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총장 선출 과정에서 내정자 문제로 곤혹을 겪었던 학교가 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대학이다)

그 학교는 이미 수년 전, 남양주 캠퍼스 신축과 관련해 수많은 잡음이 발생하고, 재단의 시스템적인 문제가 낱낱이 드러난 바 있었다.

심지어는 그 싸움에 참여한 학생 측 논객들이 정성들여 '재단문제백서'를 작성하고 배포한 적도 있었는데

(백서라는 개념이 어색한 사람들도 있을텐데, 보통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인과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또 알리는 목적으로 쓰인다.)

그것은 이미 그 학교 학생들에게 '로스트 테크놀러지'가 된 지 오래였다.

정치적 투쟁을 성공시키려면, 가장 적당한 프레임을 파악하고, 논리적이고 조리있게 글을 쓰고, 자체적인 시스템 안에 문제의식을 계속해서 고양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87년 민주화, 5년 전의 촛불집회를 제외하면 청년 집단에서 그러한 모험이 성공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사실은 촛불집회도 청년들이 주도했다고 보기 어렵다. 청년들이 시작했지만, 386세대가 끌고 나갔다. 그런 운동이었다.)

왜일까?


청년들은 시스템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다.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민주적이지 못한 편이다. 물론 직선제 헌법이나 높은 정치적 관심은 좋은 신호지만, 그것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모든 구성원이 시스템의 작동에 책임을 가지고 기여해야 완성된다.

예를 들면, 서울시 쓰레기 처리장 문제에 대해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사회가 형성됐다고 해 보자. 서울시는 행정적인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할 것이다. 이에 대해 비리, 책임회피 등 문제해결을 위한 협업을 방해하는 요소가 나타나지 않도록 시민 모두가 이 상황을 주의깊게 지켜봐야 한다. 이것이 이상적인 풀뿌리 민주주의의 모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떨까?


시민사회는 문제해결을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또다른 기득권을 얻기 위해 작동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세대는, 정작 그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작동할 기반을 닦는 데에는 실패했다.

우리나라 청년은 어른 세대에게 잡혀 산다. 새로운 담론을 개진할 힘도, 청년만의 사회를 형성할 힘도 없다.

새로운 담론은 사회를 지속적으로 혁신,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불가사리 제설제, 폐마스크 의자 등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사회에는 청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러나 어른은 청년들의 불꽃을 앗아갔다.

민수가 빼앗긴 불꽃은 학부생활 내내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힘으로 쓰였다.


앞선 총장 내정자 문제의 진행경과를 살펴보면,

4개의 학내언론사 중 사태 초기부터 지속적인 이슈메이킹에 성공한 언론사는 하나밖에 없었다.

언론사나 학생회의 노동력은 보통 학교생활에 가슴이 들뜬 새내기들이 많이 기여한다.

어머니 같은 386세대와 대화해볼 일이 많다. 그럴 때마다 항상, 그 로망과 불꽃에 대한 차이점을 느낀다.

어머니는 집값 문제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겪고 계신다. 하지만 그건 어른들의 문제가 아닐까?

요즘은 그나마 불꽃을 가진 386세대도 자기 힘이 부친다는 걸 느낀다.

그들은 어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자신 가슴의 불꽃을 사회에 봉헌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386세대와 개발독재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개발독재는 우리나라의 어둠이다. 박정희가 죽었다고 어두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새 어두움에 맞설 시간도 부족한데 아직도 박정희를 잡지 못해 매달리는 우리나라.

새 세대를 위한 정치지형의 변혁은 언제쯤 우리에게 도래할 수 있을까? 

시민사회와 새로운 담론에 대한 풀뿌리 민주주의가 청년들의 것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괴물》 OST - 한강 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