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판결의 시간이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는 내 선택이 옳바른 것이였는지 의문이 든다.


삶의 풍파에 찌든 얼굴을 한 나의 국선 변호사는 지금도 한숨을 쉬며 안타깝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저로 인해 평생을 일궈낸 삶의 터전을 잃은 코바야시 부부와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을 그들의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낍니다."


"알겠습니다. 

판결 내리겠습니다."



번들번들하게 손때가 묻은 의사봉에 손을 뻗어가는 판사를 보며 후회감이 밀려왔다.



나는 결국,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른 족쇄를 택할수밖에 없었던 것이였다.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좋은 남편은 아니였던것 같다.


구애도 그녀가 먼저 했었고... 집안의 큰 일은 대부분 그녀가 처리했었다.

지금 사는 집, 내가 타는 차, 내 면도크림까지...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것은 내가 그녀에게 청혼하던 그날 밤 밖에 없었다.



그래도 처음엔 좋았는데...


처음 머나먼 이국땅으로 발령받아 정신없이 지내던 나날

아직 이방인이던 나에게 손을 뻗어주었던 것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녀가 처음이였다.


...따뜻하게 날 안아주던 그녀의 품 안에서 한심하게 울음을 터트렸던것은 그녀와 만난지 2주째 되던 날이였던것 같다.



"많이 힘드셨겠군요. 월세 사기까지 당하시고... 그럼, 당분간 지내실 곳은 있으신가요?"


"...아뇨. 일단 싼 숙박업소 한군데 잡아서..."


"어머, 그러시면 큰일나요! 돈이 모이고 다른 방을 구하실 때 까지, 한동안 제 아파트에서 같이 지내요."


"예? 아, 아무리 그래도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를 들이시긴 좀..."


"에헤이~ 어차피 방도 남는걸요? 아, 물론 공짜로는 안받아줄거에요? 식비는 내셔야겠죠?"


"무,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그때는 전화위복, 내 인생에도 이런 날이 있구나 싶었다.

볕 좋은 토요일 아침, 그 카페에서 나는 엄청난 행운을 마주쳤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말이죠? 마침 그 돼지가 자리로 돌아왔는데..."

"정말요? 표정이 상상이 가네요, 하하하!"


잠시간 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어느덧 그녀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지 3개월이 조금 넘었을 금요일 밤이였다.


여자라곤 엄마밖에 모르던 나였기에, 종종 욕실에서 젖은채 나오는 그녀와 마주칠때 라던가, 가사일을 도우려고 세탁실에 갔을 때 그녀의 속옷을 봤을 때 라던가...

지금처럼 그녀와 소소한 파티를 벌일 때 찰랑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샴푸와 바디워시 냄새, 그리고 민소매 티와 짧은 바지로 다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는...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것이였다.



"그쵸? 히끅! 얼굴이 시뻘게 지더니... 아...?"


맥주 세캔을 연달아 들이붓던 그녀가 현기증에 휘청거렸을 때, 얼떨결에 그녀를 잡은 나는 상상도 못했던 부드러움에 잠시 넋이 나갔었다.


"혜린씨 취했어요. 오늘은... 그만 마시죠?"


그 때 그녀가 내 목을 감싸오면서 내 입술에 묻은 맥주를 핥았을 때, 나는 사고가 정지했었다.

그런 나를 본 그녀는 요염하게 헤실헤실 웃더니 곧 입술을 겹치고 혀를 얽어오는 것이였다.

당황한 내가 그녀를 살짝 밀어냈을 때였다.


"혜, 혜린씨?"

"하아... 태환씨는 정말 눈치가 없어요... 으응? 한집에 사는 여자가 이렇게까지 유혹했는데... 설마? 아, 고자는 아닌것 같은데에...?"


그 날 이성의 끈을 끊은 내가 그녀에게 손을 댄 후부터, 우리는 말 그대로 타오를듯 뜨거운 연애를 시작했었다.










