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채널
두 개의 달이 떠오르고, 그 사이를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행진한다. 도시의 꺼지지 않는 불빛과 매연으로 이루어진 구름에 가려 사라진 현대의 밤하늘은 더는 그려내지 못하는 광경에 기사는 잠시 넋을 잃었다. 손에서 시간을 놓고 얼마를 그렇게 멍하니 올려다보았을까 - 죽음의 기사가 되어버린 한 사내의 마음에서는 영문 모를 의문만이 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어 여기에 왔으며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늘로 올라가는 혼(魂)은 21세기의 지구에서 생활한 배 나온 중년이며 땅으로 돌아가는 백(魄)은 저주받은 기사이다. 연결된 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질적인 두 개체가 하나로 묶인 것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니, 이런 현상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놈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밝게 빛나는 별들과 주홍의 실로 뜨개질을 하는 마을의 모닥불을 등진 채,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머릿속에는 아무런 예정도 계획도 없었다. 실이 끊긴 꼭두각시가 이와 같을까. 

마을의 경계를 열심히 주장하고 있는 경계석을 지나자, 잡초만이 무성한 들판이 나왔다. 절그럭거리는 금속의 소음도 멈춰버린 고요한 땅.
기사는 가만히 땅을 내려다 보았다. 이 끔찍한 침묵과 혼란을 깨뜨릴 누군가가 절실했다.  

죽음의 기사는 한 손을 내밀어 움켜쥐었다. 무언가를 부르는 행위라 하기에는 너무나 과격했다. 
멱살이 잡혀 버둥거리는 사람이 있었다면 딱 어울렸을 그 몸짓에, 땅이 울렁였다.

녹이 슨 건틀릿의 일부가 흙을 그러모으기가 무섭게, 고풍스러운 장식의 투구가 신선한 공기를 즐기러 튀어나왔다.
텁텁한 흙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기를 잠시. 이내 잘 훈련된 병사가 두 다리를 딛고 우뚝 서 있었다.

딱, 딱.

살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텅 빈 안구가 기사를 바라본다. 기사는 기대했다. 자신이 불러온 죽음이 이내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을 증오하길 빌었다. 그래야만 했다. 자신은 절대로 저것의 주인이 아니라고 -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기사의 바람과는 다르게 백골의 병사는 그를 향해 흉성(胸聲)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들고 있는 창으로 그를 찌르려고 하지 않았다. 긴박한 전쟁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상급자의 명령을 기다리는 군인처럼. 그저 기사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째서지. 나는 너희들에게 가짜가 아니었던가?”
- 무엇이 가짜라는 것입니까.


의아해하는 해골 병사의 물음이 그의 머릿속에 퍼졌다. 그 태도를 기사는 견딜 수 없었다. 겨우 억누른 분노가 터졌다. 


“나를 봐라! 겉이 아닌 나를 보란 말이다! 내가 정녕 너희들의 군주로 보이는가? 강철로 단련된 정신은커녕, 연약해 빠졌다! 누군가라면 단매에 끝낼 일을 질질 끌어가며 해결하지도 못했어! 그 아이를 일상의 생활로 돌려보내는 대신, 나는 오히려 검을 주며 부추겼다! 어린 손에 피를 묻혀가며 싸우라고 등을 떠밀었다! 이게 정녕 너희들이 따르는 기사란 말이냐? 아서스와 다를 게 없어! 그 리치 왕의 협잡질과 다를 게 없단 말이다!"


기사는 분노해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곳으로 끌려온 것도 모자라 본래의 육체가 아닌 화면 너머에서 다루던 가상의 인물로 바뀌었다. 심장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고동(鼓動)하지 않고, 따뜻해야 할 온기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자연에서 버둥거리는 생명을 보며 기뻐하고 경외하던 마음은 이제 모든 것을 증오하여 죽이려는 살의로 변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기는커녕 눈으로 보고 느끼는 일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것이 꿈인지 실제인지 확인할 겨를도 부족한데, 한때의 변덕으로 구한 아이들을 살필 여유 따위가 있겠는가. 그렇게 변명하여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누가 그에게 뭐라고 할 말보다 침묵을 지킬 가능성이 높을 일임은 뻔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던 불의(不意)를 헤집을 힘은 없어도, 무엇을 지켜야 할지에 대한 책임감은 있었다. 

