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채널

짧은 다리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뛰는 속도를 줄일 수도 없다. 녹색의 피부에 번들거리는 땀이 계속 흘러내렸으나, 그걸 훔칠 겨를이 이 작은 고블린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 푸히이이힝!



그렇게 도망가는 걸 비웃기라도 하듯이 어디선가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공포에 질려버려 하얗게 뜨기 시작한 안색(顔色)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어째서지,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렸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놓여있는 고블린의 머리에서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지만 정확한 답을 유추할 정보는 없었다.


겨울은 조용히 다가와서 공평하게 죽음을 안긴다. 온몸이 얼어있는 채로 동사(凍死)하던지, 먹을 걸 구하지 못하고 빌빌거리다가 아사(餓死)하던지. 그런 꼴을 당하기 싫다면 어디서든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물자를 가져와야 했다.


고블린은 도구를 쓸 지능이 있지만, 그 머리를 가지고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주위에는 언제나 인간이 사는 마을이 있고 그 장소에는 고블린들이 누려보지 못한 다양한 음식과 생필품이 널려있다. 거기다 부수입으로 자신들의 성욕을 채울 따뜻한 인간의 암컷들까지. 그렇기에 겨울이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이들은 무리를 이루어, 마을을 약탈하는 것에 머뭇거림이 없다.


번쩍번쩍한 갑옷을 입은 무서운 인간들은 그 수가 적다. 그렇기에 지켜야 할 마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동족들이 다 털고 나서 도착하는 게 부지기수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마음껏 비웃고 시체를 능욕하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아냥거린다. 그게 고블린에게는 당연한 일이며 과정이었다.



그랬어야 했을 터인데.

그랬어야만 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분명히 정찰을 나간 놈들의 말에는 번쩍번쩍한 인간들이 이끄는 말의 발자국이 없었다. 끽해봐야 인간의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소수의 흔적 말고는 없다는 보고에 이를 의심하긴 했지만 그래 봐야 별일은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이쪽의 숫자가 많으면 많았지, 인간 놈들의 숫자가 그에 맞을 리가 없었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납치한 인간 암컷들에게 태어나는 어린 고블린의 숫자가 더 많았고 - 그 어린 동족들은 인간의 아이보다 더 빠르게 자라서 부족한 머릿수를 채울 테니까.


이미 죽은 놈들이야 죽은 거고. 입이 줄면 줄수록 살아남은 동족들이 먹을 수 있는 물자의 양도 늘어난다. 곧 있을 싸움에 흥분되어 무장한 동족들을 이끌고 근처에 있을 마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때 까지만 하더라도 잿밥에 관심이 있었지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정찰을 끝마치고 돌아온 녀석들조차 인간 마을에 차려진 식탁은 무엇일까 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지.


그렇게 얼마간 그들의 행군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하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동족들의 사이로 떨어져 운이 없는 몇 놈의 생명줄을 끊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긴 했지만, 고블린들은 저마다 이를 드러내며 흉포함을 자랑했다. 애초에 죽는 게 약한 놈 취급받는 그들의 사회에서는 조금 죽어 나간다고 해서 겁을 먹고 도망칠 일은 잘 없었다. 동족에게 비겁자라는 꼬리표가 평생토록 달리기 싫다면.


연기가 걷히기도 전에 성급한 일부가 손을 휘저어 안을 살펴보려 했을 때 - 거대한 손이 이를 잡아서 물에 불린 스펀지를 짜듯이 으스러뜨렸다. 사방으로 피와 장기가 흩날렸다. 그제야 적임을 알아챈 이들이 창을 내지르지만, 빛의 축복을 받은 성기사의 철퇴조차 가볍게 흘리는 석상(石像)의 신체는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발로 채여 척추와 장기가 부러져 파열되고, 날카로운 부리가 투구를 쓰고 있던 동족의 머리를 꿰뚫는다. 등을 노려 뒤를 접하니 커다란 날개가 이를 방해해서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고블린의 숫자는 많았다. 아무리 못해도 70마리에 이르는 숫자고, 적은 하나뿐. 


