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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https://arca.live/b/yandere/8221543?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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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공시생 1편: https://arca.live/b/yandere/8297847


면목 없다. 늦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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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언제나 걸어왔던 길이지만 유난히 짧게 느껴진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옆에서 걸어가는 남편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나보다도 훨씬 크고 따듯한 손. 남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다시금 내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왜 이런 것들을 잊고 살았을까...'


이전 생에서도 함께 이 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 부모님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남편과 손을 마주 잡은 채 이 길을 올랐다.


"내 딸...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나?"


그렇게 묻는 아버지의 말에 남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었다.


"네,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아껴주겠습니다."


 오직 나만을 사랑하겠노라 말하던 남편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짜릿한 기분과 함께 아랫배가 아려왔다. 나는 이게 무슨 신호인지 잘 알고 있다.


아이.


내 몸이 이 사람의 아이를 원하고 있다. 순결한 내 안을 남편의 분신이 난폭하게 찢고 들어왔으면 좋겠다. 내 귓가에 사랑한다 말하며 내 몸을 탐했으면 좋겠다  그러다 끝내는 나를 숨 막힐듯 끌어안고 내 안을 가득 채워줬으면 좋겠다.


아이.


 부부 간의 사랑의 결실, 신이 내린 축복이자 기적 그리고... 남편을 붙잡을 보험. 모든 준비는 끝났다. 가임기에 퇴원 날짜도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신 날로 골랐고, 남편의 일정도 전부 체크해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을 위한 '약간의 준비' 까지 마친 나는 어느새 도착한 집 문을 열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집까지 바래다 줘서 고마워. 기왕 온 건데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 내가 타줄게."


남편은 내키지 않는 기색이다.


"학과에 일이 있어서 가봐야 될 것 같아.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거짓말. 남편은 옛날부터 거짓말엔 영 소질이 없었다. 뻔히 보이는 얕은 수로 상황을 회피해보려는 남편이 귀여워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한다.



"미안... 미안해. 나도 이러면 안되는 거 아는데, 집에 혼자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자연스럽게 말끝을 흐린다. 손은 불안한 듯 옷 자락을 말아 쥐고, 눈물을 글썽인다. 완벽해.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갈등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종종 선배가 나타나는 악몽을 꿔..."


선배의 얘기를 꺼내자 남편이 눈에 띄게 동요하는 것이 느껴진다.


"1시간 뒤면 부모님 도착하시니까, 1시간만 같이 있어줘 부탁이야... 응?"


결국 남편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는 남편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무겁게 깔리는 침묵.


"저기..."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반드시 전하고 싶었던 말. 그동안 벼르고 별러 왔던 말. 입가에 침이 마른다.


"얀붕아 나... 정말 고민 많이 했어.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남편의 조금 놀란 표정이지만 아직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용기를 얻은 나는 얘기를 이었다.


"전에... 그러니까 우리가 부부일 때 난 내가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해왔다고, 내 젊음과 자유를 낭비했다고 생각했어. 억울하고 화가 났지. 그게 이기적인 생각이었던 걸 그땐 몰랐어. 너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걸 알려고 하지 않았지. 하지만 이젠 알아. 네가 가족들을 위해 베푼 희생, 사랑에 대해 꼭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다시금 찾아올 정적이 두려워 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남편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런 생각을 했구나." 


"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담백한 반응에 얼이 빠진다.


"그... 그럼 나 용서해 주는 거야?"


"응, 용서 할게"


"정말?! 고마워 용서해줘서 정말 고마워 얀붕아! 내가 이제부터 진짜 잘할게!"


역시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거와는 달랐지만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금 남편과 꾸릴 행복한 결혼생활을 상상하며 행복에 잠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부터 잘한다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남편의 표정을 보자, 나는 소름이 끼쳤다. 머리에 문득 든 생각을 애써 떨쳤다. 


"너랑 나, 우리 다시 시작해야지. "


떨리는 목소리로, 쥐어 짜내듯  말했다.


"하... 저기 얀순아..."


남편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나는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매일 네 병문안을 갔던 건  그냥 죄책감 때문이야."


그만둬.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이 다쳤으니까."


나를 다른 사람이라고 부르지 마.


"우리가 다시 젊어지고 나서 한 삼 개월은 너를 잊지 못해 괴로웠지.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어느 정도 무뎌지더라."


나에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줘.


"난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우리가 함께할 일은 이제 없어."


마치 사형 선고처럼 떨어진 그 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마치 발 밑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안돼, 여기서 포기해 버리면 안된다. 아직 비장의 수가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알았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다.


"벌써 1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 나 이만 가볼게."


"커.. 커피! 커피는 마시고 가!"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커피 잔을 보며 나는 조바심을 냈다. 비장의 수단마저 실패하게 둘 수는 없었다.


남편은 어서 자리를 뜰 생각인 듯 커피를 빠르게 비웠다. 커피에 든 수면제의 효과가 들기까지 15분, 남편을 잡아둬야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문득 달력에 눈이 갔다. 급한 나머지 나는 오늘 날짜를 보고 문득 든 생각을 바로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그, 그러고 보니 오늘이 찬우 , 찬성이 생일이네?"


뺨이라도 맞은 듯한 남편의 표정을 보며 나는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히... 그 이름 꺼내지도 마.  넌 그 애들 이름 말할 자격도 없어. 알아?  더 이상 그 애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져. 하다못해 그 아이들을 추억할 사진조차 없어.  존재 자체가 '없던 일'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적어도 그 아이들 이름 만큼은  네 그 더러운 입으로 부르지 마."


"다시 낳으면 되잖아! 우리 둘이 다시 결합하면 분명...!"


남편은 나를 경멸하듯 쏘아보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대로는 못 끝내. 다, 다 원래대로 돌려놓을 꺼야 내 남편도, 내 아이도, 내가 누려왔던 행복 전부!"


앞으로 남편이 잠들기까지 10분,  10분이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

나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미친 듯이 남편의 뒤를 쫓았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남편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보였다. 벌써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한 듯 휘청거리는 것이 보인다. 남편을 따라 잡으려  계단을 구르다시피 뛰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는 끝내 남편을 잡을 수 없었다.


1층에 내려온 내가 본 것은 내 남편을 끌어안은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얀진, 그 가증스러운 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