...


"나, 여기서 이룬게 많아요."

"응."

"태환씨, 이제 일년에 일주일이나 한국에 가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몰라요."

"응."

"...국적도 바뀌고, 평생 여기서 내 옆에서 지내야 하는거에요."

"응."

"...그것밖에 말 못해요?"

"아니, 혜린씨 사랑한다는 말도 할 수 있어."

"...나, 욕심도 많아서... 태환씨 절대 안놓칠 거에요."

"난 욕심이 없으니까 혜린씨 하나로 만족해."

"히히히..."


현관 앞에서 돌아오는 그녀에게 청혼했던 그날 밤, 그녀가 그대로 나에게 달려들어 한바탕 격렬한 정사를 나눈 후, 둘이 눕기도 좁은 소파 위에서 내 품 안에 파고들면서 실없는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태환씨, 저 지금 행복해요..."

"난 혜린씨 만났을때 부터 행복했는데... 나만 그랬던거야? 좀 슬프네..."

"히히... 근데 저 이제 이름은 어쩌죠? 일본 이름 쓰던거를 아예 한국식으로 바꿔야하나... 어렸을때부터 쓰던거라 익숙해지기 힘들거같은데... 책임져줘야해요?"

"설마, 그것만 책임지겠어?"



깔깔대며 내 체취를 듬뿍 들이마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때는 정말 행복했었다.


우리는, 그녀의 바램대로 우리 단 둘만의 자그마한 결혼식을 치르고 혼인신고를 한 뒤 부부가 되었다.









...







"이사... 가신다고요? 이렇게 갑자기?"


"어... 딸내미 앞으로 자꾸 이상한 소포가 와서 말이야. 

경찰에 신고도 해봤는데, 이놈이 요즘 활개를 치는데도 도저히 잡지를 못하겠다고 하더군. 무능한 새끼들..."


"아쉽네요. 거기서도 잘 지내실 거에요."


"그럼! 자네도, 부인한테 무슨 일 생기면 그냥 이사가버리라고. 요즘 분위기가 안좋아."


"안그래도 요즘 좀 고민이에요... 말은 해봤는데 다른데로 가기는 좀 힘든 모양이라..."


"저런... 그럼 다음에 봅세."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숨을 쉬며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좋은 이웃 한명을 보내야 한다니...


최근들어 동네에 20대에서 30대 여성에게 협박편지나 동물 시체를 보내는 미친놈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분위기가 흉흉했다.

다행히 아내에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자기, 어디 갔다와요?"

"잠깐 편지 온거 있나 확인하러."


쪽. 

그녀와 작은 입맞춤을 나눴다.


"요즘 이상한 소포를 받는 여자들이 많나봐. 

쥐 시체라던가 피범벅이 된 베개라던... 어? 어디 다쳤어?"

"별거 아니에요. 양파 자르다가 좀 베였어요."

"그래? 당분간 식사는 내가 만들테니까 가서 좀 쉬어. 알았지?"


우리 남편 최고 를 외치며 볼에 입을 맞추는 그녀를 보고, 나는 흥얼거리며 아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흐음... 어디보자. 베이컨은 잘 볶아져 있고... 수프만 적당히 더 끓으면... 응? 양파를 아예 다져서 넣었나? 양파맛은 안나는데..."












...

"응, 자기도 점심 맛있게 먹어~

...뭘 그렇게 봐 임마."


"오우, 뜨겁다 뜨거워! 누가 보면 아직 신혼인줄 알겠습니다? 벌써 4년이나 되셨는데?"

"4년이면 아직 신혼이지 뭐."

"하...! 옆 부서 하나사키 주임 못보셨어요? 결혼 3년차인데 벌써부터 각방 쓴다잖아요. 그에 비해 선배님은 한시간에 한번씩은 아내와의 애절한 전화 한통으로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을..."

"...점심이나 먹자고."


