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채널

‘아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데이. 괜히 마음 상해하지 말그라, 알겠제?’


아무것도 분별하지 못했던 어릴 적의 기억. 재산 상속 분쟁으로 인해서 친척들이 갈라졌던 그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분이 건강했을 적에는 우애 깊은 형제니 사이가 좋다느니, 허황뿐인 말만 늘어놓다가 병상에 눕게 된 이후로는 문안은커녕 그들의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올지 머리를 굴려대느라 바쁘기만 했다.


인간들의 이기심. 이익에 눈이 먼 작자들의 행태. 학교에서 배운 윤리며 도덕이며 모든 것이 허상에 뜬구름을 잡으려는 노력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알았을 때, 얼마나 그들이 혐오스럽던지. 어린 날의 추억은 그렇게 색이 바랬다.


그러던 그때. 병상에서 나에게 말을 건네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던 할아버지. 돌아가신 그분도 알았으리라. 그렇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면서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얼마 뒤, 숨을 거두셨다. 언제나 모이면 자기들이 얼마나 잘난 인간 군상들인지를 따지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몇 겁의 원한을 쌓아놓던 이들이 벌이는 추태란 정말이지 역겹기 짝이 없었다.


그런 기억이었다. 그랬을 터인데.

왜 여기에서도 그러한 면모가 보이는 걸까.


기사는 자신의 앞에서 어떻게든 무덤덤해 보이려고 악을 쓰는 사람들의 앞에서 그때의 수채화가 아른거렸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 이 마을의 촌장으로 보이는 자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젊은 농부. 그 상황에서 기사는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이곳은 가상현실이라 부를 수 있는 편한 장소가 아니다.

숨을 쉬고, 땅에 다리를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버무려 뭉쳐진 세계. 그가 원래 살았던 세계와 전혀 다르지 않은 위선(僞善)이 모여드는 쓰레기장.



“촌장님, 아시잖습니까! 저희도 이번 겨울을 나는 것조차 부족한데 입을 더 들일 수는 없어요!"

“자네, 입조심 하게! 아무리 우리 마을의 사정이 빈약하다지만 재앙을 겪은 저 아이들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이들을 데리고 온 기사님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나!”

“하지만 이번에 거둘 수확량이 영 좋지 않다고요. 가뜩이나 농사를 망친 마당에…….”



에이나와 에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을 데리고 그나마 연고(緣故)가 있는 마을로 찾아왔더니 이 모양 이 꼴이다. 이 아이들과 교류가 있었던 옆집 부부의 딸과 그 삼촌으로 소개한 이들은 어떻게든 남은 생존자라도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정작 촌장을 제외한 나머지 부류는 그 일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외지인인 자신이 겉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이전의 충격을 삭히라고 그들의 집으로 보내 놓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의 마음에는 고블린의 협잡질보다 더한 고통으로 다가왔을 테니. 점점 시끄러워지는 오두막의 - 그래, 모든 게 혐오스러웠다. 


콰직 - 


금속으로 만들어진 건틀릿이 멀쩡하던 통나무 탁자를 짓뭉갰다. 잘게 찢어지는 나무의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열심히 논쟁 중이던 마을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자신들이 아는 이들이 모두 죽어서 이제는 땅을 활보하지도 못할 테니 그건 내 사정이 아니라 무시하고, 겨우 살아서 돌아온 아이들의 입에는 빵이 필요하니 그것만큼은 줄 수 없다. 이런 이야기인가?”

“아, 아닙니다. 기사님. 그것이 아니라…….”

“변명은 집어치워라. 이 마을을 관리하는 촌장과 저 아이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만 남아라. 더한 말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겠으니, 썩 나가도록.”



아까 전까지 열변을 토하던 농부의 입이 순식간에 합죽이가 되었다. 기사의 눈길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수록 마주치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나무로 된 문이 몇 번 삐걱거리니 얼굴을 손으로 덮는 촌장과, 빨간 머리의 여아. 그리고 그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이만이 남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미천하여…….”

