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교재로 다뤘던 책인 위 제목의 책(1996, 번역 2012)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함.


마이클 샌델은 한국에서는 대중적 수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로 기억되는 사람이지만, 막상 그 책은 다양한 정치철학적 입장들을 소개하는 것에 가깝지 마이클 샌델 본인의 고유한 내용은 거의 들어있지 않음. 하지만 샌델은 존 롤스 비판을 비롯해 현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의 공공 담론에 대한 비판으로 이름을 얻었으며, 나름의 공동체주의적 입장이 확고한 사람이기도 함.

이 책 또한 미국의 현재 공공 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검토하는 내용. 미국에서 형성된 민주주의 제도틀이 사실상 전 세계의 민주적 정치체제의 근간이 된 만큼, 미국의 맥락 밖에서도 충분히 유효한 지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함.


오늘날 우리는 (이념형으로서의) 민주주의 시스템 하에서 살고 있는 셈이지만, 두 가지 불만점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지적함.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자치의 문제)이며, 두 번째는 공동체 그 자체가 존재감을 잃고 점차 약화되어 간다는 것. 그럼에도 오늘날의 주요한 정치 의제는 이를 다루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비판함.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공공 영역 철학(공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시민과 그 시민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가정)의 문제라고 봄. 


오늘날의 사회는 절차적 공화정이라는 공공철학에 기초해 있으며, 이는 자유주의적 정치 이론의 한 유형임. 절차적 공화정이란 시민들이 지지하는 "도덕적 내지 종교적" 견해들에 대해 정부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핵심으로 하고 있음. 또한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개념화가 되어있음. 따라서 사람들이 각자의 최선의 삶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존중하여, 정부는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해서는 법으로 명문화해서는 안된다는 양상으로 이어지게 됨. 이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의 권리 체계를 정부가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임. 샌델은 그렇게 됨으로써 공동체 윤리와 자유가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 되어버렸다고 인식함.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공화주의적 정치관은 정치가 시민들의 덕성을 만들어내야 하며, 폴리스의 목적은 "좋은 삶"에 있었음(arete, 즉 미덕을 발휘하는 삶). 그리고 이는 자유를 자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함(뭔가에 의존하거나 예속되지 않는 것을 중시하는 자유). 반면 선택의 자유를 중시하는 현대의 자유주의적 자유관은 최상의 목적이나 시민의 도덕성을 자유와 결부시키지 않음.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관용, 공정한 절차, "가치를 선택할 자유"에 있으며, 정부는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는 존재임. 도덕과 가치판단은 공공영역에서 "괄호 쳐지는" 존재가 되며, 주관적인 것으로서 서로가 옳은 것으로 취급되는 도덕적 상대주의로 흘러가게 됨. 하지만 샌델은 도덕적 상대주의를 통해서는 자유주의를 떠받치는 원칙들조차 상대주의의 잣대가 적용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긍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의 중립/관용이 가치판단을 배제할 수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표함.

상대주의 외에도 자유주의적 정부의 중립성 명제를 지지하는 것을 시도한 논증은 공리주의적 명제와 칸트적 명제가 있음. 공리주의적 명제는 보편적 복지의 극대화 논리에 의해 중립성 명제를 지지하는 것을 골자로 함. 국가는 시민들에게 국가 자신의 선호를 강요하게 되면 공리의 총합을 감소키길 것이라는 것이 핵심.그러나 모든 가치의 내용을 판단할 필요 없이, 그저 합산 가능한 대상으로 취급하기에 가치의 고상함과 천박함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며, 이것은 관용이 아니라 탄압(콜로세움에서 사자와 싸우는 노예들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예)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비판함. 이는 타인의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을 막아줄 수 없으며, 따라서 샌델은 공리주의적 논증이 자유주의의 중립성 명제를 지지할 수 없다고 논증함.


칸트적 명제는 공리주의적 명제가 사람들 간의 차이, 다양한 욕구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봄. 또한 복지의 총량에만 관심을 가지고 분배에는 무관심하다는 점도 문제로 꼽음. 그 대신 칸트적 명제는 각각의 개인들이 목적 그 자체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입장에 있음. 이는 개인에게 그 개인의 밖에서 유래하는 목적들을 거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굉장히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샌델은 이를 칸트적 명제가 "무연고적 자아"를 가정하고 있다고 정리함. 이 이론적 입장을 극단으로 끌고 가면,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부정하고 헌신하고 싶은 집단과 그 집단에 대한 의무는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됨.

당연히 이것이 공공 수준에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이 입장은 "좋음(the good)"과 "옳음(the right, 여기에는 당연히 "권리"의 의미도 같이 들어가 있다고 읽어야 함)"을 구분하고 "좋음"보다 "옳음"에 우선권을 주는 입장임. "좋은 삶"에 대해서는 각자가 선택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국가가 우선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것은 "옳음, 권리"의 영역이며 이것이 "좋은 삶, 공공선"이라는 개인을 넘어선 외부적 목적에 의해 제약되어서는 안됨. 물론 이 경우 어떤 권리가 기본적 권리이며 중립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정치적 장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을 굉장히 크게 갈림(오늘날의 주된 정치적 좌/우는 결국 공통적으로 이 칸트적 논증을 전제한 상태에서 그 세부적인 입장 차라고 이해하면 됨).

