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제 일은 기억나세요?"
"조용히 해."
"인간한테 술싸움을 지는 트루드라... 나이먹으면서 간이 쪼그라들기라도 했나요?"
"내기하기 전에 술이 좀 들어가 있었잖아."

레실리아는 큭큭 웃으며 에와라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대장이 뻗은 다음에 내리 5파인트는 더 들이부었어요. 그 사냥꾼."
"꼴이 말이 아니군."
"옷 입고 나와요. 출발 준비가 거의 끝나가니. 정오가 되기 전에는 출발해야 다음 요새에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어요."
"금방 준비해서 나가지."

레실리아는 가볍게 묵례하고 나갔다. 레실리아가 나가는걸 지켜보다가, 에와라닐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가볍게 얼굴을 씻고는 레실리아가 준비해준 튜닉을 입고 방 밖으로 나섰다. 방 안에 그가 두고 온 물건은 없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요새에서 잘 간직할 것이였기에 그는 그닥 개의치 않았다.
구불구불한 돌계단을 지나, 요새가 순찰대와 사냥꾼을 위해 준비해준 무기고로 들어서자 에와라닐은 중앙 탁자에 놓인 그의 갑옷을 볼 수 있었다.

사냥꾼들이나 수색꾼들과 달리 순찰대들은 항상 두터운 갑옷을 입었다. 스치기만 해도 가죽 갑옷은 가볍게 찢겨져나갈 괴물들의 공격을 대열을 갖추고 그 속에서 직접 받아 내야 했으니까. 그가 천천히 탁자로 다가가자 요새의 인간 시종들이 그의 양옆으로 다가왔다.
튜닉 위에 갬비슨을 입고 그 위에 다시 사슬갑옷을 입었다. 시종 한 명이 갑옷을 잘 펴주는 사이 다른 시종이 정강이가리개와 허벅지가리개를 가져와 그의 다리에 채웠다. 
양팔을 넓게 벌리자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들어 그의 가슴에 채우고는 끈을 어깨와 가슴을 둘러 묶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손을 뻗자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그리고 그의 손에 딱 들어맞는 건틀릿을 그의 손에 채워주었다. 

에와라닐은 한, 두 번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탁자 위에 남은 마지막 물건인 그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을 따라 뽑아져나온 검 끝을 그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제들의 대장장이가 제련한 물건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관리를 잘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수년간 써 왔음에도 여전히 예리함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 그러고 있는 사이, 시종이 검집을 가져와 그에게 양손으로 다소곳이 내밀었다.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검집을 쥐어 검을 검집에 채우자 시종이 다시 검집을 받아 간 다음에 그의 허리에 매주었다.

시종들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간단히 예를 표하고 사라지자 그는 몸을 돌려 무기고 밖으로 나왔다. 무기고 밖으로 나와 잠시 걸어 탑을 돌자, 사냥꾼까지 합쳐 백 하고 열둘의 트루드와 인간들이 그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첫 번째 요새를 떠난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황무지를 떠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드넓은 갈색평원 전체에 깔린 수많은 괴물들과 함께.
그래서인지, 첫 번째 요새를 떠나기 전에 연설을 하곤 하는 순찰대장이나 사냥단장도 존재했다. 하지만 연설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길게 말을 쏟아 내는 대신, 레실리아가 준비해준 말 위로 가뿐하게 올라탔다. 그러고는 손을 높게 들었다가 내리면서 외쳤다.

"출발!"

싸이킥으로 강화된 목소리가 울리면서 대열 전체와 요새 전체를 길게 맴돌았다. 메아리의 울림이 끝나갈 무렵, 대열의 제일 선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열의 제일 마지막이 첫 번째 요새를 빠져나가자 그의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고 있던 레실리아가 그를 향해 가볍게 묵례하고는 대열의 옆으로 주욱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크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순찰 대형으로! 수색꾼들은 앞으로 퍼져나가고 순찰대는 대형 유지! 사냥꾼들은 후미에!"

레실리아의 목소리에 한중간에 있는 그도 알 만큼 대형이 일제히 변하기 시작했다. 가릴 것 없는 평원이기에, 수색꾼들이 퍼져나가는 범위는 더욱 컸다. 인간 수색꾼들이 산개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에와라닐은 고개만 뒤로 살짝 돌려 사냥꾼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움직여야 하지 않나?"

그의 말에 니아젤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의 부관, 페리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몰던 속도를 낮춰 사냥꾼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와 같은 속도로 말을 모는 니아젤에게 에와라닐은 말했다.


"자네는?"
"저희 애들은 이제 똥오줌은 가릴 나이에요."
"사냥꾼들에게 자네의 통제가 필요할 거란 말이 아니라 왜 여기 남아 있냐고 묻는 거였네."

그러자 니아젤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에와라닐이 고개를 돌리자 니아젤은 그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글쎄요? 제가 뒤에 있는 거보다 여기 같이 있는 게 통제하시기 더 편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말고요?"

에와라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대열의 선두에서 지휘하는 레실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불안한 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방식으로 들어맞았다. 옆에서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하는 트루드와 인간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자, 사냥꾼의 부관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둘은 서로 씁쓸한 웃음을 한번 짓고는 다시 애써 옆에서 벌어지는 설전을 피해 앞을 바라보았다.