거기다 그는 동족을 이끄는 주술사였다. 하루에 몇 번 쓰지도 못하긴 하지만, 그가 부리는 주술은 때때로 그를 우습게 보던 인간 놈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특효약이기도 했으니 기회를 노려 저 정체불명의 돌덩이를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조금씩 어설픈 포위망이 잡히고 이제야 저 이름 모를 돌덩이를 파괴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그런 생각이 퍼져나가는 일도 잠시뿐이었다. 건너편의 숲에서 녹색의 구체가 피할 틈도 없이 주변의 고블린을 덮쳤다. 깜짝 놀란 희생양이 팔을 버둥거리며 이를 떨쳐내려 했지만, 그 불길한 녹색의 불꽃은 거침없이 고블린의 몸을 씹어 삼켰다. 한 마리를 온전히 해치운 마력의 불길은 다음 목표에 달려들었다. 살이 썩어가는 것도 모자라서 몸이 마른 장작처럼 태워지고 있었다.


죽음의 향기가, 끝없는 공포가 전염되어 그들 사이로 퍼진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공격에 당황하다가 돌주먹에 머리가 으깨어지면서도 정작 이를 타개할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병이라고 할지라도 전장의 온갖 변수에 대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보다 못한 고블린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기이한 말의 울음소리가 숲에서 뛰쳐나와 그들의 사이를 좁힌다. 그나마 정신에 여유가 있던 고블린 몇몇이 창을 들어서 돌진을 막아보려 시도했지만, 군마의 빠른 속력과 그 덩치로 말미암아 생겨날 충격은 짧은 창으로 멈출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옹기종기 모였던 고블린 두 마리가 5m에 이르는 마상(馬上) 창에 의해서 꿰뚫렸다. 그들의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벌컥벌컥 피가 입에서 뿜어져 나와도 창날을 붙잡으며 저항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창은 더욱 깊숙이 그들의 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뿐.


그리고 일반적인 기사와는 다르게, 그걸 휘두르는 건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이였다. 언데드의 괴력(怪力)은 무지막지한 무게를 자랑하는 창을 나뭇가지처럼 휘두를 수 있는 일을 가능하게 했고 그 결과는 고블린에 있어서 치명타와 같았다.


한번 휘두른 마상 창의 움직임에 고블린의 육체는 깨어지고, 부서지며 - 하나씩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 번의 돌격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하는 기사의 빈틈을 노리고 몇 마리가 그의 후방을 노렸지만, 기사는 들고 있던 창을 놓아버리고 도끼를 들어 덤벼드는 족족 그들의 목과 몸통을 분리했다.


70에서 50으로. 50에서 30으로. 30에서 10으로.

고블린이 마음 속에 남아있는 흉폭함이 공포로 바뀌는 시간 또한 이와 비슷했다.


인원만 잘 구슬렸다면 인간의 자그마한 마을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고블린들이 사자를 만난 양처럼 반항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깡그리 죽어 나갔다. 이대론 안 되겠다고 판단한 고블린을 시작으로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는 동족들이 속출했다.


이들의 수장을 맡고 있던 그 예의 고블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탈도 유희도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놀이다. 죽으면 그런 일도 즐기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면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다른 동족의 무리에게 의탁해서 언제든 위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드넓은 들판에서 울려 퍼지던 동족들의 비명이 차츰, 차츰. 줄어 들어간다. 그 변화를 눈치챈 고블린 주술사의 기분 또한 줄어든 만큼 땅에 떨어진다. 도망친 동족들이 잡혀서 목숨을 잃으면 자신이 도망칠 기회는 그에 반비례하여 줄어든다.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내가 각고의 노력으로 올라온 자리이거늘! 


치밀은 분노가 완전히 끓어오르기도 잠시. 바삐 움직이던 발목을 무언가가 잡아끌었다. 그걸 자세히 보기도 전에 고블린 주술사는 빠른 속도로 끌려간다. 직 - 지직. 거친 땅의 표면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건 그만한 고통이 뒤따른다. 



“끼, 끼익!”



밀려오는 통증을 분출할 틈도 없이 죽죽 미끄러진다. 그렇게 끌려가다가 움직임이 멎었다. 그렇게 속으로 안도하던 고블린의 위로 그림자가 들어섰다. 어질한 정신이 돌아오는 것도 잠시. 고블린의 동공이 커졌다.


시리도록 푸른 안광이 투구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주위로 죽음의 기운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가 저절로 딱딱거렸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야. 경험이 있다고 자부하는 고블린조차 보지 못했던 두려운 무언가였다. 어떻게 하면, 이 것에게 도망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복잡하던 머리는 단숨에 깨어졌다. 땅을 짚고 있던 손등에 날카로운 도끼의 끌이 찔러 들어갔다. 방금의 고통과는 다른 이질적인 느낌에 비명을 질렀으나 딱히 변하는 건 없었다.