마을이 불타고 소중한 가족마저 잃어버릴 뻔한 아이에게 칼을 쥐어준 것은 누구였나?
잠깐의 여유조차 허락치 않은 채, 멋대로 결정하고 그 조막만한 손에 피를 묻히게 방조한 것은 누구였나?
순간의 분노에 몸을 맡기지 않도록 타일러야 할 사람은 누구였나?

그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죽음의 기사는 자신이 내린 질문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울분과 죄책감이 섞이고 섞여서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누려왔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충격,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조건조차 부정당한 육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지금의 그는 주저 없이 행할지도 몰랐다. 

온갖 생각으로 번민하고 있던 기사의 귓가로 서늘하고도 붕 뜬 목소리가 들어왔다.
괴로워하고 있는 죽음의 기사를 보고 있던 해골 부관은 살이 없는 가벼운 턱을 움직여가며 말을 건넸다.


- 예전에 경께서 진홍십자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셨을 때, 지나가듯 말씀하신 이름이 있었죠. 엘렌이었던가? 그런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관은 기사의 과거를 말했다. 
정확히는, 죽음의 기사로서 활약할 수 밖에 없었던 시나리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부관의 입을 방해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꾸며낸 세계에서 실재하지 않는 사람을 죽인 행적(行蹟)에 불과할 뿐인데도.


- .......경께선 그 일을 항상 후회하고 계셨습니다. 저주받을 리치왕의 지배를 받는 처지였다고 말하는 건 변명과 다를 게 없다는 투로 자주 되뇌곤 하셨죠. 경과 마찬가지로, 저희는 죽지도 못한 채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칠흑의 기사단이라고 내세울 뿐이지 결국 스컬지와 다른 점이 뭐가 있느냐, 라고 나오던 게 제가 곁에서 자주 듣던 주문(呪文)이었죠. 


부관은 힐끗 기사를 보았다.


- 그리고 제 앞에는 그때와 같은 사람이 서 있군요. 가짜일 리가 없잖습니까. 세계를 구했으니 머나먼 과거의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을 하는 대신,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며 책임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기사가 어찌 이전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기사는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해골 부관이 꺼낸 신뢰의 크기는 그가 뭐라고 한들,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한 게 아니라 - 라는 그 첫마디조차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데, 착각이라고 내뱉을 여지가 있을 리 없겠지.

그렇게 여기는 마음을 알고 있는건지. 부관은 흐, 하고 숨을 내뱉으며 웃음기가 어린 어조로 남은 말을 이어갔다.


- 저희는 누구에게나 손가락질받을 저주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 빌어먹을 왕자 놈이 축복이랍시고 내려준 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질투와 혐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끝없는 증오만이 남지요. 본질적으로 본다면 당장이라도 살아있는 사람들을 찾아 죽일 정도의 욕망이 들끓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경을 비롯한 칠흑의 기사단 전체도 마찬가지겠죠. 그렇다면, 지금 저와 같은 언데드가 갈증을 풀기 위해서 저 앞의 마을로 쳐들어가 선량한 이들을 죽여서 그 시체로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까?

"단지, 그것만으로 나를 믿고 있다는 건가?"

- 그럼 무엇을 믿겠습니까? 만약의 일이지만, 제 앞에 계신 분이 진짜가 아니라 그저 겉모습만 닮은 누군가였다면...... 지금쯤 목과 사지가 달아난채로 널부러져 있지 않을까요. 자랑하고 싶지는 않으나 언데드의 포악함을 살아있는 사람이 길들이는 예는 강령술사가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 더 이상하겠지요.