샌델은 칸트적 명제가 "욕구와 목적들에서 분리된 자아"라는 점을 밝히고, 이것이 심지어 스스로가 추구하는 목적들에서도 독립된 자아를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함. "텅 빈 자아"의 가치는 자신이 선택하는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을 선택하는 나 자신"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 이러한 인간관은 애착을 가지지 않는 집단에 종속되지 않는, 무한히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매우 강력한 해방적 전망을 제시하기에 강력한 호소력을 지닐 수밖에 없음. 모두가 자유롭다는 언명에서는 심지어 내가 지지하는 것이나 인종과 같은, "개인이 가진 속성"들마저 초월하는 평등한 개인을 연상시킴. 자유주의 국가의 법률은 따라서 어떤 삶이 더 도덕적인지를 판단,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선택한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들의 체계를 제공해야 하는 존재로 상정됨.


그러나 샌델은 이런 무속박적, 무연고적 자아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전혀 이해,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함.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속해있는 집단에 대한 연대감이나 의무는 우리들의 삶에서 실제로 존재하며 사람들은 여기에 곧잘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데, 이를 하등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은 사람들의 도덕적 경험의 상당 부분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라고 보는 것. 샌델의 이런 인식은 우리가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그저 계약론적인 방법으로만 기술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기도 함.


하지만 위에서 장황하게 언급된 철학적인 논증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유주의적 정부의 가치중립 의무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음. 이를 일컫는 "최소주의적 자유관"은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도덕적 의무를 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공공 영역에서는 이것을 "괄호 치고" 담론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임. 이렇게 해야만 객관적 개인의 이해관계가 똑같이 옹호될 수 있으며 각자의 입장차에 기반한 논쟁을 하지 않고도 사회적 협력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진다는, 다분히 실용적인 목적에서 기인하는 것. 철학적 기반이 필요없는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런 입장은 "시민(정치적 신분으로서의 시민)" 정체성과 "인간(자연인)" 정체성을 분리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며, 정치와 도덕을 분리할 수 있다는 가정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함.


그러나 샌델은 공동체가 도덕적 관념마저 괄호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함. 종교, 언론과 표현의 자유, 낙태 논쟁과 같은 매우 민감한 문제들에서 관용만을 옹호하며 그 내용을 괄호치는 것은 사실 서로 경쟁하는 교의 중에 어느 한쪽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에 의존한다고 지적함. 이는 관용 그 자체에 대한 옹호와, 관용되어야 할 도덕적 가치에 대한 판단이 분리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제시한 것이기도 함. 만약 정치적 합의를 위해 가치판단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이는 정치 담론을 황폐화하고 자치에 필요한 시민들의 정치, 도덕적 자원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함. 도덕과 종교를 철저하게 "괄호 치는" 정치는 정치적 생활에 대한 환멸을 초래하며, 민주적 사회의 도덕적 에너지를 하나도 담아내지 못하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


하지만 역사적으로 "자유"가 언제나 이런 의미는 아니었다고 함. 고대 그리스의 공화주의적 전통 외에도, 미국 역사 초기에는 공화주의적 발상이 보다 우위에 있었음. 오늘날의 정치적 논쟁은 번영과 공정성에 대한 논증, 즉 경제성장에 이바지하던가 더 공정한 분배를 만들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초기의 미국의 정치가들은 사회정책이 "독립적인 시민"을 길러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를, 즉 시민 형성의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본 역사가 있음. 

가령 재퍼슨은 소농업, 소상공인 위주로 구성된 사회를 옹호하면서, 각자의 기반을 가진 소박한 시민이 덕을 길러낼 것이며 대규모 제조업은 독립성이 침해되는 임금노동, 부패와 타락을 만들어내 시민적 덕성을 키울 기회를 박탈당할 것이라고 인식하기도 했음. 그리고 그 생산 결과물들을 적극적으로 판매하기 위해서 국제무역의 증가와 강한 연방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어짐. 반면 휘그당 계열은 그 결과 발생할 행정권력의 집중이 자치를 해칠 것이라고 생각했음. 이들은 각 주의 자치를 강화하는 방향을 추구했음. 어느 쪽의 입장이던, 경제정책을 자치에 적합한 시민을 길러낸다는 관점에서 바라봤다는 점에서는 초기 미국 민주주의의 형성적 공화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음. 그 외에도 임금노동과 노예노동의 문제, 소비자주의와 반트러트스, 반체인점 운동 등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함. (그리고 이런 공화주의적 기획들이 어떻게 점차 역사적으로 사라져 갔는지도 다루지만 여기서는 생략)


위에서 보는 것처럼 공화주의에서의 "자유"는 자치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인식함. 자치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고, 공익에 대해 숙고하게 됨.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신을 넘어선 타인의 권리를 비롯한 공익과 전체에 대한 관심, 문제에 직면한 공동체와의 "도덕적 유대"를 반드시 요구하는 것이기도 함.

당연히 이렇게 높은 수준의 참여를 하기 위해서는 개별 시민의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이 필요하며, 공화주의적 정치는 시민들이 지지하는 각자의 가치와 목적에 대해서 중립적일 수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시민적 덕성을 가진 시민을 만들어낼 수 있는 형성적 정치(formative politics)가 요구되는 것이기도 함. 이 형성은 단순히 교육기관을 통한 교육만이 아니라, 정치 과정을 형성하는 데에 참여함으로써 시민적 덕성을 쌓아가는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함. 여기에서 상정되는 "자유로운" 시민은 공동의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토론하고 문제 해결에 참여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시민임.


당연히 절차적 자유관은 이런 자치를 창출해낼 시민적 자원은 하나도 보장해 주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공공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무력감을 전혀 다루지 못함. 이는 무연고적 자아 개념에서 느껴지는 환상적인 수준의 해방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실제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며, 자유에 필요한 조건조차 만들어주지 않아 공공 영역에서 토론에 참여하는 개인들을 제거해 버린, 무력한 시민들만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샌델이 가하는 자유주의적 자유관에 대한 주된 비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