“목소리 하나는 기운차서 좋군. 이제부터 내가 질문을 할 테니, 대답해라. 무리를 꾸리고 무기를 너의 동족에게 쥐여 줄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은 있어 보이니 답을 할 여지는 있겠지.”

“캬아악!”



고블린이 흉성(胸聲)을 울리기 무섭게 주먹이 얼굴을 후려쳤다. 이빨이 나가고 핏물이 터졌다. 계속해서 찾아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주술사의 상태를 무시하듯, 무감정한 목소리가 위에서 내리깔아졌다.



“반항하는 얼간이를 조련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차피 시간은 많다. 자, 그래서 네 녀석은 어디에 속해있지? 호드의 첨병인가? 아니면 밴시 여왕을 따르는 배금주의자냐? 그것도 아니면, 이미 죽어 사라진 족장을 따르는 잔당인가?”



기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일부를 흘려 고블린의 반응을 끌어내려 했지만, 그 당사자는 이 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하질 못했다. 인간의 말은 안다. 아무리 못하더라도 인간이 단편적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불길한 것이 말하는 것은 도통 들어도 알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기사가 알고 있던 정보는 이 세계에서 통용되지 않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 건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지만, 정작 답을 해준 건 없었다. 처음에는 ‘적에게 풀 정보 따윈 없다!’라는 행동 방식으로 받아들인 나머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봐줬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전혀 개선되지 않는 고블린의 행동을 보고 이 머저리가 자신이 원하는 정보 따윈 하나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에 정신이 날아가 버린 고블린을 밧줄에 묶어서 말 안장에 연결한 이후, 그는 심각해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제로스도 아니라면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전혀 경험해보지도 못한 곳에 떨어졌는데도 이곳의 사람들과 말이 통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런 거에 신경을 쓰기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다급했다.


차라리 잡은 이놈이 호드의 정찰병 비슷한 무언가였으면 아, 그렇구나! 여기는 아제로스구나! 하하, 어떤 망할 새끼인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잡아서 회를 쳐주겠다고 행복회로 비슷한 무언가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답이 보이질 않는다. 그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빛이 가득한 경관이라도 보면 마음이 나아질까 싶었는데. 어째 기사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가 생각지도 못한 요소가 하늘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그가 질기도록 눌러앉아 평판을 얻기 위해 뛰어다니던 타니안 밀림이 아니다. 한때 주둔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자원을 모으던 어둠달 골짜기가 아니다. PVP를 즐기기 위해서 군마를 타고 돌아다니던 격전지, 아쉬란이 아니다. 그 모두를 포함한 별 - 드레노어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늘에 있는 달은 두 개란 말인가?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름도 모르는 이곳은 그가 알고 있던 곳이 아님을. 만일 그렇다면, 그가 발을 딛고 있는 대지가 새로이 시작해야만 하는 곳이라면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밤의 서늘한 기운이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스스로 내린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했다.



◆◆◆



해가 지고, 마을에는 어둠이 깔렸다. 보통 때라면 내일의 일을 위해서 자야 할 시간이지만 그럴 겨를은 이들에게 없었다. 마을을 지켜주겠다고 한 기사가 늦은 시각인데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혹시라도 당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면 도시를 향해서 말을 타고 간 청년의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모험가 관련으로는 도와줄 수 있겠지만 도시 또한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기에 휘하의 시민군을 파병할 수 없는 현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어렵게 말을 꼬아놨지만 - 결국, 너희들의 일은 너희가 책임지라는 통보다. 촌장은 이를 악물었다. 세금을 직접 내지는 않지만, 그 도시에서 생산된 물품은 대부분이 주변의 변경으로 팔려나가고 있는 게 현실이었고 그 흐름은 자유도시의 상인들이 쥐고 흔들었다. 그런 영향력을 내세우며 돈을 벌어도 손해를 보는 일은 한 끝조차 가담하기 싫다는 행보다.



“망할 새끼들. 식량이 필요할 때는 다른 곳보다 저렴하게 매입(買入)하게 해주면 때때로 도움이 되어주겠다느니 마니 소리를 지껄여 놓고는 필요한 순간에는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린다 그거냐! 상인 놈들을 믿은 내가 멍청이였지……!”