살점이 없어서 찰그랑거리는 손가락 중 하나가 부관의 옆머리에서 빙글, 하고 원을 그렸다.
죽음의 기사와 부관에게는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현상이라는 걸 그가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일상적으로 생겨날 수 없는 일에 대한 원인은 바로 기사, 자신이라는 걸.


- 얼라이언스와 호드의 몇몇은 그랬었지요. 불가능하다고. 이루어낼수 없는 목표라고. 모두가 단정짓는 그 순간에 경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고대 신의 타락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칼을 휘두른 유일한 기사를 의심한다고요? 그런 눈을 가진 놈이라면 당장이라도 뽑아버리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법입니다. 그 정도로 경께서는 마땅히 찬사를 받아도 아깝지 않을 분이십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그의 말에서 묻어나오는 신뢰를 들으며, 죽음의 기사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다가 부모님에게 들킨 아이와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입을 비틀어서 열더라도 무슨 말은 해야 하지 않나 고민하는 것도 잠시 뿐. 기사의 면갑(面甲)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호흡은 없었다.


-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말씀을 들어보면 여기는 아제로스도, 드레노어도 아닌 별천지의 세계 같습니다만.
“칠흑의 기사단과의 연결도 끊기고 그와 관계되는 이동 술식도 작동하지 않아. 작동하는 건 차원 마구간이나 은행 기능 정도로군. 외부로부터의 통신 전달이나 소식 전파도 불가능하겠지.”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초창기부터 이 게임을 즐겨왔었다. 어지간한 기능을 알고 있을 정도로 빠삭했으나 그 이점은 지금에서는 유명무실했다. GM과의 연결이나 그나마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의 연락, 하다못해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귀환석까지. 그가 딛고 있는 세계는 가상의 공간이 아니었고 인터넷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더불어, 그가 알고 있던 기능들 또한 -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몸소 깨달아야만 했다.


“별수 없지. 최대한 이 이상한 별에서 버티면서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 원주민과의 접촉을 우려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지나쳐 온 곳들은 그나마 이해라도 했지만 여기는 전혀 정보가 없지 않나. 있다고 한들……. 카자마이트를 흡입하지 못한 고블린보다 더 수준이 낮은 난쟁이들이 있다는 것 이외에는.”


기사는 하늘을 날고 있는 가고일의 시야로 주위를 탐색했지만,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음을 확인했다. 드넓은 미개척지와 숲만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전소한 마을의 흔적이 잠깐 눈에 들어왔다.

해골 부관이 그 점을 눈치챘다. 그 또한 기사가 보는 풍경을 심령(心靈)으로 느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데드를 지휘하는 강령술사가 전선에 섣불리 나서지 않아도 통제가 가능한 이유 중 하나였다. 척후의 시선이 저절로 명령권자에게 전이(轉移)되고, 그렇게 판단하고 내린 명령은 언데드 전원으로 순식간에 전달된다. 그래서 스컬지라는 부류의 메뚜기 떼가 은빛 십자군에게 쉽사리 퇴치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 그 마을의 생존자가 신경 쓰이시는 것 같습니다만.
“일단은 내가 구한 아이들이 아닌가. 책임은 끝까지 져야지.”
- 이거야 원, 매번 피곤하게 행동하시는 건 여전하군요.
“어쩌겠나. 먼저 태어나 죽은 죄지.”
- 혹시 그 아이를 종자로 들일 생각입니까?


부관의 물음에, 기사는 기겁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말게. 잘해 본들 가족의 품을 떠나기엔 이른 데다 굳이 칼질을 가르쳐야 할 이유 따윈 못 느끼겠네만. 그리고 내 괴력으로 그 아이를 가르치라고?”
- 못 하실 건 없지요. 예전에도 얼음 왕관에 있는 마상 시합장에서 똘똘한 아이를 하나 데리고 열심히 굴렸잖습니까. 두 번이라고 못할까요.
“그건…….”


