스물 세번의 좌절을 맛본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절망과 슬픔을.

"라이언...라이언,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라니, 예감이 안 좋은데, 뭐, 말해 봐."
"내가, 귀마저 멀어버려도, 나를 사랑해줄거야?"

 속으로 기도한다.
그러지 말라고. 제발 아니라고 답하라고. 
하지만 내 기도를 가뿐히 밟고 그녀가 답한다.

"당연하지."
"너를 기억하지 못해도?"
"물론."
"내가, 더이상 나 자신이 아니게 되어도?"
"응. 얼마든지."

 손이 떨린다.
화를 내고 싶다. 내가 죽어가는 고통스러운 모습따위 보지 말고 떠나라고. 그런데도 그럴 수가 없는 건, 순전히 내 이기심 때문이겠지. 
나는 라이언을 사랑하니까.
나는 라이언이 필요하니까.

"왜...나는 네가 반한 그 멋진 용사님이,  이젠... 아닌데,"
"루이."

 떨리는 손을 따스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감싼다. 무심코 어깨에 들어간 긴장이 풀린다.

"루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너는 너야."
"나는 그냥, 나는, 이제 덜떨어진 고깃덩어리일 뿐인데,"
"그래, 그 고깃덩어리같은 너에게도 반했어. 용사님께 반했던 것처럼, 눈이 멀고, 귀가 먹고, 기억을 잃은 내 눈앞의 루이에게...언제나 반할거야. 사랑할거야."

 내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올려두고는 그렇게, 서글프게 속삭이는 목소리. 

"...떠나지 않을거야?"
"네가 떠나게 안 해주는데 어떻게 떠나."
"막을 방법 없는데."
"있어. 그 매력으로 날 묶어두고 있으면서."
"참나..."

 헛웃음 하나에 방금 전까지 울적했던 기분이 날아간다. 라이언은 나를 사랑하고있다. 그 시절 소년도, 용사님도 아닌, 침대에 누워 스물 세번이나 이름을 묻는 나를.

"...언젠가, 반하지 않게되면, 사랑하지 않게되면, 닐...떠나. 알겠지?"
"너 죽으면 다른 남자 찾으라고? 응,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
"섭섭하네..."
"그럼 죽지 말던가."

 그녀의 부탁에 최대한 부응하기 위해. 다시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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