“그만. 그대가 자학한다고 하여 마을 창고가 그만큼 넉넉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대답에 겨우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된 촌장은 곧이어 사정을 설명했다. 봄과 여름에 비가 예년만큼 내리지 않아서 실질적인 수확량을 기대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굶어야만 모두가 살아남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땅을 갈고, 파서 먹는 농부들에게는 풍작이더라도 언제나 불안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이 마을은 개척민들이 중심이 돼서 세운 곳이니 이런 일에 민감하지요. 그나마 이 일대의 토지는 영주나 높으신 분들의 소유가 아니라서 세금 관련으로 험한 일은 없었지만…….”

“영주가 없다니? 이 땅을 점유하고 있는 이가 없단 말인가?”

“다들 자기들의 직할 영지만 방비하느라 바쁘니까요. 여기도 귀족 나리들에게는 변경(邊境)이나 마찬가지입죠.”



신세를 한탄하는 촌장의 말에 기사는 어이가 없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도 없고, 그걸 추적할 수 있는 증거조차 모으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대충 이곳이 중세 유럽과 유사한 곳임을 깨달았지만 방금 들은 이야기는 그가 생각하는 상황보다 심각했다.


영주는 땅을 소유하며, 그 땅에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세금을 받고 그들을 지킬 의무를 지닌다. 아무리 고약한 심보를 가진 얼간이라도 그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면 다른 영주들에게 끌어내려 지거나, 도저히 버티다 못한 지역 농민들의 쟁기에 목이 내걸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이곳의 괴물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지만, 마차로 반나절이 될까 말까 한 거리에 놈들이 나타나 마을 하나를 태워 먹었지. 살아있는 놈들은 없었지만, 그놈들이 거기까지 기어왔다고 생각하면 여기도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어.”



전문적인 약탈인지, 아니면 그가 몸을 담았던 게임의 이야기처럼 전쟁에 속한 부류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었다. 그 두 가지의 예를 전부 대입해본다면 작은 마을에서 얻을 수 있는 물자란 한계가 분명히 있다. 몸이 여러 갈래로 찢겨나가고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본대에 이를 알릴 놈들은 없겠지만, 그 바깥에서 성과를 애타게 기다리는 본대가 있다면?


분명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가올 것이다. 전소된 마을과 동료들의 시체를 본다면? 답은 안 봐도 뻔하다. 마을을 찾아서 기어코 습격한 놈들이다. 어떻게든 방법이란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들을 습격할 놈들이 누군지 찾아낼 거다.


기사의 의견에, 촌장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이들을 지켜낼 영주의 군대는 없다. 그나마 근방에 있는 자유도시의 시민군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들의 거점을 지켰으면 지켰지, 이 변방의 마을을 구하러 올 가능성은 적었다.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답니까! 이 마을을 세우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었는데!”



촌장이 저렇게 목을 놓아 하소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주지(無主地)라고 하지만, 그 대부분이 개간(開墾)하지 않은 황무지다. 나무를 베고, 그 뿌리를 들어내고 - 돌을 빼내어 겨우 고랑을 갈아 1년간 밀과 보리를 키울 수 있는 땅을 만든다. 그 과정은 전혀 단순하지 않다. 땅을 갈다가 괴물에게 죽거나, 예상하지 못한 작황으로 굶어 죽거나.


기사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해야 할 의무는 그 마을에서 헛짓거리를 일삼은 난쟁이들을 쳐 죽이고 살아남은 아이들을 마을에 데려다주는 것으로 끝났을 테다. 아니, 이 정도면 중세에서 무력만 믿고 설쳐대는 병신들보단 훨씬 나은 조건이겠지. 다리를 점거하고 통행세를 요구하는 거지새끼들부터 마을에 기어들어 와서는 여자를 요구하는 멍청이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건 모욕이나 다름 없었다.