듣고 보니 있었던 일인지라 뭐라 반박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음 왕관에서 그 아이를 페일트리스 여사제에게 보상 - 아니, 소개받긴 했었다. 그러고 보니 종자를 데리고 꽤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무표정으로 일관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찾아오지도 않는 휴식에 달관한 나머지 그냥 포기하자는 생각이었던가. 


“솔직하게 말하면 모르겠네. 애초에 은빛 십자군에서 교육을 받고 나오지도 않았고, 우리가 그 아이를 믿지 못하듯이 그 아이도 우리를 절실히 믿겠나?”
- 음……. 하기야, 썩어가는 시체를 완전히 믿어줄 형편 좋은 사람은 없겠죠. 그 전의 종자야 거기서 설명을 제대로 하고 들어온 셈이니.


이곳의 실정이 어떤지는 정확히 모른다. 지금이야 이들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참모습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예상이 갔다. 스톰윈드에서도 스컬지의 종복이라며 모진 고난을 겪었는데 여기라고 그러지 않을까.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그렇게 기사가 생각한 순간. 상공으로부터 주변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깊은 밤에 아녀자가 홀로 나오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에이나 양.”
“.......!”
- 이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군요.
“어쩌겠나. 마음을 너무 놓은 내 탓이지.”


갈대 사이가 바람에 의해 갈라진다. 북풍(北風)의 한기보다 더 차가운 칼바람에 옷을 여미는 에이나였지만, 몸으로 파고드는 싸늘함은 그걸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사람이 아닌 것들의 형상이 비추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혐오감과 두려움보단, 다른 감정의 씨앗이 싹 텄다.

이들이라면.
기사님이라면.


◆◆◆


드높은 천상과 유황의 불길이 휘몰아치는 지옥.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혼돈의 메아리 속에서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저 무시무시한 걸 누가 불러온 건데?]
[불러? 저 아나테마(Anathema)를 불러올 권능이 있는 애는 있고?]
[혹시나 몰라. 세상이 너무 지겨워져서 외 우주의 신들과 짜고 치는 녀석이 있을지 알겠냐?]
[뭐야, 의심하는 거?]


수많은 빛과 어둠으로 장식된 옥좌에서 고함이 오갔다. 본래라면 그냥 투덜대고 말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걸로 끝마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지상의 운명을 좌우하는 천칭이 기울고, 필멸자들의 행동을 제약하여 바꾸는 주사위는 이미 모래가 되어 가루로 흩날렸다.

그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 신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일부 신이 저 정체불명의 존재를 어떻게든 제약하려 노력했지만 그들의 권능은 닿기는커녕, 오히려 튕겨 나와 영체(靈體)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모든 신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각지신(覚知神) 그놈 짓 아니야? 외 우주에서 금지된 지식을 필멸자에게 주입하는 녀석은 걔 말고 없을 텐데.]
[야, 저건 그놈 능력으로 가져올 수 있는 애가 아니야. 저걸 지상에 현현(顯現) 시키는 일은 화신을 제작하는 일만큼의 힘으로는 안 된다고.]
[.......돌겠네. 우리의 힘이 전혀 먹히질 않아. 오히려 지독하게 반발하고 있어. 어떤 놈을 섬기길래 정신마저도 틈이 없냐? 내 평생 저런 애는 처음 본다.]
[젠장, 저거 통제도 불가능한데…….]


신들은 각자의 진영에 상관없이 머리를 맞대고 해답을 논의해 봤지만 정작 나온 답안이 시원찮았다. 자신들의 심복들을 움직이는 건 계시로 내려도 충분히 먹혔고, 정 안되더라도 내리는 힘을 통해서 제어할 수 있었지만 저건 그들의 힘으로도 제압하는 게 불가능했다.


[일단 다들 진정들 하지. 아직 급하게 시도할 이유는 없잖아.]
[시간이야 있지. 근데 뭔 수로 운명에 개입하냐? 주사위는 박살이 났고, 조율하는 천칭은 아예 올라올 생각을 안 하는데?]
[진실, 너는 어떠냐.]
[불가(不可). 저걸 판에서 지워 버리려면 이 별 통째로 소거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문제는 그랬다간 여기를 기반으로 둔 우리 본체가 떨어져 나가서 끝없는 방랑을 하게 되겠지.]
[미친.]