"아니, 생각해 봐요. 10m 이상의 체급을 가진 괴물 상대로도 순찰대의 방진대형은 충분히 유효하다니까?"
"아니, 순찰대가 짜는 대형은 인간들이 짜는 쉴트롬 대형과 유사해요. 인간들의 쉴트롬 대형이 덩치가 1.5배 정도 차이 나는 트루드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 됐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혹시나 해서 귀를 기울여 봤건만 여전히 쓸모없는 소리였다. 순찰대와 사냥꾼 중 괴물과의 전쟁에서 누가 더 특화되었는지를 따지는 지루한 토론에 에와라닐은 한숨을 쉬며 말을 살짝 앞으로 몰았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니아젤과 레실리아의 말은 계속되었다.

"생각보다 둘이 잘 지내는 것 같군요."

문득 들려온 다른 목소리에 그는 눈을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는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둘이 싸울 것을 걱정했건만, 싸우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저 영양가없는 토론을 듯느라 고역이라 해야 할지 고민이군."
"저희 대장이 좀 그렇죠."
"내 부관도 좀 그러네."

에와라닐이 대꾸하자 사냥꾼의 부관, 페리투스가 희미하게 웃는 게 보였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니, 정적은 아니었다. 여전히 등 뒤에서 레실리아와 니아젤의 치열한 토론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잠시간의 어색함이 지나고 에와라닐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다섯 번째 요새에 가 본 지도 꽤 지난 것 같군."
"저희도 좀 지났네요. 다섯 번째 요새 쪽에 있는 인간의 다리는 건너봤지만 요새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는 것 같고."
"음...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네. 티모르 강의 밤 풍경도 그렇고. 야밤에 강변을 걷다 보면, 발광벌레들이 내는 빛 때문에 마치 세상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네. 물론 지금은 강변을 걸을 수 는 없지만."
"요위들 때문이군요."
"요새에서 자네들이 밤피르와 처절한 전투를 펼쳤던 것처럼, 우리도 길디 긴 티모르강을 따라 요위들과 싸웠지."

에와라닐은 잠시 말을 멈추고 살짝 눈을 감았다. 6년 전. 그가 처음으로 황무지에 도착해, 순찰대의 선택받은 자로부터 시작해서 순찰대의 대장이 된 지 반년 되었을까.

주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티모르 강에서 수백 아니, 수천의 요위들이 쏟아지는데에는 그 어떤 경고나 전조도 없었다.
티모르강에 연했던 마을들은 한순간에 뼈조차 남지 않은 폐허로 무너져 내렸고 갈색 평야의 젖줄과 같았던 티모르강은 순식간에 괴물과 죽음만이 가득한 지옥이 되어 버렸다.

"여섯 달 동안 싸웠네. 뒤로는 괴물들이 들끓는 요새. 앞으로는 요위들이 가득한 강. 옆으로는 구울들로 가득 찬 마을. 해가 뜰 때부터 달이 질 때까지.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저희도 같이 싸웠지요. 첫 번째 요새부터 시작해서, 갈색 평야의 모든 요새 들을 되찾기 위해. 밤피르와 스트리고이.. 심지어 강철이도 봤습니다. 많은 좋은 이들이 죽었죠. 너무 많은 피를 봤습니다."

에와라닐은 천천히 페리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페리투스의 눈 속에는 약한 슬픔이 맺혀 있었다. 에와라닐은 살짝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래. 많은 피를 봤지. 하지만 그게 우리의 의무가 아니겠나?"

"순찰대에겐 의무죠. 저희에겐 복수고. 흘린 피 만큼, 죽여야 할 괴물들도 늘어났으니."

잠시 침묵이 오갔다. 분위기를 돌려보고자, 에와라닐은 애써 헛기침으로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파에스툼에 황무지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냥꾼이 한 명 있었는데."
"파에스툼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냥꾼은 없죠. 이름이 뭐죠?"

페리투스가 대답했다.에와라닐이 잠시 턱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에르키엔...일 거야. 본명은 그게 아니지만, 그런 이름을 쓴다고 했으니까."

그 이름을 듣자 페리투스의 표정이 경직되는 게 보였다. 페리투스는 에와라닐의 말에 잠깐 대답을 않다가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뒤의 둘이 괴물을 사냥하는 데에 있어 공성 병기의 효율성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는 것을 잠깐 보고는 페리투스는 다시 에와라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에르키엔을 압니까?"
"많은 선택받은 자들이 그렇듯, 나도 외지에서 왔네. 에르키엔도 마찬가지이지. 에르키엔이 나이르에서 꽤 이름날리던 기사인건 알고 있나?"
"에르키엔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요?"


에와라닐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툭 쏘아붙이는 말에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는 눈썹을 한번 들썩이고는 말했다.


"8년 전 쯤. 갑자기 연락이 끊기더군. 여러 방면을 통해 알아보니 린트부름을 사냥하러 갔다가 그대로 사냥단원들과 함께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후로 내 힘이 닿는 한, 찾아보려 했지만 찾지 못했어. 혹시나 자네들이 알까 해서 물어봤네."
"그 얘기, 에르키엔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딱딱한 페리투스의 말에 에와라닐은 눈을 살짝 갸늘게 떴다.


"왜지?"

"에르키엔이 니아젤의 어머니이니까요. 부탁하건데, 저희 대장한테 에르키엔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진심입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


5화입니다. 내일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후다닥 올려봅니다.


3화 : https://arca.live/b/writingnovel/38079148?p=1

4화 : https://arca.live/b/writingnovel/38154914?p=1