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안경잡이들의 대부분은 안경을 쓰지 않는다.

안경잡이가 안경을 쓴다는 안일한 생각은 버리는게 좋다.


안경이 사람을 쓴다.

안경을 쓰는 순간 안경이 본질이고

안경을 쓰지 않는 다른 모든 얼굴의 부위는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는데 가장 인상을 결정짓는 안경으로

눈을 가리면 당연지사 안경이 본질이고 얼굴의 나머지 부분은 부속품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예외가 있다면 엄청 못생긴 사람과 엄청 잘생긴 사람인데

어중간하게 못생긴 사람이나 어중간하게 잘생긴 사람은 안경을 쓰면

순식간에 외모가 못생기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어줍잖은 사람이 되어서

어중간하게 못생긴 사람과 어중간하게 잘생긴 사람은 피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형제가 된다.



물론 안경이 어울리는 얼굴형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개성이 될 수 있다.

안경을 쓰면 더 잘생겨 보이는 사람도 분명 있고, 안경을 벗어도 못생겼지만 안경을 쓰면

똑똑하게 못생겨 보여서 안경을 쓴게 더 나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경을 착용하는 대한민국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가 사무직 보다는 단순노동을 많이하고 공부 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육체 노동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후진국 파라과이의 국민이였다면 분명히 안경을 쓴 나는 개성있는 사람이였을 것이다.


근데 느그나라에선 개나 소나 안경을 쓰고 다녀서 개성이 될 수 없지

나는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외모지만 특유의 개성은 분명히 있어

더 엄밀히 따지자면 대부분의 사람이 아름답건, 못생기건, 중간이건 다 개성은 있어

근데 안경을 쓰는 순간 그냥 평범한 무개성 안경남이 되지


설령 못생겼더라도 몰개성하게 못생긴 것과 개성있게 못생긴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개성은 단지 이목을 끄는 특성이 아니라 내가 나로써 존립하게 만드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깥에 나가서 안경을 쓴 남자들을 볼 때 마다 나와 외모가 너무 똑같아서

도플갱어를 볼 때에 그 공포감을 느낀다. 나 자신이 한 사람이 아니라서 독립적 개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위협 받고 나라는 개인은 없고 우리라는 개체만이 존재하고 나는 사회의 톱니바퀴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그런 근본적인 공포감이 발생한다.


나는 바깥에 나갈 때에 렌즈를 끼고 나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렌즈를 낀 상태에서 안경을 낀

사람을 봐도 똑같은 공포감을 느끼는데 집에서 거울을 볼 때 집에서도 안경을 끼기 때문에 자신의

안경 쓴 얼굴이 각인되서 렌즈를 낀 상태에서도 자기자신의 안경 쓴 모습이 투영되는 것이다.


답은 시력교정술인거 같은데 부작용이 심하다면 비싼 돈을 들여가면서

서울대 병원에서 해야할 정도로 가치있는 수술인거 같은 이건 나라는 개인의

정체성을 찾는 중대한 문제임 


나는 시력교정술을 받는 순간 안경을 위해 살고있는 안경 부속품에서 

진정으로 한 사람의 개인이 될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