“이제 어떻게 합니까, 촌장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나. 마을에서 모아둔 기금(基金)이라도 털어서 모험가들을 고용하던지 수를 써야지. 가뜩이나 고블린 퇴치 의뢰를 내걸면 어지간한 값으로는 사람조차 모으기 힘들 텐데…….”



웃돈을 얹어 주는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모인 모험가라는 놈팡이들이 그만한 값어치를 보장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괜히 농노들이 세금을 내더라도 영주의 군대에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게 아니었다. 


귀족들이 아무리 콧대가 높다곤 하나, 그들도 자신의 영지가 잘 돌아가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그 밑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生業)에 종사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특유의 머저리가 아닌 이상은.


그걸 바랄 수가 없는 환경이다 보니 촌장은 사비를 들여서라도 도시의 길드에서 거래를 위해 파견 나온 상인들의 목구멍에 기름칠을 해주었건만 불리하니 계약엔 없는 내용이라면서 말을 바꿔버린다. 부드득 - 그 빌어먹을 새끼들은 언젠가 지모신의 천벌을 받아 뒈져버리라며 속으로는 저주를 퍼부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전의 그 기사 나리가 아쉬웠다. 보통 찾아오는 기사들은 돈도 없고 힘을 보일 생각도 없으면서 마을의 아낙네 치마를 들치거나, 마을의 식량을 축내며 눌러앉아 골치를 늘리는 게 대다수인데 그 기사는 꽤 달랐다.


건넌 마을의 생존자인 아이들을 무사히 이곳으로 데려와 주는 선행(善行)에다 황금과 술을 요구하지도 않고 머물 수 있는 집만 요구하는 정도의 아량. 더불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있는 갑옷과 손에 들린 흉흉한 무기까지. 외형만 따지고 본다면 어지간한 괴물은 단매에 때려죽일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안 그래도 에이나라는 아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 난리에서 고블린이란 고블린은 홀로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그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몇몇 농부들이 있었지만, 촌장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적어도 이 아이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현혹(眩惑)하진 않는 범주라고. 


그렇게 생각한 촌장은 기사가 보여준 행동을 보며 자신이 판단한 것이 옳았다고 믿었다. 농민들을 모아서 단번에 쳐들어간다는 막가파식 움직임으로 사람들을 부리지도 않았고, 손이 남는 일부에게만 유사시에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장애물을 마을의 골목에 배치하여 시간을 끌라는 현실적인 대책을 선택했다. 그것만으로도 촌장은 자신에게 운이 따른다며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랬었는데. 후, 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잠시 밖을 둘러보겠다며 말을 타고 나간 기사의 소식을 찾으러 나갈 수도 없으니 촌장 나름대로는 후의 일을 대비해야만 했다. 날이 밝는 대로 믿을 만한 사람을 추려서 모험가 길드에 의뢰의 대금을 날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일을 진행하려고 할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말의 울음소리에 모두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른거리는 횃불의 주위로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해가 지기 전에 말을 타고 나갔던 기사 나리였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속으로 촌장은 환희했다.



“뭣들 하고 있어! 기사님께서 마을을 위해 몸소 위험을 무릅쓰고 나갔다 돌아오셨는데 어리벙벙하게 있을 거야?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잠이나 자러 가!”

“예, 옛. 알겠습니다요.”



촌장의 윽박지름에 모두가 허둥지둥하며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려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든 기사가 이 마을을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손을 비비는 촌장의 모습은 마치 커다란 거래를 성사시키려는 상인의 눈빛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여자라도 들여야 하나 고민하던 그의 시야에 기사와 그 뒤로 달싹이는 난쟁이 비슷한 무언가가 보였다.


다들 눈이 껌뻑껌뻑 뜨였다가, 이내 비명을 질렀다.



“이, 이건 고블린 아닙니까?”

“그러게. 죽은 건가? 죽은 거겠지?”

“아이고, 진짜 그놈들이 여길 온단 말인가. 어쩌면 좋아!”



진지하던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온갖 고성이 오갔다.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시끄러운 시장 바닥을 듣기 싫은 기사의 기다란 마상 창이 땅을 두들겼다. 닥치고 조용히 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물리적 엄포에 다시 광장이 고요해졌다.



“여길 오던 놈들은 전부 처리했다. 안심해도 좋다. 당분간 놈들의 움직임은 없을 테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원한다면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도록.”