[오늘 새벽 5시, 교외의 야산에서 젊은 여성이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몇일 전 실종된 A양으로 밝혀졌으며 경찰은 유서가 발견된 점을 고려해 그녀가 자살한것으로 보이나, 유서의 내용을 봤을 때, 오랫동안 심한 수위의 협박을 받아 이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으로...]


"어우, 안타깝네요. 아직 한참 예쁠 나이인데..."

"무슨 부장님처럼 말하는데, 미유베 너도 아직 20대다? 너도 아직 한참 예쁜 20대 아가씨라고. "

"그렇게 말하는 선배님도 아직 30대 초반이면서. 그리고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저 뉴스의 당사자 같잖아요..."










...



"나 일주일 정도 서울로 출장가."


"진짜요? 저도 마침 회사에서 5일정도 서울에 출장 가달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우연이 있나. 


"그래? 그러면 같이 지내면 되겠다. 잘됐네."


"그러게요. 출장 간다길래 잠깐 덜컥했지 뭐에요. 나, 자기 없으면 하루도 못사는데~"


"하하, 나도 혜린이 없으면 하루도 못사는데~"








...




"...미유베? 미유베냐? 야, 너 왜 요즘 출근을..."

"선배님무서워요살려주세요그여자가계속지켜봐요저도그때그여자처럼되버릴거야싫어살려줘싫어싫어싫어... 꺄악! 오지마!!! 안... 선"

"미유베? 미유베? 야! 야! 끊지..."









...



"굳이 자기가 갈 필요 있어요?"


"뭐, 그래도 부하직원이였으니까... 내가 그렇게 높은 자리는 아니긴 했지만."


"그러니까, 부장급 되는 사람이 대표로 가도... 자살이라 좀 꺼림칙한데..."


"그래도 동료였으니까... 갔다올게."


"...네."



지금 생각해보면, 넥타이를 메주던 그녀의 눈에 생기가 없었던것 같다. 






...




나는 어느순간 그녀의 집착을 깨닫게 되었고, 내가 몰랐던 그녀의 이면과 행동들을 하나하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 인생의 구원과도 같았던 그녀를, 나는 차마... 


그렇다면, 그녀가 나를 떠나게 하면 어떨까.


...



홀로 편의점에서 맥주캔을 홀짝이던 나는 다른 동료의 집이 여기서 가깝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예, 피고인은 당시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다곤 하지만, 편의점에서 라이터를 구매하고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사가는 등, 계획적으로 범행을 실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피해자는 집을 잃고, 어린 아이는 3도화상을 입고 현재도 치료를 받고 있죠."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기름을 붓고 라이터를 던진 그 순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이였다.



어쩌면... 그때 그녀에게 청혼했을 때 부터...




"그러나, 사망자가 없다는 점, 피해자에게 치료비용과 주거지 복구 비용, 그리고 그동안의 주거시설과 추가적인 기타 비용들, 보석금까지 모두 지불이 마쳐진 점..."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법정에 제출한 정신과 진단서에 의하면 또 피고인의 심리상태는 매우 불안정 하고 스스로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는 점..."



잠깐...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충격으로 잠시 상담을 받았던 적은 있다.

근데 그게 그런건 아니였는데?



"피해자 가족이 선처를 바라는 점, 방화를 일으키고서도 곧바로 큰 소리로 화재를 알려 깊게 잠 든 피해자이 대피할 수 있게 한 점, 스스로 화재를 신고하고 방화까지 신고 한 다음 현장에서 체포되었던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예. 본 법정은 피고인에게 가택연금 36개월을 선고합니다."


아니야... 이럴리가 없어.

"이, 이건 뭔가..."

"아, 아니야! 으아아악!"










...




"내리시죠. 자택에 도착했습니다."

"...여긴 제 집이 아닌데요 경관님."

"아뇨, 여기가 맞습니다. 내리시죠."