막말로, 그가 이제 떠나겠다고 해도 막을 사람들은 없었다. 돈이 없는 게 뻔한 이상, 한 푼의 인정(人情)에 기대어 그를 붙잡는 게 머리에서 겨우 짜낼 방법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사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일단 자신이 구한 생명이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라나야 할 앳된 아이들. 보호받아야 마땅하지만, 정작 그가 떠나면 어떤 취급을 받으며 지낼지 안 봐도 뻔했다. 그랬다. 그는 사람의 선(善)을 믿지 않았다. 아이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긴 했으나 기존에 달린 아이 하나에다 두 명을 더 붙이면 인심 좋다고 평가하는 이조차 생활고로 끙끙 앓겠지. 


졸지에 그는 정확하게 알 수도 없는 세계에서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애를 두 명이나 가진 가장 비슷한 신세로 전락했다. 술이 고팠다. 식자재 마트에서 파는 외국산 맥주와 알딸딸한 맛으로 가끔 사 먹던 탁주(濁酒)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뚜껑을 따서 나발을 불었을 테지만 없는 걸 어쩌겠나.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도의적(道義的)인 차원에서 이들을 돕지 않는다는 예시는 선택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이 살지도 죽지도 않은 - 물리적인 오류로 가득한 시체 비슷한 무언가라지만 기존에 있던 양심까지 변질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쩔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촌장과 그 광경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빨간 머리의 여아의 사이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쇠와도 같았던 기사의 입이 열렸다.



“덤벙대지 마라. 기껏해야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대비만 잘 이루어진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무탈하게 넘어가겠지.”



아니, 그 최소한의 피해라는 것도 피해 나름이지요. 그렇게 생각한 말이 촌장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절대로 자신의 눈앞에서 쪼개진 통나무 탁자와 같은 꼴이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어떤 말이 뒤이어 나올지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던 그의 귀에 도저히 나오기 힘든 이야기가 들렸다.



“일단은 일이 이렇게 됐으니, 당분간은 마을에 상주(常住)하도록 하지. 적어도 4명이 충분하게 거주할 수 있는 빈집이 있다면 부탁하겠다. 비용으로 관련해서는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써 줬으면 좋겠는데.”

“물론이지요, 물론이고 말고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 옛말이 틀린 게 없었다. 촌장은 하늘에 계신 지모신에게 언젠가 좋은 날에 공물을 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그 아이들의 후견인 비슷하게 된 밀즈는 그나마 믿을 구석이 생겼다고 안도해야 할지 조금 혼란스럽긴 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자신이 불안하면 앞의 조카도 마찬가지로 몸을 떨 테니.


동상이몽(同床異夢)과 별 다를 바 없는 행태였지만 그걸 따지기에는 이 세상에 자리한 재앙이 너무나도 크고 험난했기에, 곧이어 이를 듣게 된 마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따랐다. 기사의 무시무시한 모습이나 거기서 흘러나오는 오싹한 기운은 따위로 취급할 만큼.



◆◆◆



개척촌이라곤 말은 했지만 모든 이가 헐벗고 굶주려 쓰러지는 상황은 아니었다. 촌장의 당부가 떨어지기 무섭게, 한 농장에서 내준 말을 탄 청년이 근방의 도시로 고삐를 당겼다. 멀어져가는 기수(騎手)를 보면서 기사는 혀를 찼다. 보이는 풍경과 마을 사람들이 말했던 사정이 너무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근의 숲에서 나오는 육중한 나무를 벌채하고 가공하는 재제소와 농부의 밀을 빻는 풍차에 이르기까지. 영주가 농민들을 동원해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개척민들의 순수한 재산으로 지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헛웃음이 들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이래놓고도 입이 늘었다니 마니 소리를 하며 얼굴을 붉힐 일이란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개새끼들도 없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그나마 촌장의 설득이 있었으니 다들 뚱하더라도 고분고분 따라주는 거였지 무작정 밀고 나갔으면 아마도 기사의 도끼는 즐겁게 사람의 피를 맛보고 있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살의(殺意)를 억누르기도 힘든 상황에서 괜한 분쟁을 일으켜봤자 그에겐 득 될 것이 없었다. 