잠깐의 정적 후.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큰 고난이 지나갔다는 듯 안심하며 환호했다. 촌장도 겨우 숨을 놓을 수 있었다. 내일 아침이 되어야 정확한 결과물을 알겠지만, 일단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행복이었다.


그러던 와중, 기사는 촌장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 말의 내용을 파악한 촌장은 깜짝 놀랐다.



“어, 저……. 괜찮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자네의 눈에는 그게 정상이라고 보이는 건가? 한낱 어린아이가 자신이 안전은 도외시 한 채로 분노에 미쳐서 싸우러 가겠다고 악을 쓰는 게?”

“그, 그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시일이 지나면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붙여서 그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게 한다는 거지? 마을의 사제라도 데려와서 지루한 성경을 붙잡고 열심히 외우면 있던 복수심이 사라지기라도 하나? 잔말 말고 데려오도록.”



기사의 엄포에, 촌장은 딱히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 촌장은 사람을 불러서 에이나와 에단이 머무는 집을 찾아 그들을 데려오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졸린 기색을 보이는 아이들이 그의 앞에 도착했다.


기사는 안장에 달려 있던 검을 하나 꺼내어 아이의 앞에 놓았다. 에단은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모양새였지만.



“싸우고 싶다고 했었지.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



움찔, 하고 아이는 기사의 말에 심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졸린 얼굴을 비비며 눈을 치켜떴다. 몸은 떨고 있었지만, 아이의 푸른 눈은 변함이 없었다. 중증이군. 기사는 그런 아이를 보고 판단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아이가 지닌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을 거라고.


자신은 현대에서 상담사를 해본 적은 없었으나 사고로 인해 정신이 나간 사람들의 일화는 몇 번 들어봤다. 이대로 놔뒀다간 복수랍시고 기행을 벌이다가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혼자 남겨진 이 아이의 누이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놓이겠지.


그렇게 서 있는 에단의 앞으로, 기사는 잡아 온 고블린을 끌고 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혹시라도 몰라 힘줄과 혀를 잘라놓은 끔찍한 몰골이었다. 이전까지 발악하려다가 기사가 멈추지 않고 손을 봐준 결과였다. 숨을 헐떡이고 있지만 두 눈은 죽어있다.



“이놈이 네가 있던 마을을 습격한 고블린을 이끌었다. 너에겐 원수나 다름이 없겠지.”

“.......!”

“너는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마을에서 어여쁜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밭을 갈고 양을 치겠지. 그러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겠지. 이곳에 있는 농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이는 정확하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그 분위기만은 읽었다. 그는 자신에게 복수심을 풀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이건 소나 양을 잡는 수준이 아니다. 저들은 교활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다.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도 너는 네 안에 있는 화를 풀기 위해서 네 누이와 함께할 그 모든 날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아이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네. 포기하더라도 고블린을 죽일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하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너는 굳이 이 일을 하려고 몸을 던질 필요가 없다.”

“싫어요. 저보고 또다시 그런 일이 닥쳐서 무기력하게 있으라고 한다면 저는 싸우겠어요.”



핏발이 선 눈으로 기사를 쳐다본다. 적어도 앞뒤 가리지 않고 내린 결정은 아니다. 기사는 착잡했다. 소년의 표정은 그를 꽤 많이 닮아있었다. 얼음 왕관에서 저주받은 왕자를 잡으려 무슨 수든 쓰겠다는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도 굶주려 있으리라. 자신의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을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이용하겠노라고, 그 모든 감당은 자신이 지겠노라고. 그 일은 한창 앞날이 팔팔해야 할 소년에게 지독한 독기(毒氣)를 품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는 고민하다가, 검을 뽑아서 자루를 에단에게 내밀었다. 에단은 그것을 보다가 작은 손으로 확실하게 쥐었다. 기사는 준비가 된 모습을 보고 고블린을 가리켰다.



“복수는 확실하게 끝맺어라. 자비를 보이지 마라. 저들은 대화조차 성립하지 못하는 괴물이요, 너희의 꿈에서 나타날 악몽과도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용서하지 마라. 네가 당했던 그대로 갚아 주겠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단칼에 죽여라. 절대로, 오늘 일을 잊지 마라.”



기사의 위협적인 경고에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을 쥐어 고블린의 앞으로 다가갔다. 검날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몽롱한 고블린의 눈에 날카로운 단면이 비쳤다.



푹.

푸욱.

푹, 푹, 푹.


찌익.

끼르륵.

끅…….



무엇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