나와 그녀가 살던 집은 마당은 커녕 억지로 주차장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법한 공간만을 마련해놓은 자그마한 주택이였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곳은 뭔가?


...거대한 일본 전통 장원...?




"아! 어서와요 자기. 얼굴이 반쪽이 됐네... 얼마나 고생이 심했으면... 어서 들어가요?"


정장을 빼입은 그녀의 팔이 나의 팔을 감싼다. 


그녀가 이끄는대로 장원 안에 들어서자, 차마 사이즈를 물어보기가 무서울정도로 흉악해보이는 떡대들이 억지로 정장을 빼입은 채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떡대들이 우렁차게 외치며 우리를 향해 외쳤다.

귀가 먹먹했다.


"혜, 혜린씨...? 이게 무슨...? 저 사람들은 누구에요?"


"응, 그냥... 제 부하직원들? 정확히는 아버지의 부하직원이라 해야하나? 음, 잘 모르겠네요? 뭐, 그래도 요즘은 내가 실무 보는게 많으니까 내 직원이라 해도... "



맑게 웃으며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오는 그녀에게서 익숙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기가 났다.

...내가 아는 그녀가 맞았지만,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니였다.


"자, 저쪽으로 가요~"



그녀에게 이끌려 장원 구석에 있는 건물에 들어섰다.

외관은 일본 전통 건물인데도, 내부는 현대식 시설이 싹 들어서 있는... 그래, 딱 우리집같은 크기에 우리집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는 건물이였다.


"저기, 혜린씨? 저거는...?"


"아, 저거요? 태환씨가 '불안정한' 상태면 쓸려고 준비해놨던건데, 아무래도 괜히 준비했나봐요~ 나도 참... 나이 먹는게 느껴지죠? 괜히 주책만 늘어선~ 유스노리, 치워."


"옙!"


나는 다섯명의 떡대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낑낑대며 쇠사슬과... 차마 뭐라 설명해야할지 모를 구속장치들을 치우는 모습을 바라만 봤다.


"정말 놀랐어요. 태환씨가 구속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땐... 말했잖아요. 난 태환씨 없으면 하루도 못산다고... 태환씨도 그랬죠? 그래서 이렇게 수척해진거죠?"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나를 이끌고 화려한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 앞에 힘으로 눌러 앉혔다.

예전엔, 병뚜껑 하나 못열겠다고 나에게 부탁했었는데...



식사를 대강 마치자, 그녀는 나에게 병 하나를 내밀었다.


"자, 이것도 쭉 들이켜요."


"이게... 뭐야?"


"아이 참... 그냥 마셔요..."


나는 그녀에게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아직 뒤에 서있는 두 덩치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것을 느끼고 그녀가 건네주는 작은 병을 쭉 들이켰다.

엄청나게 쓴 맛이 났지만, 억지로 참고 목구멍 너머로 겨우 넘길 수 있었다.



"자기, 요즘 불안하고, 힘든거 알아요.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어서 그런가봐요... 

그동안은 저도 '사업'이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고, 자기에게 들러붙는 벌레들 신경쓰기도 힘들어서 꾹 참았지만...

마침 잘됐어요. 가임기도 가깝고..."


"혜, 혜린아...?"


하복부와... 가랑이 사이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내 목 뒤로 팔을 감아오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살얼음 같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여태 들어본 적 없는 살벌한 목소리였다.



"왜? 니들 장례식때 병풍대신 프로젝터로 띄워줄까? 그렇게 보고싶어? 당장 안꺼져?"


두 떡대는 덩치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황급하게 방을 나섰다.



"자, 이제... 느긋하게 시작할까요? 아직 3년이나 남았으니까, 우리, 셋째까지 천천히 만들고... 히히, 부끄러워... 생각만해도 좋아... 사랑해요 태환씨..."




내가 벗어나고자 했던 족쇄는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너무 크고 단단해서 

아무래도 영영 벗어날 수 없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