그나저나 이 망할 난쟁이 새끼들을 찾으러 돌아다닐 인원이 마땅찮은 게 걸렸다. 훈련도 끝마치지 않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 본들 전부 불귀의 객이 될 게 뻔했고, 그렇다고 그가 직접 나가자니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뭔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던 기사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전의 마을에서 구해진 에단이라는 꼬마 아이였다. 자신의 키 보다 큰 쇠스랑을 드는데에도 손이 벌벌 떨리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허리춤에는 단검 비슷한 물건까지 챙겼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지금 처지를 무시한 것도 모자라서 보호해야 할 어린아이를 가서 죽으라고 손에 무기를 들려 보냈나? 험악한 기사의 눈길이 한 명을 찍어내기 시작하자 그 당사자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며 미친 듯이 손사래를 치고 있을 무렵, 에단은 기사에게 말했다.



“저, 저도 싸울래요. 저도 기사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미안하지만 꼬마야, 이건 전쟁놀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만하고 네 누이에게 돌아가라.”



보아하니 사람들 사이로 흐르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머물고 있던 집의 창고에서 싸운답시고 농기구를 챙겨 나온 모양이었다. 그 아이의 다물어진 태도 뒤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아하니 사정이야 뻔했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이 아이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싫어요, 저도 싸울 거란 말이에요!”

“에단!”



이내 고집 강한 아이와 어떻게든 말리려는 보호자 사이의 말다툼이 벌어졌다. 복수심인가. 아니면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는 절박함인가. 안타까웠다. 아직 부모의 품이 절실한 아이였을 텐데.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은 책임감과 동시에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그 난쟁이들이 사람 하나 제대로 버려놨군. 기사는 쯧, 하고 뱉었다.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을 때, 기사는 에단의 뒤로 다가가 목덜미를 가볍게 손으로 쳤다. 그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아이를 보며 황망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밀러의 귓가에 기사의 냉정한 어투가 담겼다.



“뭐든 좋으니 꽁꽁 묶어서라도 그 아이의 누이 옆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라. 그 일 이후로부터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하고 촐싹대는 아이를 데려갈 틈은 없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것이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지금 저 고블린들의 장비나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린아이를 데려가 본들 짐만 되겠지. 쓰러진 에단을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면서 기사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장정(壯丁)들에게 말했다. 



“고블린 한두 마리를 발견했다고 분기탱천하게 나섰다가 죽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나와 같이 나가서 싸우라는 말까지는 안 할 테니 신호가 울리면 마을 안에 있는 아이들과 아녀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알겠나?”

“예, 옛! 알겠습니다.”

“좋아, 적어도 기본은 되어 있군. 아까 일러뒀던 대로 번갈아 가면서 교대하도록.”



어차피 무장도 갖추지 못한 농부들이다. 인원을 모아서 괴물을 토벌(討伐) 한다고 난리를 피운들 효율이 나올 리도 없다. 평소 그대로 농사일을 하고 쉬되 손이 남는 이들을 몇 뽑아서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는 게 옳겠지. 오래 끌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최대한 빨리 놈들을 찾아서 몰살시키는 게 중요하다.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지자, 그는 몸에 자리하고 있는 룬의 마력을 일으켰다. 혈기에서 부정으로 죽음이 몰려든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무언가가 자라났다. 익숙한 백색의 날개에, 독수리의 머리를 한 석상……. 그가 언제나 익숙하게 다루었던 괴수인 가고일을 불러냈는데 뭔가 모양이 이상했다. 박쥐 날개가 아니야?


이게 대체 뭔가 싶어서 유심히 살펴봤더니 흉측한 송곳니를 한 얼굴 대신에 검독수리를 표현한 석고가 그를 바라보며 반갑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뭔가 아리송한 기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급한 대로 하늘로 올려보냈다. 4m에 이르는 거대한 체구가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면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뭔데 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변화가 늘어날수록 기사의 기분은 점점 하강 곡선을 그렸다. 어떤 새끼가 여기에 나를 불러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걸리면 반드시 지옥을 보여줄 거라고 그는 굳게 다짐했다. 그렇지 않고선 쌓인 분이 풀리지 않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