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야기


이 방을 떠나기 전에 약속해 주세요

창 밖의 이팝나무와 팬지에게

숲 속의 단풍나무와 복수초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봄이면 보라빛 슬픈 팬지의 향기에서

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여름이면 차갑고 소복한 이팝나무의 꽃을 들으며

영원한 사랑을 떠올릴 수 있도록


가을이면 회한이 담긴 채 떨어지는 단풍을 보며

추락하는 삶을 떠올릴 수 있도록

겨울이면 그리움으로 타는 노란색 복수초를 어루만지며

결국에는 비극이 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저를 그리워해 주세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잊지 말아주세요



그동안 저는 온 세상을 여행할 거예요

세상을 떠돌아 다니며

발길이 닿는 곳마다 깊은 뿌리를 내리며

온갖 나무, 새, 풀벌레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을거예요


그동안 저는 모든 사람을 만날 거예요

지나가는 사람마다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계절의 위로를 건낼 수 있도록

세상 구석구석에 퍼질 거예요


이 모든것을 마칠 때

당신에게 돌아가겠어요

모든 사람들의 감정과 모든 것들의 이야기를 안고

당신 앞에서 한 송이의 꽃으로 피어날게요


딱 그때까지만

저를 그리워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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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봄의 산은 붉게 타오른다


온갖 생명은 붉게 타버린 과거를 딛고 일어서

푸른색 생기의 향을 풍기며 만개한다


척박한 푸른색 얼음으로 덮여있던 산은

붉은 의지로 다시 한 번, 밝게 타오른다


존재는 존재에게 위로의 인사를 건내고

그래서 화산은, 푸른색, 붉은색으로 작열한다


외로운 암향이 지고, 절정에 이르렀을 때

치유받은 영혼들이 모여 붉게 피어날지니


봄의 산은 붉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