규칙을 제어하여 필멸자의 운명을 시험하는 진실의 권능조차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이들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가 힘을 쓰지 못한다면 이 회의장에서 있는 모든 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골칫거리가 되는 셈이니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흠. 나는 딱히 상관없다고 여긴다만.]
[하? 노친네, 정신 나갔어?]
[안타깝게도 내 정신은 너무나 멀쩡하다네.]


늙은 존재가 웃음 지었다. 그 광경에 어리둥절해 하는 이들과 그 웃음에 불안해하는 신들이 나타났지만 - 그는 어찌 되든 좋다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가, 생명.]
[응. 좋을 것 같아. 동의.]
[뭐야, 너희들 설마……?]
[알아챘나? 저 기사가 이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나와 생명이 얻는 이익이 없애는 그것보다 더 많은데 뭐하러 힘을 써가며 끙끙대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런 속내를 알아챈 신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진실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진심인가, 죽음? 정말로 저 저주받을 것을 내치는 일에 힘을 보태지 않겠다고?]
[진심일세, 진실. 생각해보게. 이 별에는 수많은 생명과 죽음이 태어나고 사라지지만 그 순환의 과정은 너무나……. 허술하지. 나와 같은 존재의 아량으로 부활을 마음대로 쓰고, 저승의 법도를 어지럽히지. 선(善)만이 그럴까? 아니야. 악(惡)에 속한 이들도 멋대로 죽은 자를 부려내 우리의 머리를 골치 아프게 만들지. 거두려고 하면 어느새 그놈들을 섬기는 시종이 달려와서 그만두라고 협박을 하지 않나.]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죽음은 이내 돌변했다.


[난 언제나 그대들에게 부탁했지. 유희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선을 넘지 말라고. 한번, 두 번, 세 번. 아니, 우리가 이 일을 기획했을 때부터 계속. 그렇게 간절히 부탁했는데도, 이 별이 담고 있는 힘조차 영원하지 않다고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그 누구도 나와 누이의 요청을 들어주는 이가 없더군. 정말이지, 역겨울 정도로!]
[이해. 수긍. 불요(不要). 거부. 화남.]
[그래서 우리는 그대들의 무심함에 지쳐버렸다네. 말을 들을 척도 하지 않겠다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수없이 규정의 개정을 요청했지만, 그대들은 언제나 귀찮다며 무시했으니. 그렇다면 별다른 도리가 없겠지.]


짐승의 해골을 머리에 쓴, 신체가 길쭉한 이와 머리에 화단(花壇)을 이고 있는 자그마한 이가 일어섰다. 더 이상의 논의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이내 다른 신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나와 누이에게 그대들이 허락한 권한으로 - 나, 죽음과.]
[생명. 받음. 권한. 승인.]
[우리는 그가 이 세계의 정당한 주민임을 인정하며, 이를 어떠한 불의(不義)가 가로막더라도 그의 그림자를 밟지 않음을 여기서 선언한다.]
[별이 노래한다. 만물이 지켜본다. 시간이 증명한다. 우리는 존재한다.]
[나와 생명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네. 다음 회기에서는 좀 더 의미 있는 토론이 되었으면 좋겠군. 가세나, 누이여.]


그리고는 성큼 돌아서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에 진실은 이를 갈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저렇게 나온다고……?]
[썩을. 엄청 화가 났나 본데. 생명이 저렇게 싸늘하게 굳은 걸 어떻게 풀지.]
[.......지금 환상이 어딨는지 아는 녀석 있나.]
[어쩌려고?]
[어쩌냐니. 넌 당연한 걸 되묻고 있냐?]


무언가를 겨우 참아내는 일그러짐이 진실의 주위에 흘렀다.


[판을 키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